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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2월 22일 오후 2시 22분,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모토를 내걸고 <오마이뉴스>는 창간했습니다. 어느덧 창간한 지 17년이 지났고, 시민기자 수는 8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오랜 시간 꾸준히 활동해온 시민기자들의 창간 17주년 소감을 몇 차례에 걸쳐 싣습니다. [편집자말]
김종술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김종술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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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오마이뉴스>란 기회의 땅이었다.

글쓰기, 배운 적 없다. 취재방법은 독학으로 익혔다. 육하원칙은 '수학의 정석'에 나오는 공식인 줄 알았다. 그래서 <오마이뉴스> 편집기자들은 내가 기사만 올리면 벌벌 떨었다. 글은 거친데, 목소리만 컸다.

나도 안다. 난 고집불통이다. 다른 사람 말은 안 듣는다. 오직 내 눈으로 보고 만진 것만 쓴다. 지역신문 기자 시절에도 사건이 터지면 독불장군처럼 혼자서 해결했다. 책상에 앉아 글만 쓰는 소위 '중앙 언론' 기자들도 아니꼽게 봤다. 하지만 파산 기자가 돼서는 절박했다. 이름 없는 지역신문의 투박한 글을 받아줄 언론사는 없었다. 어딘가에 글이 실리는 게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웠다.

외롭고 힘들 때 <오마이뉴스>를 만났다. 대전충청 지역의 심규상 기자는 동방에서 온 귀인 같았다. '모든 시민은 기자'란 모토는 모든 걸 포기한 나에게 꿈을 꾸게 했다.  

모든 걸 포기한 나를 꿈꾸게 만든 <오마이뉴스>

금강의 뼈와 살을 발라내던 그날부터 나의 전쟁은 시작되었다.
 금강의 뼈와 살을 발라내던 그날부터 나의 전쟁은 시작되었다.
ⓒ 김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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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강. 지역에선 '금기어'였다.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부지기수의 언론사가 '4대강 용비어천가'를 불렀다. 4대강 사업의 민낯을 고발한 내 기사를 받아준 곳은 오직 <오마이뉴스> 뿐이었다. 뒷배가 생기니 든든했다.

한 마리의 나비처럼 4대강 사업 공사현장을 날아다녔다. 벌이 돼 가짜 삽질에 침을 날렸다. 그러다가 배 터지게 욕을 먹고 삽자루가 날아오는 개고생 취재를 하기도 했으나 기사를 받아줄 <오마이뉴스>가 있어 두렵지 않았다.  

매일 강으로 향했다. 밤이면 어두컴컴한 방에서 빚 독촉에 잠을 설쳤지만, 아침이면 어김없이 강에 갔다. 4대강 사업의 민낯. 누군가는 꼭 역사를 기록해야 했다. 그렇게 쓴 4대강 기사가 1000편이 넘는다.

특종도 여러 번 거머쥐었다. 금강 물고기 떼죽음, 큰빗이끼벌레 창궐, 공산성 붕괴...<오마이뉴스>가 있어 가능했다. 목이 뻣뻣한 '중앙 언론사' 기자들이 나를 찾아와 정중히 취재를 부탁하고 존경한다는 말까지 보탰다. 내가 <오마이뉴스>를 믿고, <오마이뉴스>가 나를 믿어준 덕분이다.

이게 다가 아니다. <오마이뉴스>에서 4대강 특별취재팀을 꾸려 4년째 함께하고 있다. '나 홀로 4대강 취재'에서 벗어나 팀장, 본부장급 상근기자부터 시민기자까지 수많은 친구들이 생겼다. 금강만 취재하던 내가 낙동강, 영산강, 한강에 이르는 4대강 현장 전문기자가 됐다.

큰빗이끼벌레를 삼키고 녹조에 몸을 던졌다. 죽은 물고기를 찾아내기 위해 손가락 삽질로 강바닥을 파헤쳤다. 입고 있던 그대로 한강과 낙동강에 들어가 환경부 수 생태 4급수 오염지표종인 실지렁이와 붉은 깔따구를 끄집어냈다.

피부가 오돌토돌해지고 온몸에 두드러기가 생겼다. 머리가 깨지는 고통에 두통약을 끼고 살았다. 결국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아니, 오히려 이런 나의 이야기를 실어준 <오마이뉴스>에 고맙다.

'낙동에 살어리랏다' 탐사보도팀이 지난 8월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서원앞 낙동강에서 투명카약을 타고 녹조 탐사활동을 벌였다. '금강지킴이' 김종술 시민기자가 투명카약을 타고 낙동강 녹조 위를 지나고 있다.
 '낙동에 살어리랏다' 탐사보도팀이 지난 8월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서원앞 낙동강에서 투명카약을 타고 녹조 탐사활동을 벌였다. '금강지킴이' 김종술 시민기자가 투명카약을 타고 낙동강 녹조 위를 지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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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숙여 인사를 할 일은 또 있다. <오마이뉴스>는 펀딩을 모금해 내게 투명카약을 선물했다. 이게 끝이 아니다. 이름이 알려지면서 원고 청탁이 밀려들었다. 강의요청에 공동저자로 참여해 책을 펴내자는 제안까지 왔다. 인구 10만 소도시에서 살아가는 이름 없는 지역신문 기자가 누구나 부러워하는 기자로 탈바꿈했다.

상복도 터졌다. <오마이뉴스>가 시민기자에게 주는 기자상과 특종상, 으뜸상, 특별상에 이어 올해의 뉴스게릴라까지 수많은 상을 받았다. 환경 부문에서도 이름을 알렸다. 상금 1천만 원인 SBS 물환경대상 반딧불이상, 환경재단의 '2014년 세상을 밝게 만든 사람들' 등 크고 작은 환경 단체의 수상대에 올랐다.

시민기자로는 최초로 기자협회에서 주는 '이달의 기자상'과 언론 민주화와 평화, 통일 분야 발전에 기여한 이에게 주는 '성유보 특별상'까지, 책장이 트로피로 채워졌다. 

제2, 제3의 김종술이 나오길 바라며...

지난해 8월 충남 부여 금강 백제보 상류 2km 지점에서 <오마이뉴스> 김종술 시민기자가 강바닥의 토양을  채취해 살펴보고 있다.
 지난해 8월 충남 부여 금강 백제보 상류 2km 지점에서 <오마이뉴스> 김종술 시민기자가 강바닥의 토양을 채취해 살펴보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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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덕분에 모든 게 달라졌다. '물고기 몇 마리 죽은 게 무슨 상관있냐'며 비아냥거리던 비웃음이 사라졌다. 듣도 보도 못한 욕설로 매일 괴롭히던 전화가 사라졌다. 인터뷰 요청을 하면, 요리조리 핑계만 대고 피하던 국토부 직원들도 전화를 받았다. 멱살을 잡고 죽일 것처럼 달려들던 시공사 작업자도 지금은 묻는 말에 고분고분하게 답해주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그래서다. 언젠가 타 언론사에서 '콜'이 왔다. 부장급 대우를 해주겠다고 유혹했다. 당시 금전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에 고민이 컸다. 하지만 <오마이뉴스>를 배신할 수 없었다. 누구 때문에 내가 이렇게 컸는데, 홱 돌아설 수 없었다. 끝내 거절했다. 

공주보 앞에서 큰빗이끼벌레를 건진 뒤 냄새를 맡아보는 김종술 시민기자.
 공주보 앞에서 큰빗이끼벌레를 건진 뒤 냄새를 맡아보는 김종술 시민기자.
ⓒ 김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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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렁텅이에 빠질 때마다 <오마이뉴스>가 꺼내줬다. 금전적으로 어려운 시기 나의 이야기를 <다음 스토리펀딩>에 연재해 줬다. 바쁜 시간을 쪼개서 글을 써주고 기사를 다듬어 줬다. 8천만 원이 넘는 후원금이 모였다. 이 자리를 빌려 글을 써준 시민기자와 상근기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다.

언론은 권력과 자본 앞에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다. 언론이 제 목소리를 내려면,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 <오마이뉴스>는 기울어진 언론지형에서 고군분투하는 진보언론이다. 혼자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십시일반 힘을 모아야만 태산을 옮길 수 있다.

창간 17주년을 맞이하는 <오마이뉴스>가 권력과 자본에서 독립할 수 있게 '10만인 클럽'에 가입해 달라. 없는 살림이지만 나도 '10만인 클럽' 회원이다. 제2, 제3의 김종술이 나타나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약자의 목소리가 <오마이뉴스>를 통해 지금보다 더 많이 세상에 울려 퍼지길 희망한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고 진실이 침몰하지 않는 세상'을 위해서라도.


태그:#오마이뉴스창간17년, #김종술, #금강, #4대강사업,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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