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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통계청이 발표한 '7월 인구동향'이 크게 보도됐다. 1~8월 누적 출생아 수가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고, 같은 해 연간 혼인 건수도 처음으로 30만 쌍을 밑돌 것으로 예상됐다. 이런 추세대로라면 2029년부터는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할 것이란 전망도 덧붙었다. 두 달 뒤 12월에는 행정자치부가 가임기 여성들의 분포를 도식화한 '출산지도'를 발표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누리꾼들은 "여성이 아이 낳는 가축이냐"며 분노했고 행정자치부는 홈페이지가 마비되는 곤욕을 치렀다.

왜들 그러는지 모르겠다. 대한민국 같은 나라에서 결혼과 출산이 줄어드는 건 호들갑 떨 일이 아니다. 탓할 것도 권할 것도 없다. 먹이 구하는 게 어려워진 생물 집단의 규모가 작아진다는 건 중학생도 아는 상식이다. 굶주림은 번식에 여러 제약을 낳는다. 먹이 구하기가 턱없이 힘든 겨울철을 번식기로 삼는 동물이 드문 것만 봐도 그렇다. 우선, 허기진 개체는 포식자의 공격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떨어진다. 번식기의 교미 경쟁도 버거워지고, 성공한다 치더라도 어린 새끼들의 미래는 배고픔 앞에서 훨씬 더 취약하다. 야생과 문명 사회는 과연 얼마나 다를 수 있을까?

사실 인류가 굶주림을 벗어 던진 건 벌써 수십만 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인류가 먹이를 구하는 데 활용한 '수단의 변천사'를 통찰해내는 디테일도 필요하다. 사냥과 채집에 필요한 육체는 거의 대부분의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어서, 비교적 평등한 조건의 준비물이었다. 기껏해야 돌도끼를 만들 수 있을 만한 창의력이 더 요구되는 정도면 충분했다. 인류의 조상들은 함께 사냥하고 함께 나누어 먹었다. 그러나 농경사회에서는 먹이를 구하려면 농사지을 땅이 필요했다. 영주는 토지를 가진 채 태어났지만 그렇지 못한 농노들은 굶주렸다. 산업사회에서 새롭게 '먹이'의 지위를 획득한 것은 화폐였는데, 공장에서 만든 상품을 팔아야만 그것을 얻을 수 있었다. 누구나 공장을 가질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봉건제는 사라졌지만 대다수 노동자의 굶주림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2017년의 한국 사회에서 '임신 가능한' 세대의 굶주림은 더욱 치열하다. 생산수단을 가지기는커녕, 지금은 착취를 누릴 수 있는 노동자가 되는 것마저 쉽지 않다. 어렵사리 일자리를 얻는다 해도 미래를 감히 약속받을 수는 없다. 인간은 '먹이 활동'을 향해오는 압박에 더욱 민감하고 정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많이 낳고 대충 돌보는' 개구리와는 달리, 인간은 '적게 낳고 열심히 돌보는' 번식 전략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똑같이 주머니 사정이 나빠지더라도 개구리의 산란은 예전과 다를 바 없건만, 인간의 육아는 훨씬 더 고통스럽고 수고로워진다. 현대의 '먹이 불균형'은 새로운 형태의 굶주림이 되어 인간에게 짝짓기 압박으로 작용하게 되는 셈이다.

우리를 짝짓기 압박으로 몰아넣는 불균형은 또 있다. <털 없는 원숭이>로 유명한 동물행동학자 데즈먼드 모리스는, 좁은 도시에 빽빽하게 몰려든 현대인의 생활환경이 마치 그가 근무하고 있는 동물원의 그것과 몹시 비슷하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야생에서의 동물들은 결코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는다. 그러나 동물원 우리에서처럼 과밀한 환경에 놓인 동물들은 (번식이 아니라) 우월한 지위를 확인하기 위한 섹스를 하거나 파벌을 만들어 전쟁을 벌이기도 하고, 자살하기도 한다.

도시라는 좁은 공간에 스스로를 가둔 현대 인류도 마찬가지다. 지구 위를 걷는 인간들의 무려 절반이 콘크리트 정글에 모여 살아간다. '인간 관찰'의 집단 버전이랄 수 있을 <인간 동물원>에서 그는, 도시인이 겪는 여러 불행들이 동물원에 갇힌 동물들의 상황을 빼닮아있다고 보았다. 부족을 넘어 '초부족(super-tribes)'을 이룬 도시에서는 ▲초지위(super-status)를 더욱 굳히려는 우두머리의 폭력이 극심해지고(무리의 고조된 공격성은 배출구를 필요로 한다. 가장 약한 개체는 자살을 선택하기도 한다), ▲초섹스(super-sex. 번식 외에 목적을 두는 9가지 섹스 형태)가 나타나며, ▲외집단(outer-groups. 다른 성별, 다른 인종, 다른 민족, 다른 국가 등)을 상정해 그것과 싸우며 무리의 결속을 꾀하거나, ▲성 정체성과 관련된 각인이 잘못 이루어지는 현상(성기가 아닌 신체부위, 특정 물체 등에 성적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경우)이 나타나기도 한다. 도시에서의 경쟁은 보다 치열하며, 그 결과 앞서 언급한 먹이의 불균형은 더욱 도드라진다. 간단히 말해, 현대인들은 사실상 '사회적 불임'을 선고받는 셈이다.

도시는, 전 세계 총생산의 80%를 담당한다. 인간에겐 치명적인 유혹이 아닐 수 없다. 박민규는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주인공을 통해, "말이 풀을 뜯고 새가 하늘을 날 듯 인간은 '돈 돈'하는 존재인 거예요" 라고 말하곤 한다. 우리를 이렇듯 '불균형들' 속으로 밀어 넣은 원동력이 어쩌면 인류 그 자신의 욕심이었던 게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해보게 된다. 자연을 더욱 쉽고 편리하게 이용하려던 노력이 농경의 발단으로, "수고하여야 네가 먹으리라"던 신의 저주로, 자연에 대한 세찬 광기를 띤 '가공'으로, 급기야는 편리와 파괴를 동시에 부추기는 기계의 발명과 산업화로 이어진 게 아닐까 하고. 한편으로는 이웃 부족과의 경쟁이 국가라는 권력을 낳고, 식민지를 약탈하게 하고, 시나브로 시작된 '쩐의 전쟁'을 거치는 사이 마침내 맹목적인 도시화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 하고도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 인간은, 생태계에서든 사회에서든, 약자를 더욱 착취하는 방식으로 역사를 이어왔던 것만 같은 결론에 얼씬거려 보곤 한다. 그 욕심이 독점을 낳고, 후발 주자들을 꼬드기고, 복잡한 도시를 세우고, 끝도 없는 경쟁을 부채질해서, 마침내 부메랑처럼 그 자신으로 하여금 사회의 불임을 '잉태'하게 만든 게 아닐까? 그러니, '호모 에코노미쿠스(경제적인 인간)'를 조상으로 둔 과오를 이제 와서 어찌할 수 없다는 걸 알았거든 저출산이 '문제'라는 오해에서 손을 떼시라.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가 표어이던 시절이 있었다. 집집이 적게 잡아도 예닐곱씩은 아이들이 있던 시절이었다.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막 움트던 1967년 그 해, 우리 국민 한 사람의 연간 소득은 고작 145달러였다. 지금은 국민소득이 2만 7천 달러가 넘었는데도 우리는 가난하다. 99%의 국민이 이 기막힌 역설을 참아낸다는 게 문제의 몸통이다.

요즘 표어는 "아빠! 하나는 싫어요, 엄마! 저도 동생 갖고 싶어요" 란다. 그 때는 인구가 많아서 탈이고, 지금은 적다고 야단이다. 경제는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만족스럽지 않은데 핑계는 이렇게나 변덕스럽다. '먹물'이라는 족속들은 참 편해서 좋겠다. 그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자 청년에게 n포세대라는 딱지를 붙이곤 한다. '가져야 한다'의 우물에서 단 한 발짝도 기어 나와본 적이라곤 없는, 그래서 우리가 뭘 포기하기 전에 가져본 적도 없었던 걸 모르는, 꼰대들의 힐난에 그리 신경을 쓰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또다시 출산 지표를 들먹이며 공포 마케팅을 일삼는다면 수고스럽더라도 또 가르쳐 주자. 우리는 개구리가 아니라고. 진짜 개구리는 당신네들이라고.

덧붙이는 글 | 바꿈 홈페이지에 게재됩니다.



태그:#청년, #세대, #출산, #육아, #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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