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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상 전통식품명인이 삼해주 작업실에서 제자들과 환하게 웃고 있다. 왼쪽에서 세 번째가 김택상 명인.
 김택상 전통식품명인이 삼해주 작업실에서 제자들과 환하게 웃고 있다. 왼쪽에서 세 번째가 김택상 명인.
ⓒ 이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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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끌벅적한 삼청동 큰 길에서 조금 물러난 작은 골목에 3대째 우리 술을 빚어오고 있는 '삼해소주가(家)'가 있다. 삼해주(三亥酒)는 12일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돼지날(해일,亥日)에 맞춰 한 번의 밑술과 두 번의 덧술 등 총 세 번의 정성으로 빚어낸다고 해 붙은 이름이다. 정월(음력 1월) 돼지날부터 36일 간격으로 덧술을 하고 총 108일의 발효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삼해주가 탄생한다. 어지간한 정성과 노력을 들여선 받아 들기 힘든 귀한 술이다.

'삼해소주가'의 주인장 김택상 명인(名人)은 지난해  말 농림축산식품부가 지정한 '2016 전통식품명인' 7인의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전국 75인의 명인 중 서울에선 유일하다. 그동안 크게 입소문이 나지도 않아 이름마저 낯선 삼해소주. 어떤 연유로 다른 다양한 음식 장인을 제치고 삼해소주를 빚는 그가 서울에서 첫 명인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 '푸드앤메드'가 지난해 12월 15일 늦은 오후 삼해소주가에서 김택상 명인을 만났다.

술장이가 감내한 30년

현대식 한옥 건물 계단을 올라 현관문을 여니 집안을 가득 채운 오묘한 향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다. 항아리마다 들어찬 누룩이 발효하며 풍기는 향내는 '구수하다'는 단어만으론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 미묘하다. 약간 시큼한 향과 단내도 섞여 있다. 기자는 자신도 모르게 술향에 온 정신이 집중됐다.

향에 취해 반지하 작업실로 걸음을 옮겼다. 벽 쪽으로 놓인 큰 술항아리가 이곳이 전통주 명인의 작업실임을 알리고 있었다. 두 수제자와 이야기를 나누던 김 명인이 술항아리처럼 수수한 미소를 띠며 반겼다. 오후 4시를 조금 넘긴 이른 시간이었지만 이미 김 명인은 "가볍게 술을 한잔 걸쳤노라"고 했다. '이런 게 술장이에게만 용인되는 일종의 작은 특혜 아니겠는가' 하면서도 '어쩌면 이런 삶이 그가 짊어진 멍에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작업실 곳곳에 놓인 항아리에서 술이 익어가고 있다.
 작업실 곳곳에 놓인 항아리에서 술이 익어가고 있다.
ⓒ 이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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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명인은 1988년 정식으로 가업을 이어 삼해주를 만드는 일에 뛰어들었다. 당시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대기업을 그만두고 시작한 일이었다. 사실 명인의 어머니는 삼해주 빚는 일을 며느리에게 물려주고 싶어 했다. 하지만 힘이 들고 경제적으로도 안정적이지 못한 이 일을 선뜻 하겠다고 나서는 며느리가 없었다. 그때 발 벗고 나선 이가 김택상 명인이었다. 오직 '전통이 끊어지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게 벌써 30여 년 전의 일이다.

예상은 했지만 고된 삶이었다. 무형문화재인 모친의 뜻과 우리 술의 전통을 이어간다는 자부심은 있었지만 경제적으론 풍요롭지 못했다. 술독 들이기 좋은 곳에 터를 잡고 제대로 한번 술을 빚어보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은 아직도 이루지 못했다. 현실은 늘 바람과는 반대 방향으로 뒷걸음질 쳤다. 몇 년 전엔 밀린 월세로 쫓기듯 지금의 비좁은 작업장으로 이사 올 수밖에 없었다. 삼해주가 겨울 한 철 빚어 마시는 술인 탓에 생산량이 적다는 이유도 있지만, 공장에서 대량생산한 술은 전통주가 아니라는 김 명인의 고집 때문이기도 했다.

전통주는 느림이 빚어낸 술

"우리 술은 아무리 재료와 조건을 같게 해도 빚을 때마다 맛이 조금씩 달라요. 사람이 직접 손으로 빚고 시간을 들이기 때문입니다. '전통'이라는 말을 붙이려면 그런 게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 명인은 전통주에 대한 철학이 확고하다. 그는 "사람의 손이 닿은, 느림이 빚어낸 술이야말로 진정한 전통주"라고 했다. 공장에서 제조되는 술을 전부 나쁜 술로 정의하는 건 아니다. 다만 김 명인은 수많은 전통주를 뒤로 하고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소주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술로 굳어지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김택상 명인은 공장식 소주가 우리나라 대표 술로 인식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했다.
 김택상 명인은 공장식 소주가 우리나라 대표 술로 인식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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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슈퍼에서 소주 사먹습니다. 근데요. 일본의 사케, 스코틀랜드의 위스키, 프랑스의 브랜디처럼 오래된 전통주가 그 나라를 대표하는 술로 알려졌는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술이 녹색 병에 든 소주라고 하는 건 너무 안타까운 일 아닙니까?"

몇 해 전부터 유행 중인 저(低)도수 소주에 대한 생각을 묻자 그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는 저도수 증류식 소주를 좋은 술로 보지 않는다고 했다. 시판되는 낮은 도수의 증류주 대부분이 인공적으로 맛이나 향을 첨가한 술이기 때문이란다. 전통식으로 제조한 저도주에선 높은 도수의 증류주에서 느낄 수 있는 고유의 맛과 향이 떨어진다고 했다. 김 명인은 국내ㆍ외 대부분의 전통 증류식 주류가 높은 도수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설명했다.

바이주ㆍ위스키ㆍ보드카 등 증류주를 포함해 우리나라의 전통 소주는 보통 알코올 도수가 40도가 넘는다. 대체로 40∼45도 사이가 가장 많다. 이 정도가 술이 가진 최상의 맛과 향을 낼 수 있는 도수라고 한다. 양조과학이 크게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에도 세계 많은 나라에서 40∼45도 사이의 증류주를 선호했다. 누가 기준을 정해놓은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가장 좋은 알코올 도수를 찾다보니 비슷한 선에서 암묵적 기준이 생겼다는 것이다.

"순수한 재료를 바탕으로 전통식으로 빚은 저도수 증류주는 맛이 없습니다. 저도수 소주엔 인공 첨가물을 넣을 수밖에 없죠. 같은 주류라도 그런 술과 전통주는 구분을 좀 했으면 좋겠습니다."

전통주에 대한 그의 자부심이 대단했다.

 목넘김과 후향이 좋은 술이 명주

김 명인은 그동안 시대의 흐름에 맞춰 다양한 변화를 시도해왔다. 재료를 달리하고 재료의 양을 바꾸면서 가장 맛 좋은 술을 빚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정성을 들여 빚어낸 술을 아흔이 넘은 노모(老母)에게 확인받는 일이다. 삼해소주가에선 어머니의 냉철한 평가를 거쳐야 비로소 삼해주가 탄생한다.

"어머니가 술을 빚는 방식 중엔 그 이유를 설명하기 힘든 부분이 있어요. 왜 꼭 쌀가루를 뜨거운 물에 치대야 하는지…등인데, 술을 빚어보면 알아요. 미묘하게 맛이 달라요."

김 명인은 기본적으로 모친의 술 빚는 방식을 따른다. 모친의 방식엔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근거는 없지만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경험과 손맛이 묻어 있다. 변화 속에서도 지켜온 이런 기본 원칙이 그에게 식품명인이란 명예로운 이름표를 붙여줬다고 본다.

김택상 명인과 ‘삼해주 아카데미’에 참여한 제자가 함께 술을 빚고 있다.
 김택상 명인과 ‘삼해주 아카데미’에 참여한 제자가 함께 술을 빚고 있다.
ⓒ 이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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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갓 서른이 된 그의 수제자가 계속해서 새로운 술을 내왔다. 숟가락으로 떠먹는 이화주에서부터 상황버섯주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김 명인에게 어떤 술이 좋은 술인가 물었다.

"알코올 도수가 높아도 입안에서 굴릴 수 있을 만큼 부드럽고 목넘김이 좋아야 합니다. 술을 삼키고 난 후에 남는 후향도 중요하죠. 꽃향기가 강하게 나는 술이 좋습니다."

술 한 모금 한 모금에 그윽한 꽃향이 코끝에 앉았다. 공장식 소주엔 없는 묘한 향이다. 삼해주를 만드는 장인이 서울 1호 전통식품명인으로 선정된 이유를 얼핏 알 것만 같았다.

덧붙이는 글 | 이문예 기자 moonye23@foodnmed.com (저작권 ⓒ ‘당신의 웰빙코치’ 데일리 푸드앤메드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태그:#푸드앤메드, #이문예, #삼해주, #전통주, #식품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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