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풀은 결코 혼자 걷지 않는 클럽이다.

리버풀은 결코 혼자 걷지 않는 클럽이다. ⓒ 리버풀 FC 공식 페이스북


You'll Never Walk Alone- 유럽을 붉은색으로 물들이다. 붉은 제국 리버풀

프리미어리그 개편 전까지 최다 우승(18회)의 지위를 누린 클럽. 잉글랜드 클럽 중 UEFA 챔피언스리그 최다 석권(5회) 클럽. 록밴드 비틀즈의 향수가 서려 있는 클럽. 이 모든 것을 통용하는 클럽이 바로 리버풀이다. 예년보다 그 기세가 한풀 꺾였다지만, 그래도 많은 팀이 리버풀을 만나면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다. 리버풀이 축구 종가 잉글랜드에서도 명가로 평가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1892년 창단한 리버풀은 70년대 후반 빌 샹클리와 밥 페이즐리라는 명장을 만나 황금기를 구가한다. 그들의 기세는 80년대 후반까지 지속해 잉글랜드를 넘어 유럽까지 호령한다. You'll Never Walk Alone. 혼자 걷지 않고 모두가 함께 걷는 클럽, 리버풀이다.

전성기의 서막을 열다

샹클리 감독 부임 이전까지 리버풀은 강등권을 헤매며 최악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1959년, 샹클리 감독 집권 이후 리버풀은 완전히 새로운 팀으로 탈바꿈한다. 샹클리 감독은 1년간 전국 각지를 돌며 존 토샥, 케빈 키건, 테리 맥더멋, 제프 스트롱, 론 예이츠 등 각 포지션마다 최고의 선수들로 스쿼드를 살찌웠다.

 리버풀 전성기 서막의 주인공 빌 샹클리 감독

리버풀 전성기 서막의 주인공 빌 샹클리 감독 ⓒ 리버풀 FC 공식 페이스북


샹클리 감독이 부임한 지 5년째 던 1964년, 마침내 리버풀은 6번째 리그 우승을 이루며 결실을 이루기 시작한다. 당시 리그 우승은 리버풀에 17년 만의 우승이었다. 한 번 우승을 맛보자 붉은 제국은 빠르게 세력을 확장했다. 1963-1964시즌 우승 이후 리버풀은 FA컵 우승 2회(1965년, 1974년), 리그 우승 2회(1966, 1973년) UEFA컵(현 유로파리그) 우승 1회(1973년) 등을 이루며 명문 클럽으로서 입지를 다졌다.

이처럼 샹클리 감독은 팀에 우승이라는 가시적인 성과를 남기기도 했지만, 팬들과의 소통에도 적극적인 감독이었다. 리버풀 대표 서포터즈 'The Kop'(콥)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리버풀을 가장 충성스런 팬들을 보유한 클럽으로 성장시켰다.

"머지사이드에는 최고의 팀이 2개 존재한다. 바로 리버풀과 리버풀 리저브팀이다" 빌 샹클리 감독의 이 같은 표현은 더비 라이벌 에버튼을 자극하기 위한 도발이자 팬들에게 클럽의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한 표현이었다. 이후 그는 1974년 FA컵 우승을 끝으로 건강이 악화하자 밥 페이즐리에게 감독직을 물려주고 명예롭게 은퇴한다.

명장이 명장을 키우다

샹클리 감독 후임으로 임명된 페이즐리는 명장이 될 자질을 갖추고 있던 인물이었다. 샹클리 시대 때 전성기를 펼친 리버풀은 페이즐리 감독을 만난 이후 더 높이 비상한다.

페이즐리 감독은 선수 시절 줄곧 리버풀에서 활약한 대표적인 원 클럽맨이었다. 은퇴 이후에도 리버풀에 남아 물리치료사를 하며 팀에 꾸준히 헌신해온 페이즐리는, 마침내 전임 감독인 샹클리 감독이 물러나자 팀을 이끌게 된다.

사실, 샹클리 감독 시절부터 코치직에 있던 페이즐리는 감독이나 다름 없었다. 선수단 기강 유지와 팬과의 의사소통 등 팀 관리에 유능한 샹클리는 매니저 성격이 강했던 감독이었다. 전술적 역량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샹클리 감독은 페이즐리에게 팀 전술에 대한 권한을 일임했다. 샹클리와 다르게 전술적 역량이 뛰어난 페이즐리는 당시로써는 생소한 볼 없는 움직임을 선수들에게 요구했고, 패스 축구가 유행하지 않던 잉글랜드에서 유일하게 패스 축구를 선호했다. 명장 샹클리 밑에는 또 다른 '명장' 페이즐리가 숨어있었다.

감독으로서 보낸 첫 시즌은 무관에 그쳤다. 하지만 팀 파악에 주력한 페이즐리는 2년 차인 1975-1976시즌, 리그와 UEFA컵을 동시에 석권해 더블을 이뤄냈다. 샹클리 감독 시절 이룬 1965-1966시즌 더블(리그, 컵위너스컵) 이후로 10년 만에 달성한 더블이었다.

전 유럽까지 붉은색으로 물들이다

1972-1973시즌 더블로 잉글랜드를 접수한 리버풀에겐 국내 무대가 한없이 좁았다. 샹클리 시절에도 유러피언컵(현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맛보지 못한 리버풀은 드디어 별들의 무대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리버풀은 페이즐리 감독의 지휘 아래 1977년, 묀헨글라트바흐를 3-1로 꺾고 창단 이후 첫 유러피언컵 우승을 이룬다.

 밥 페이즐리 감독

밥 페이즐리 감독 ⓒ 리버풀 FC 공식 페이스북


기세를 몰아 리버풀은 다음 시즌 벨기에 강호 클럽 브뤼헤마저 꺾고 유러피언컵 2연패라는 기염을 토한다. 특히 유러피언컵 2연패를 거둔 1977-1978시즌 리버풀은 리그서도 우승을 거뒀는데, 총 42경기에서 16골만 실점해 철벽 수비를 과시했다. 클럽 레전드 골키퍼 레이 클레멘스를 필두로 앨런 한센- 그레엄 수네스 센터백 콤비는 당시로선 넘기 힘든 '통곡의 벽'이었다.

수비에서 잉글랜드 국적 선수들이 맹활약했다면 공격은 스코틀랜드 출신 케니 달글리시가 책임졌다. 1977년까지 활약했던 케빈 키건의 대체자로 선택된 달글리시는 1977년 입단해 1990년까지 리버풀에서 뛰었다. 달글리시는 총 515경기 출전 172골을 넣으며 가장 날카로운 창으로 활약했다.

공·수 양면에서 완벽함을 자랑하던 리버풀은 1981년, 세 번째 유러피언컵 우승을 달성한다. 당시 리버풀은 결승전서 에밀리오 부트라게뇨를 필두로 한 독수리 군단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1-0 신승을 거두며 유럽 정상을 차지했다. 1983년 물러나기 까지 페이즐리 감독은 총 9시즌 동안 리그 우승 6회, 유러피언컵 우승 3회, 리그컵 우승 3회, FA 채리티 싈드 우승 5회 등을 일궈내며 리버풀을 명실상부 최고의 명문 클럽으로 완성했다. 페이즐리 감독과 함께 전 유럽을 붉은색으로 물들이는데 성공한 리버풀이었다.

재기에 대한 믿음

1982-1983시즌을 끝으로 연로한 페이즐리 감독은 명예롭게 리버풀을 떠난다. 페이즐리가 떠난 이후 리버풀은 조 페이건 감독 지휘 하에 1984년 4번째 유러피언컵 우승을 거머쥐지만, 다음 시즌 헤이젤에서 벌어진 유벤투스와의 유러피언컵 결승전서 끔찍한 안전사고를 겪는다. 참사 이후 유럽축구연맹은 잉글랜드 클럽들에 5년 동안 유럽클럽대항전에 출전할 수 없는 중징계(리버풀은 3년 추가)를 내렸다. 당연히 참사의 주범인 리버풀 역시 클럽대항전 출전이 불가능했고 유럽 축구의 흐름에 뒤처졌다.

케니 달글리시가 선수 겸 감독으로 팀을 추슬러 부활에 성공했지만 1989년, 힐스보로 참사(노팅엄 포레스트와의 FA컵 결승전 당시 일어난 안전 사고)를 겪으며 리버풀은 다시 주저앉는다. 이후 1992년 잉글랜드 풋볼리그가 프리미어리그로 개편된 이래 리버풀은 한 번도 리그 우승을 달성하지 못하며 강호로서의 입지를 잃었다.

길을 잃던 리버풀은 2005년, 라파엘 베니테즈 감독과 함께 5번째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달성하지만 여전히 리그 우승이 요원한 상황이다. 최근 들어 '게겐프레싱'으로 유명한 위르겐 클롭 감독 아래 매력적인 축구를 펼치고 있으나 들쭉날쭉한 경기력 때문에 팬들의 애간장을 녹이고 있다.

 리버풀 FC

리버풀 FC ⓒ 리버풀 FC 공식 페이스북


어느덧 붉은 제국이 리그 우승을 한 지도 26년이 지났다. 사반세기가 넘는 동안 리그 권좌를 되찾지 못한 만큼 팬들의 섭섭한 마음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콥은 다시 한번 팀의 우승을 위해 목청껏 응원가를 부른다. 철저한 충성심으로 무장한 팬들이 지키고 있는 클럽. 리버풀은 그런 클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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