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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림시금치와 수란
 크림시금치와 수란
ⓒ 강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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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나 소설, 만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음식들. 군침이 절로 나오는 이야기 속 음식 레시피와 그에 얽힌 잡담을 전한다. 한 술 뜨는 순간 장면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음식 이야기를 '씨네밥상'을 통해 풀어낼 예정이다. - 기자 말

195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한 두 여성간의 운명적인 러브스토리, 토드 헤인즈의 영화 <캐롤>은 겉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진 이의 감정을 섬세하게 잡아내며 많은 이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동명의 원작 소설(처음 출간한 1952년 당시에는 작가의 필명으로 <소금의 값(The Price of Salt)>이란 제목으로 출간했다가 1990년도에 본명을 내걸고 <캐롤>로 재출간했다)을 영화화한 <캐롤>이 개봉 1년 뒤에도 마니아층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흔치 않은 레즈비언 퀴어 영화라는 것 외에도 사랑의 떨림을 포착하기 위해 장면 장면 철저하게 연출한 섬세함에 있다.

사진작가라는 꿈을 가진 채 용돈을 벌기 위해 백화점 점원으로 취직한 테레즈 벨리벳(루니 마라 분)은 딸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기 위해 손님으로 온 캐롤 에어드(케이트 블란쳇 분)를 본 순간 성숙하고 강렬한 연상미에 빠져든다.

한눈에 보기에도 상류사회의 일원으로 보이는 우아함과 살짝 신경질적이지만 사람을 잡아 끄는 카리스마, 한 번도 여자를 사랑해본 적이 없는 테레즈는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백화점에서 한 번 봤을 뿐인 캐롤 생각에 온통 사로잡힌다. 결국 캐롤이 두고 간 장갑을 찾아준다는 핑계로 연락을 하고 캐롤이 답례로 식사를 제안하며 둘의 첫 데이트 약속이 성사된다. 다이어리에 식사약속을 표시하며 '캐롤 에어드'를 나직이 불러보는 테레즈의 벅찬 두근거림은 보는 이에게도 사랑의 시작을 회상케한다.

나이 차가 꽤 나는 미모의 연상,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리는 여성과의 첫 식사. 우아한 취향이 뿜어져 나온 상대가 정한 레스토랑에서 내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 먹다가 뭘 흘리지나 않을지, 좋으면서 동시에 어색함으로 가득해 홀린 듯 흘러가는 시간들. 이 중요한 첫 식사 장면에서 캐롤이 선택하는 음식은 그녀의 캐릭터를 표현하는 탁월한 장치다.

 영화 <캐롤>에서 캐롤과 테레즈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 식사를 같이 한다.
 영화 <캐롤>에서 캐롤과 테레즈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 식사를 같이 한다.
ⓒ CGV아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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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란이 올라간 크림시금치와 드라이 마티니".

자연스럽게 주문하는 캐롤과 달리 테레즈는 쭈뼛대며 자신도 같은 메뉴를 달라고 할 뿐. 이탈리아의 클래식한 사이드 메뉴인 '시금치 플로랑탱'에서 온 크림시금치와 수란(Creamed spinach with poched eggs)은 지나치게 사치스럽지도, 너무 뻔하지도 않지만 확고하게 자리 잡은 캐롤의 취향을 드러낸다. 거기에 드라이 마티니라니! 클래식한 아름다움에 언뜻 강인한 듯 보이지만 섬세한 캐롤의 캐릭터와 부합한다. "You are what you eat(당신이 먹는 음식이 바로 당신이다)"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지 않나.

만약 캐롤이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처럼 에그베네딕트에 코스모폴리탄을 주문했다면 그 캐릭터의 매력이 꽤나 반감되었을 것이다. 원작 소설에서도 같은 메뉴를 주문하지만 감독 토드 헤인즈 또한 영화로 옮길 때 캐롤의 취향을 보여주고 둘의 관계가 진전되는 매우 중요한 순간으로 염두한 채 연출했다고 한다.

이제 막 시작되려고 하는 둘의 첫 식사, 그 어색한 정적은 오히려 보는 이들을 더 긴장케, 두근거리게 만든다. 테레즈가 캐롤을 따라 시금치를 먹다가 입 밖으로 살짝 튀어나와 급히 다시 삼키는 장면은 사랑에 빠진 이의 어색한 모습 그 자체다. 물론 보는 순간 열렬한 감정에 빠져버린 테레즈와 달리 아직 상대를 호기심 정도로 바라보는 연상의 캐롤은 상대적으로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심지어 그녀는 순간순간 다른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자와 처음 만나보는 테레즈의 긴장, 열정과 달리 캐롤은 (아마도) 여자와의 연애에도 익숙했을 것이다.

캐롤은 그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녀는 사실 '이 아이는 뭘까' 정도의 호기심, 자기의 마음에 대한 의구심으로 집중하지 못했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이 아이는 뭘까, 난 도대체 뭘하고 있는 걸까'의 생각은 어느 순간 그 유명한 대사 "What a strange girl you are" "flung out of space"로 나아간다. "갑자기 우주에서 내 앞으로 떨어진 듯한 너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야"라는 한 사람을 향한 감탄사. 그냥 사람이었을 뿐인 누군가가 갑자기 '특별한 너'로 보이기 시작하는 때. 당시에는 중요한 순간이라고 인지하지 못하지만 지나고 나면 사랑의 시작점이었던 그 순간이 식사를 통해 이뤄진다.

인생을 통째로 뒤바꾸고 흔들어버리는 순간은 사실 아주 사소하게 찾아오며, 그 순간엔 그것이 인생을 바꿀 것이라고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모두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며 그 후에 관계가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비록 아직 서로의 캐롤과 테레즈를 만나지 못했어도, 사랑에 실패했더라도, 혹은 지금 막 시작점에 있는 이라면 더더욱, 이 떨리는 순간을 함께한 크림 시금치를 만들어 먹으며 사랑을 믿어보자.

[씨네밥상 레시피] 크림시금치&수란(2~4인분 기준)

우리에게 나물로 익숙한 시금치, 양식에서도 샐러드나 볶음, 파이 등 다양한 요리에 사용한다. 양식에서 주로 사용하는 것은 베이비시금치, 일반적인 한국 시금치에 비해 크기는 작지만 맛과 향은 달고 부드러워 생으로 즐겨도 좋다. 국내에선 쉽게 구할 수 없으니 일반 시금치 대신 크기가 작은 겨울시금치를 이용하면 좋다.

바로 지금이 제철인 겨울 시금치는 남해지역에서 재배되는 노지 시금치로 포항초, 섬초, 남해초, 단초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연하면서도 맛은 달아 양식 요리에 두루 사용할 수 있으니 겨울부터 초봄사이가 크림시금치를 만들 절호의 기회. 프로슈토를 오븐에 바싹 구워 토핑으로 올리면 짭짤하고 바삭한 맛이 악센트가 되지만 없다면 베이컨으로 대신하거나 생략해도 된다. 넛맥, 화이트와인도 없다면 생략 가능하다.

비교적 쉬운 요리지만 초보자라면 수란 만들기가 관건, 누군가를 초대하기 전에, 특히 유혹할 상대에게 대접할 요량이면 미리 충분히 연습할 것을 권한다. 제이미 올리버가 소개하는 수란만드는 3가지 방법을 참고하는 것도 좋다(유튜브 영상 보기). 크림시금치와 수란은 그대로 먹어도 좋고 살짝 토스트한 식사빵을 곁들여도 좋다. 다소 느끼할 수 있는데 여기에 영화에서처럼 드라이마티니를 곁들이면 혀가 바짝 조여지며 꽤나 훌륭한 밸런스를 이룬다. 드라이한 화이트 와인이나 기포가 바삭한 프로세코 등도 괜찮다.

재료 : 달걀 4개, 겨울시금치(포항초·섬초 등) 150g(1단 분량), 프로슈토 4장(혹은 베이컨 2장), 양파 작은 것 1개, 마늘 4쪽, 생크림·파르마산치즈 ⅔컵씩, 화이트와인 1큰술, 넛맥가루 ¼작은술, 올리브유 적당량, 식초·소금·후춧가루 약간씩

1. 시금치는 억센 줄기가 있다면 제거하고 너무 크기가 큰 것은 반으로 뜯어 깨끗이 손질한다. 양파는 잘게 다지고 마늘도 칼등으로 눌러 빻은 뒤 잘게 다진다.
2. 종이호일 등에 프로슈토를 펴 올리고 올리브유를 살짝 뿌려 180℃로 예열한 오븐에서 5분 가량, 바삭해질 때까지 굽는다. 베이컨을 사용한다면 달군 팬에 베이컨을 올려 갈색이 돌고 바삭해질 때까지 바짝 굽는다.
3. 달군 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다진 양파를 넣어 잘 저어가며 중간불에서 5분 가량 볶는다.   
4. 양파가 투명해지면 다진 마늘을 넣고 향을 내가며 볶다가 시금치와 넛맥가루를 넣어 숨이 죽을 때까지 볶는다. 화이트와인을 넣어 센불에서 한 번 더 볶은 뒤 생크림을 붓는다.
5. 약한 불로 줄이고 시금치가 부드러워질 때까지 5분 가량 뭉근히 끓인다. 중간에 파르마산 치즈 간 것을 넣어 녹아들도록 고루 섞는다. 완전히 부드럽게 익고 크림이 소스 농도를 띄면 불을 끄고 소금, 후춧가루로 모자란 간을 맞춘다.
6. 냄비에 물을 붓고 끓이다 소금과 식초 약간을 넣는다. 달걀을 그릇에 깨뜨려 담았다가 물이 끓어오르면 중간불로 줄이고 조심스럽게 흘려넣듯 달걀을 넣는다. 이때 젓가락 등으로 달걀 주위의 물을 둥그렇게, 살짝 휘저으면 물이 빙글빙글 돌며 달걀이 냄비 바닥에 붙지 않고 적당한 타원형으로 모양이 잡힌다. 너무 세게 휘젓지 않게 주의해야 한다. 2분~2분 30초 가량, 흰자는 익고 노른자는 반숙 상태가 되었을 때 국자로 조심스럽게 퍼올리고 물기는 제거한다.
7. 그릇에 크림시금치를 담고 수란을 올린다. 구운 프로슈토나 베이컨을 적당히 뜯어 보기 좋게 흩뿌려낸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강윤희는 음식잡지에서 기자로 일하다 회사를 나와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는 푸드라이터. 음식에 관련된 콘텐츠라면 에세이부터 영화, 레서피 북까지 모든 것을 즐긴다. 영화를 보다가 호기심을 잡아끄는 음식이 나오면 바로 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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