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천(贖良, 천인이 본래의 신분을 벗어나 양인의 신분을 취득하는 것)의 꿈이 코 앞까지 다가왔지만, 마치 신기루처럼 허망하게도 사라져버렸다. 사람답게 살아보고 싶었다. 길동이는 손가락 빨렸어도 도련님한테는 젖을 물렸던 아내 금옥(신은정)에게 "이제 양반들이 했던 시늉은 다 할 것"이라 다짐도 했다. 첫째인 길현(이도현)이 마음껏 글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다. 괴력의 힘을 지닌 '아기장수' 길동(이로운)이 제 힘을 마음껏 쓰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거듭 다짐했다. "면천해야 해. 면천 못하면 그 놈은 노비 팔자로 자기 명까지 못 살아" 아비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아모개(김상중)의 꿈은 실패했다. 면천은 수포로 돌아갔다. 자신이 축적한 재산을 탐낸 조참봉(손종학)과 그의 부인(서이숙)의 음모 때문이었다. 그들은 '법률'을 통해 아모개를 억압하기 시작한다. '노비가 주인을 때렸을 경우에는 모두 참형에 처한다. 친척이나 외조부를 때린 자는 교살에 처한다'는 '대명률(大明律)'은 아주 '좋은' 구실이다. 목숨 대신 재산을 받아내겠다는 심산이다.

 MBC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의 한 장면

MBC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의 한 장면 ⓒ MBC


탐욕에 눈이 먼 조참봉은 자신의 시숙을 사주해 금옥을 성추행한다. 금옥은 "(면천을 하기 전까지는) 무슨 일이든지 만들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던 아모개의 말을 떠올리며 끝내 참아 넘기려 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우연찮게 이 장면을 목격한 길동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이기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자신의 괴력을 사용해 조참봉의 시숙에게 상해를 입힌다. 결국 조참봉의 계략은 성공했고, 아모개는 면천을 위해 모아뒀던 재산을 몽땅 빼앗기도 만다.

잃은 재산이야 다시 모으면 그뿐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만큼 수완이 좋았던 아모개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셋째를 임신하고 있던 금옥이 출산 후 그만 죽고 만다. 성추행을 당하던 때 부상을 입었던 게 화근이었다. 이제는 미래가 없다. 신분제 사회, 그 공고했던 체제를 자신의 능력으로 뚫어보기로 작정했던 한 사내는 분노한다. 그리고 드디어 낫을 빼어 들고, 자신의 조참봉을 찾아간다. 그리고 "아모개? 이름을 그 따위로 지어 놓으니 아무렇게나 살면 되는 줄 알았냐"며 자신의 주인을 베어버린다.

아모개의 각성 "전에는 왜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

 MBC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의 한 장면

MBC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의 한 장면 ⓒ MBC


"아니여, 아니여. 나리 잘못이 아니여. 다 내 탓이여. 나리가 무슨 잘못이 있겄어. 온통 노비들은 인간이 아니라고들 하는디, 나리라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었겄어. 어째서 그 때는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 인간 같지 않은 것들, 싹 다 죽여뿔고, 새로 태어날 생각을 어째서 못했을까."

아모개는 '전에는 왜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라며 자책한다. 사실 방법은 간단했다. 끊어버리면 그뿐이었다. 벗어던지면 그뿐이 아니던가. 그의 말처럼 '인간 같지 않은 것들은 싹다 죽여버리고, 새로 태어날 생각'을 왜 하지 못했던 것일까. 정답은 다시 그의 말 속에 들어있다. '온통 노비들은 인간이 아니라고' 하는 공고한 체제, 그 시스템을 '선'으로 받들고 순응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었다. 아모개는 벼랑 끝에 몰려서야 '일상의 현실'을 벗어나기로 결심한다. 자신을 가두고 있던 세상으로부터의 변혁을 꾀한다. 이를테면 '혁명' 말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은 얼마나 다를까. 지난 18대 대선에서 당시 박근혜 후보는 저소득층으로부터 60.5%의 높은 지지를 받았고, 2016년 치러진 20대 총선에서 보수정당인 새누리당은 월수입 200만원 이하 저소득층에서 무려 60%에 가까운 높은 지지를 받았다. 물론 이와 같은 '빈곤 보수화' 현상은 대한민국에만 국한된 흐름은 아니다. 보수의 집권 전략을 파헤진 토마스 프랭크의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할까>는 보수 우파가 '민중의 착란현상'을 조장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MBC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

MBC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 ⓒ MBC


촛불집회에도 불구하고 뻔뻔한 이들... 우리는 지나치게 낭만적이었나

이러한 현실은 답답하기 짝이 없다. 우리는 왜 아모개처럼 '낫'을 들지 못하는가. 과격한 듯 들리지만, 인간 같지 않은 것들 싹다 죽여버리고 새로 태어날 생각을 어째서 하지 못하는가. 아모개처럼 다 잃지 않았기 때문일까. 궁지에 덜 몰렸기 때문일까. 부패하고 나태한 권력에 경종을 울렸던, 그리하여 대통령을 탄핵시키고야 말았던 '촛불 집회'는 '평화'라는 이름으로 아름답게 조명됐지만, 뻔뻔한 저들의 행태와 지금의 '답보 상태'를 보고 있노라면 지나치게 낭만적이었던 건 아니었는지 갸우뚱하게 된다.

슬라보예 지젝은 자신의 저서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에서 "우리는 '어떻게 이 일상의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가?'라고 묻지 말고 차라리 '이 일상의 현실이 과연 그토록 확고하게 실존하는가?'라고 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질문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를 가두고 있는 '일상의 현실'은 우리의 '인식'처럼 그토록 확고하게 실존하는 것일까? 한평생 고생만 하다 세상을 떠난 아내를 땅에 묻으며 자신의 뺨을 모질게 치며 자책했던 아모개는 그 질문을 했고, 그로부터 답을 찾아냈던 것 같다. 바로 '낫을 드는 것' 말이다.

지젝은 다시 한마디를 덧붙인다. "'순진한' 사람은 우리가 일상의 현실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일상의 현실을 이미 주어진 것으로, 존재론적으로 완벽한 자족적 전체로 여기는 사람이야말로 '순진한' 사람"이라고 말이다. 과거 수많은 아모개들이 했던 고민과 질문들, 역사 속의 수많은 홍길동들이 이어받았던 그 고민과 질문들, 이제 우리에게 다시 돌아왔다. MBC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은 우리에게 묻고 있다. 당신은 순진한 사람인가?

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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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길을 가라. 사람들이 떠들도록 내버려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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