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임진왜란 중 원균이 수리한 상당산성
 임진왜란 중 원균이 수리한 상당산성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청주 상당산성의 상당이라는 이름은 백제 때 청주목을 상당현이라 부른 데서 유래했다. 지금 보는 성은 임진왜란 때 일부 고친 후, 숙종 42년(1716) 네모나게 다듬은 화강암으로 다시 쌓은 것이다. 성벽은 지금도 비교적 잘 남아 있으나 성벽 위에 낮게 쌓은 담(성가퀴)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그래도 위용과 멋을 뽐내는 성문과 치성(성벽 바깥에 덧붙여 쌓은 벽) 앞에 서면 멀리서 찾아온 답사자의 마음은 저절로 흐뭇해진다.

상당산성은 이순신과도 약간의 관련이 있는 곳이다. '약간'이라고 표현한 까닭은 이순신 본인이 이 산성과 직접 관련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5세손 이봉상(1676∼1728)이 청주에서 전사했는데, <영조실록>은 그를 '충무공의 후손'이라고 특별히 밝혀두었다.

이순신의 5세손 이봉상이 '전사'한 상당산성

이봉상은 조선 19대 임금 숙종 2년에 태어나 21대 임금 영조 4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임진왜란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 14대 임금이 선조(1567∼1608), 그 다음이 15대 광해군(1608∼1623), 다시 그 다음이 16대 인조(1623∼1649)인데, 인조 재위 중에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1637)이 일어났다. 그러므로 이봉상은 호란과도 무관하다.

 이인좌의 난을 제압한 기념비가 상당산성 남문 가는 입구에 세워져 있다.
 이인좌의 난을 제압한 기념비가 상당산성 남문 가는 입구에 세워져 있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이봉상의 생애 기간에는 전쟁도 없었는데 어떻게 그가 전사를 했다는 것인지 궁금하다. 영조(1724∼17876) 재위 4년인 1728년에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다. 권력에서 밀려난 소론과 남인 일부가 영조를 몰아내기 위해 일으킨 반란이었다. 반란군은 1728년 3월 15일 청주성을 함락하는 등 기세를 올렸으나 3월 24일 안성과 죽산 일대에서 관군에게 격파당하면서 결정적으로 몰락했다. 이인좌가 한양으로 끌려와 능지처참되고, 지금의 경남 서북부 일원을 점령했던 정희량 세력도 경상도에서 진압되면서 반란은 끝났다.

이봉상 생애에는 전쟁이 없는데 어떻게 '전사'를 했을까

이봉상은 국가 간의 싸움인 전쟁에서 전사를 한 것이 아니라 흔히 '이인좌의 난'이라고 부르는 내란 중에 반란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당시 이봉상은 충청도 전역의 군사를 지휘하는 충청병사로서 청주에 머물고 있었다. 조선 시대, 충청도 일원 육군 본부는 서산 해미읍성이었고, 수군 본부는 보령 오천성이었다.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근무하는 충청병영이 청주로 옮겨온 것은 1651년(효종 2)으로, 임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청주의 지리적·군사적 중요성이 부각된 결과였다.

이봉상의 죽음은 <영조실록> 1728년(영조 4) 3월 15일자에 실려 있다.

 상당산성 남문
 상당산성 남문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적(반란군)이 청주성을 함락시키니, 절도사(충청병사) 이봉상과 토포사 남연년이 죽었다. (중략) 적의 무리가 청주 경내로 몰래 들어와 거짓으로 장례를 지낸다면서 상여에 무기를 실어다 성 앞 숲속에다 숨겨 놓았다. 이에 앞서 성안의 민가에서 술을 빚었는데, 이 무렵 청주 가까운 고을에 반란군이 당도했다는 말이 무성했다. 누가 병사 이봉상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으나 이봉상이 믿지 않고 대비를 하지 않았다. (중략)

이날 밤 이봉상이 잠들어 있는 중에 반란군이 병영 안으로 돌입했다. 관기(관청 소속 기생) 월례와 이봉상의 신뢰를 얻고 있던 비장 양덕부가 적들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놀라고 당황한 이봉상이 침상 머리맡에 두었던 칼을 찾느라 허둥대다가 적들에게 생포되었다. 적들이 항복하라고 하자 이봉상은 세 번 연이어 크게 꾸짖었다.

"너는 충무공(이순신) 집안이 대대로 충의를 이어온 줄도 모르느냐? 어서 죽여라!"

마침내 적들이 이봉상을 죽였다.'

<영조실록>은 이 기사의 끝을 '이봉상은 충무공 이순신의 후손으로(忠武公舜臣之後孫) 임금이 그 충성을 가상히 여겨(上嘉其忠) 좌찬성을 추증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며, 청주에 사당을 세우고 표충사(表忠祠)라 사호(賜號, 임금이 이름을 내림)했다'라고 장식하고 있다.

실록의 기록을 세밀하게 읽어보면, 이봉상의 죽음은 별로 명예롭지 못한 듯 여겨지기도 한다. 반란군이 관할 구역인 청주에까지 진입했다는 보고를 받고도 제대로 대비를 하지 않았고, 자신이 거느리는 관기와 장수가 거꾸로 반란군을 위해 병영 문을 열어주었고, 위급한 상황에 칼도 찾지 못하는 등 병사다운 모습과 거리가 멀다.

병사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이봉상

이인좌의 난 당시 의병을 일으켜 싸움터로 달려갔던 선비 박계우의 문집 <의은유집(義隱遺集)>도 이와 비슷한 증언을 남기고 있다. 당시 경북 선산에 살고 있었던 박계우는 선산부사 박필건에게 창의할 것을 제안, 부사가 지휘하는 금오진군(金烏鎭軍)의 참모가 되었다. 금오진군은 경남 거창 우척현 전투에서 특히 큰 공을 세웠다.

 이인좌의 난 때 창의한 선비 박계우의 문집 <의은유집>은 당시 상황을 파악하는 데 소중한 사료이다. 사진의 붉은 표시 부분은 '적들이 갑자기 병영 안으로 진입해 병사 이봉상을 죽였다'라는 대목이다.
 이인좌의 난 때 창의한 선비 박계우의 문집 <의은유집>은 당시 상황을 파악하는 데 소중한 사료이다. 사진의 붉은 표시 부분은 '적들이 갑자기 병영 안으로 진입해 병사 이봉상을 죽였다'라는 대목이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금오진군은 우척현 전투에서 반군 지도자 정희량과 이웅보 등을 생포했다. 경기도 죽산 전투에서 꺾인 이인좌가 절에 숨어들었다가 마침내 생포되어 처형된 상황에서 경남 일원을 휩쓸고 있던 정희량 등을 사로잡은 것은 반란을 완전히 종결시키는 엄청난 공로였다. 박계우는 문집에 이렇게 썼다.

'이인좌가 청주 경내에 잠입한 후 영장(營葬, 관청의 장례)을 자칭하면서 상여에 무기를 실어 성앞 숲속에 감추어 두었다. 적들은 밤이 깊어지자 벽력같이 병영 안으로 쳐들어가 병사 이봉상을 죽이고 영장 남연년을 잡아 항복하라고 했다. 남연년은 욕을 퍼부으면서 끝까지 굴복하지 않다가 마침내 칼에 맞아 죽었다. 우후(부사령관, 상당산성 주둔) 박종원은 적에게 투항하였다.'

박계우의 기록에 따르면 이봉상은, 실록의 내용과는 달리, 방심하고 있다가 그냥 반란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끝까지 충의를 지켜 처절하게 저항한 사람은 남연년이다. 다산 정약용도 한시 '비서원(悲西原)'을 지어 당시 상황을 증언한다. 제목에 '서원(청주)에서 슬퍼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는 이 시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元師營中鬧絲竹
원수(이봉상)의 감영에 풍악소리 요란하고
紅酒酕醄挾素妓
좋은 술에 취하고 고운 기생 옆에 끼니
劍及牙門慵不起
방 안까지 칼 들어와도 나른하여 못 일어나네
盡節唯一南延年
끝까지 절의 지킨 이 남연년 혼자로다'

이순신과 사이가 나빴던 원균, 상당산성을 수리하다

임진왜란 중에 상당산성을 고치고 쌓는 일을 한 사람은 원균이었다. 수군인 원균이 어째서 육지의 산성 수축을 관장했는지 의아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순신도 22년에 걸친 군인 생활 중 절반인 11년을 육군으로 지냈다. 당시의 장수들에게는 육군과 수군의 구분이 없었다. 그래서 진주목사 배설이 경상우수사로 발령을 받고, 경상우수사 원균이 충청병사로 전임된다.

 상당산성의 성벽
 상당산성의 성벽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선조실록> 1596년(선조 29) 5월 7일자 기사에 원균의 상당산성 공사와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윤형이 선조에게 아뢴다.

"신이 충청도 남포 땅에 있을 때에 보니, 부역(노동 동원)이 많아서 백성이 편히 살지 못하였습니다. (중략) 병사 원균은 상당산성을 쌓으면서 사정도 살피지 않고 어려운 고을이든 넉넉한 고을이든 무조건 각각 2∼3백 명씩 부역에 참여하도록 조치하였습니다. 생활 근거가 분명하지 않은 자들은 부역을 피해 떠돌이가 되고, 남아 있는 자들도 앞날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백성이 원망하고 배반한다면 성을 아무리 굳게 쌓은들 누가 지킬 것입니까. 게다가 한창 농사철에 백성을 동원하니 원망이 더욱 극심합니다. 우선 농한기를 기다려 성쌓기에 백성을 동원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김응남이 말한다.

"윤형은 잘못된 점을 아뢰었지만 원균 같은 사람은 쉽게 얻을 수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중략) 원균은 수군 장수의 재주를 지녔으나 이순신과 서로 의견이 맞지 않으므로 할 수 없으니, 혹 경기 수사를 제수하면 그 재주를 펼 수 있을 것입니다."

김응남의 의견에는 세 가지 뜻이 들어 있다. 첫째, 이순신과 원균이 모두 수군 장수로 재능이 특출하지만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 둘째, 원균을 상당산성에 육군으로 두지 말고 수사로 옮기자. 셋째, 원균을 남해안에 배치하면 두 사람이 또 다투게 될 테니 경기수사를 맡기면 좋겠다.

이순신과 원균의 불화는 조선의 걱정거리

김응남의 발언은 이미 원균이 바다를 떠나 충청병사로 와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원균이 바다를 떠나 상당산성으로 오게 된 데에는 이순신의 영향이 컸다. 이순신이 조정에 원균을 충청병사로 보내달라고 요청한 바는 없지만 결과가 그렇게 되었다.

 상당산성의 성벽
 상당산성의 성벽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1594년 11월 12일,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에서 물러나겠다고 스스로 사직서를 제출한다. 조정은 이순신의 자진 사퇴 청원을 원균과의 불화 때문에 빚어진 사건으로 받아들인다. 조정은 군대 문제를 총괄하는 비변사 회의를 거친 후 11월 28일 '두 장군의 극심한 불화 때문에 수군 전체의 지휘력과 전투력 발휘에 큰 문제가 되고 있다'면서 선조에게 처분을 묻는다. 선조가 대답했다.

"이순신을 다른 자리로 보내는 경우에는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삼고, 아니면 원균을 충청병사로 보내고 다른 사람을 경상우수사로 삼아야겠다."

그렇게 말한 선조는 12월 1일에 이르러 대신들에게 어떤 결론을 얻었는지 물었다. 대신들은 세 사람을 추천했다. 결국 12월 19일 배설이 원균의 경상우수사 후임으로 정해지고, 원균은 충청병사로 옮기는 것으로 결판이 났다. 원균과 배설의 교대식이 거제도 경상우수영에서 거행되었는데, 여기서 원균의 불만이 폭발했다.

1595년 2월 27일자 <난중일기>에 따르면 '임금이 내린 문서에 공손히 절을 하라는 말을 들은 원균의 표정에 불평하는 빛이 많았다. 결국 주위 사람들이 두세 번 재촉하자 원균이 억지로 절을 했다.' 이 교대식에 직접 참석하지 않았던 이순신은 누군가로부터 들은 내용을 기록하면서 '너무나 무식한 것이 가소롭다'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순신 왈 "원균은 무식하고 가소롭다"

무식한 것이 가소롭다? 원균에 대한 혹평이다. 그 외에도 이순신은 원균에 관한 상당수의 참혹한 평가를 일기에 싣고 있다. 일기에 무슨 내용을 쓰든 그것은 본인의 자유일 터, 이순신이 원균에 대해 나쁘게 썼다고 해서 그 자체를 탓할 수는 없다. 다만 선조가 다른 두 장수의 불화를 예로 들면서 "과장된 말이겠지만, 두 사람은 물과 불의 상극이기 때문에 전쟁 중에도 서로 구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서로 해칠 것이다.(1594년 11월 12일 <선조실록> )"라고 발언하는 상황은 큰 문제임이 분명하다.

수군을 대표하는 이순신과 원균 두 장군이 서로를 너무나 싫어했다는 것은 나라의 큰 손실이다. 한산대첩을 이룰 때만 하더라도 함께 적을 무찔렀는데, 점점 사이가 나빠져 임금과 조정 관리들이 두루 걱정하는 지경까지 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순신과 원균의 화해를 위해 바치는 시 한 수

상당산성 남문 위에 서서, 두 분이 묵은 감정 따위는 잊고 하늘에서나마 정겨운 사이로 재탄생하시기를 소망해본다. 이 성은 이순신과 원균 두 분 모두에게 인연이 있는 곳이니 그런 소박한 바람을 빌기에는 아주 적격이리라.
 
 주차장과 상당산성 남문 사이의 김시습 시비
 주차장과 상당산성 남문 사이의 김시습 시비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그런 마음에서, 두 분께 시 한 수를 바칠까 한다. 산성 정문으로 오르는 길목에 세워져 있는 김시습 시비에 새겨져 있는 시로, 원문 한시에는 '遊山城(유산성)', 한글로 번역하면 '산성에서'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는 적품이다.

'꽃다운 풀 향기 신발에 스며들고
활짝 핀 풍광 싱그럽기도 하여라
들꽃마다 벌이 와 꽃술 따 물었고
살진 고사리 비 긴 뒤라 더욱 향긋해
웅장도 하여라 아득히 펼쳐진 산하
의기도 드높구나 산성마루 높이 오르니
날이 저문들 대수랴 보고 또 본다네
내일이면 곧 남방의 나그네일 테니'

김시습만이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내일이면 모두 나그네가 된다. 날이 저문들 무에 대수겠는가. 오늘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지만, 내일이라고 해서 끝없이 사람을 맞아주는 것은 아니다. 서로 사랑하고, 다정하게 아껴줄 시간도 모자란다. 보고 또 보아야 한다. 들꽃마다 벌이 와 꽃술을 따 물고 있는데…….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장편소설 <소설 의열단><소설 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