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히어로>(2014)를 제외하고, <겨울왕국>(2013) 이후 월트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는 <주토피아>(2016)와 <모이나>(2016)까지 연이어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공주 왕국' 디즈니라는 오명을 어느 정도 씻게 해준 <겨울왕국>의 기록적인 성공에 고무된 탓일까. 딱히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타인을 배려하라 / 건강하게 생활하라 / 외모로 남을 판단하지 말라 / 정직하라 / 신뢰를 주는 사람이 되라 / 자기 자신을 믿어라 / 잘못된 점을 바로 잡아라 / 최선을 다하라 / 충실하라 / 절대 포기하지 말라"

지난해 10월, 디즈니가 아동과 학부모를 위해 내놓은 '새로운 공주상'의 10가지 덕목이 화제가 됐다. '외모'보다 '내면'을 중시하라는 메시지를 바탕으로, 인성과 배려, 긍정성 등을 21세기 새로운 공주의 열 가지 덕목으로 꼽은 것이다. 꽤나 신선하다는 반응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디즈니의 변화상, <모아나>가 입증하다

 영화 <모아나>의 스틸컷.

영화 <모아나>의 스틸컷. ⓒ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복기해 보자. 20세기를 넘어 21세기까지도 기세등등했던 디즈니식 공주들의 자태들을. 금발이 대다수고 백인인데다 눈 크고 메마르고 젊고 어린 여자로 표상됐던, 이 동아시아의 아동들에게 '바비 인형'과 함께 서양 여성의 이미지를 일방향으로 심어줬던, 그리하여 보수적이며 반여성주의적인 이데올로기를 전파한다고 비판을 받아 왔던 디즈니 애니메이션 속 그 공주들 말이다.

<모아나>는 디즈니가 작심하고 이 '10계명'을 그대로 실천하기 위해 만든 작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감탄할 만한 작품이다. 더욱이 모아나는 그 어떤 디즈니 애니메이션 속 여성 주인공과 비교해도 독립적이고 주체적이며 열성적인 동시에 진취적이다.

게다가 디즈니의 전작 <주토피아> 만큼 유머러스한데다 선은 더 굵다. 또 <주토피아>가 아기자기한 그림체에 반차별주의 메시지를 탑재한 '느와르풍 버디 수사극'이라면, <모아나>는 전통적인 모험 어드벤처물을 여성 주인공으로 치환시킨 극히 드문 사례다.

흥행도 준수하다. 연거푸 전 세계에서 10억 달러를 돌파한 <겨울왕국>과 <주토피아>의 기록적인 성적과 비교하면 언감생심이지만, 5억 3천 달러(1월 29일 기준)를 넘기며 앞으로 더 '밝은 미래'를 예고하고 있다. 3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기도 했던 북미 흥행 수익도 2억 4천만 달러를 넘어섰다.

살짝 <주토피아>에 밀리는 느낌이지만, 올해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 작품상 후보에도 이름을 올렸다. 국내 흥행은 살짝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 <모이나>는 31일까지 200만 돌파를 목전에 뒀지만, 작년 2월 개봉한 <주토피아>가 3월까지 흥행 역주행을 선보이며 470만 관객을 동원했던 것에 비춰보면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그만큼, <모아나>가 품은 가치관에 비해선 아쉬운 성적이란 얘기다. 작품을 살펴보면 그러한 심증이 확증이 돼줄 것이다.

흔치 않은 여성 캐릭터, 여성 애니메이션 <모아나>

 영화 <모아나>의 스틸컷.

영화 <모아나>의 스틸컷. ⓒ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모아나는 궁금하다. 왜 족장인 아버지가 모투누이 섬 밖 넓은 바다로 나가지를 못하게 하는지. 섬 안에서도 충분히 풍족한 삶이라고는 하지만 두고두고 아쉽다. 궁금증은 '현자'에 가까운 할머니가 풀어준다. 어릴 적부터 들려준 마우이의 전설이 그 실마리였다. 반신반인 마우이가 생명의 신인 테피티의 심장을 훔쳤고, 테피티의 변화 이후 섬과 섬을 둘러싼 세계는 저주에 걸렸다.

항해를 즐겼던 모투누이 사람들이 고립을 선택한 것도 이 때문이다. 모험을 포기한 모아나가 차기 족장 수업을 착실히 수행하던 어느 날, 섬 전체가 저주에 걸린 듯 말라가기 시작한다. 방법이 없다. 그때 할머니가 다시 모아나를 일깨운다. 테피티에게 그 심장을 되돌려줘야만 세계도, 섬도 다시금 저주를 풀고 활력을 찾을 수 있다고. 저 넓은 바다로 떠나라고. 그래야만 한다고. 

모아나가 거친 파도를 헤치고 만나게 되는 이가 바로 마우이다. 반신반인인 만큼 히어로와 안티 히어로의 경계에 선 마우이는 모아나를 무시하고 놀리고 골탕을 먹이지만, 어느 순간 '동료'로 거듭난다. 엇비슷한 목표 때문이다. 모아나는 테피티를 찾아 섬을 살려야 하고, 마우이는 숙적인 괴물 데카를 무찔러야 한다. 그러기 위해 모아나는 마우이의 힘을 빌려야 한다. 

론 클레멘츠, 존 머스커라는 공동 연출자의 이름을 보고 반가워할 관객들이 적지 않았으리라. 맞다. 두 사람은 1990년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전성기를 이끈 <인어공주>와 <알라딘>을 연출한 바 있다.

<알라딘>의 인기 비결이었던 요정 '지니'를 기억하는가. 로빈 윌리엄스가 목소리를 연기하며 절정의 인기를 누렸던 이 지니는 드웨이 존슨이 연기한 마우이로 거듭났다. 변신술에 능하고, 근육질이면서 귀여움과 유머를 겸비한 이 마우이는 <모아나>의 모험을 좌지우지하는 주요 캐릭터다.

사실 과거 <알라딘>(1992) 속 자스민 공주는 알라딘과 지니의 모험에 동참한 전형적인 '공주' 캐릭터에 머무른 것이 사실이다. <인어공주>(1989)의 에리얼도 당시엔 꽤나 당찬 캐릭터였다. 하지만 모아나는 '진화'했다. 리더로서의 운명을 기꺼이 짊어 질 뿐 아니라 마우이에게도 결코 의존하는 법이 없다. 도움을 청해야 할 때도 동등하게 자신의 능력과 노력을 발휘한다.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며 파트너쉽까지 성취하는 애니메이션 속 여성 캐릭터, 흔치 않다. 디즈니의 '새로운 공주상'의 10가지 덕목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그리하여 디즈니의 전작 <주토피아>의 주디가 직업인으로서의 선택 이후 벌어지는 차별과 인종 문제에 천착한다면 <모아나>는 좀 더 거시적인 관점을 제시하려는 야심찬 시도에 가깝다. 여성성의 회복과 그로 인한 세계의 전환을 도모하고 있다는 점에 그러하다.

아쉬운 흥행, 이게 다 트럼프 탓?

 영화 <모아나>의 한 장면.

영화 <모아나>의 한 장면. ⓒ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모아나>는 이렇게 <인어공주>와 <알라딘>의 두 콤비가 30여 년 뒤 다시 내놓은 스스로의 '성장담'이라 할 만 하다 (<알라딘> 이후 작품으로는 <헤라클레스>와 <보물섬>, <공주와 개구리>를 연출했다). 둘 모두 1953년생으로 60대로 접어든 동갑내기 콤비 감독이 이제는 지긋한 '멘토'의 위치에서 새로운 세대와 새로운 여성상을 그리고 응원하는 것이다. 모아나의 할머니가 좌충우돌하는 '멘티' 모아나에게 전설을 말하고 강조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그래서 더 의미심장하다. 

모아나는 '어디 하나 부족함이 없는 캐릭터'가 아니다. 그러나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바탕으로 파트너십을 쟁취하고 영화 내내 성장해나간다. 여성 멘토와의 교감을 통해 여성성을 품은 신의 부활를 이끌어 내고, 섬과 세계를 다시 회복시킨다. 할리우드 여성 평론가들이 올해의 '여성 애니메이션'으로 선정할 만 한 서사와 캐릭터라 할 만 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영화 외적으로 아쉬운 것 하나. 여전히 남아있는 인종적 편견이 <모아나>의 흥행에 작동하지 않았나 하는 우려 아니 노파심이 든다. "태평양 전역에 전해져 내려오는 다양한 전설과 이야기에 영향을 받았다"는 존 머스커 감독의 말마따나 <모아나>의 주인공들은 폴리네시아인들이다. 동물들이 등장하는 우화를 제외하고, 기존 디즈니 애니메이션 주인공들의 피부색이 사뭇 다르다는 말이다. 하물며 <겨울왕국>을 떠올려 보라.

울퉁불풍한 마우이의 외모(와 피부)에 불평을 드러내는 관객들이 있었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겨울왕국>이나 <주토피아>와 비교해 반토막에 가까운 <모아나>의 흥행 성적이 이러한 외견에 영향을 받은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살짝 고개를 든다. 어쩌면 이게 다 '트럼프' 시대가 낳은 '패러노이드' 탓이다. 트럼프의 '반이민 정책'이 미국을 넘어 전 세계를 혼란에 빠뜨린 지금, 이러한 의심이 그저 기우이기를 바랄 뿐이다. 

모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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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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