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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 당선 이후에도 대통령궁이 아닌 이 농장에서 87년식 낡은 폭스바겐 자동차를 직접 몰고 출퇴근 했으며, 주말에는 마을 사람들과 격의 없이 어울렸습니다.
지금부터 거의 20년 전에 신영복 선생님의 <더불어 숲>(신영복의 세계여행)을 처음 접했습니다.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문명과 사람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긴 따뜻한 글과 그림 엽서. 20대 초반의 대학생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갖는데 큰 영향을 받았음은 물론이며 그 감동으로 막연하게 세계일주에 대한 꿈도 품게 됐습니다. 인생의 반환점에 이르렀다고 생각되는 2017년, 배낭여행자가 되어 그 꿈을 실행에 옮깁니다. 당신이 보낸 첫 번째 엽서에 적혀있던 '언젠가 나는 당신의 답장을 읽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는 문구에 무모한 용기를 얻어 여행지에서 편지를 띄웁니다. 이 여행기는 당신 그리고 또 다른 수많은 당신들과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 기자 말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에서 쾌속페리로 1시간, 일반페리로 3시간이면 우루과이 콜로이나에 닿을 수 있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에서 쾌속페리로 1시간, 일반페리로 3시간이면 우루과이 콜로이나에 닿을 수 있습니다.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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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는 우리에게 먼 곳입니다. 한국에서 출발한다면 직항노선은 없고, 한두 곳은 경유해서 꼬박 한나절 이상 시간이 소요되는 거리입니다. 남미는 심리적으로는 더 먼 곳입니다.  냉전시대는 물론이요 냉전이 해체된 그 이후 시대에도 우리에게는 제1도 제2도 아닌 언제나 제3의 세계였습니다.

우루과이는 더욱 더 먼 나라였습니다. 우스개 소리로 지금 서 있는 땅을 삽으로 계속 파서 들어가면 지구 반대편 어느 땅으로 만나게 되는데, 바로 그곳이 우루과이라고 했습니다.  세계여행이 보편화 되면서부터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여행지도 조금씩 변해갑니다. 요즘은 남미여행에 대한 관심과 수요가 부쩍 늘어나는 모양새입니다. 

우유니 소금사막처럼 빼어난 자연경관을 가진 볼리비아, 마추픽추처럼 역사적 가치를 지닌 페루, 유명 볼거리와 먹거리 등 다양한 여행테마를 갖고 있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등이 남미 여행리스트의 우선 순위를 차지하기 마련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루과이는 상대적으로 주목 받지 못하는 나라입니다.

내게도 그랬습니다. 월드컵 초창기에는 우승컵을 들어올렸을 만큼 축구를 잘하는 나라, 예전에 많이 듣던 시사경제용어 '우루과이 라운드'와 사연이 있는 나라 정도가 내가 갖고 있던 정보였습니다. 특별한 매력과 동경이 없던 그 곳을 방문해봐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된 이유는 순전히 사람 때문이었습니다. 몇 년 전 우연히 SNS상에 떠돌던 한 정치인의 연설문, 그 주인공은 바로 우루과이 전(前) 대통령 호세 무히카였습니다.



콜로니아 델 사크라멘토 역사지구의 한적한 도로
 콜로니아 델 사크라멘토 역사지구의 한적한 도로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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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과이는 우리와 정반대편에 위치하고 있다는 지리적 상반성과는 달리, 우리나라와 여러 모로 비슷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현재 남미대륙의 모든 나라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에서 독립했다는 면에서 우리 역사와 단순하게 비교하는 게 다소 무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식민시대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세력 다툼의 접점이 되었고, 19세기 독립시대에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세력 다툼의 장이었다는 면에서 지정학적 요충지라는 이유로 바람 잘 날 없는 한반도, 만주 일대의 지정학적 상황과 매우 흡사합니다. 

내가 방문한 콜로니아는 그런 역사적 시련의 한복판이었던 장소입니다. 지금은 콜로니아 델 사크라멘토 역사지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고, 아름다운 해변을 갖고 있어 우루과이는 물론 인근 아르헨티나 사람들도 많이 찾는 유명 휴양도시입니다.

흔히 콜로니아를 '두 개의 유럽이 존재하는 곳'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곳이 유명해진 이유는 바로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번갈아 지배하면서 남긴 두 문화가 혼재된 독특함에 있습니다. 

외부의 지배세력은 계속 바뀌었지만 산천과 사람은 변함이 없으니, 같은 골목 안에도 한 집은 포르투갈 양식, 다른 집은 스페인 양식의 가옥이고 심지어는 한 집 안에 두 나라 건축양식이 섞여 있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역사적 시련이 역설적으로 콜로니아만의 매력을 만든 셈입니다.

정겨운 골목길의 풍경
 정겨운 골목길의 풍경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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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니아 곳곳에는 올드카를 소품으로 활용하여 도시의 정취를 더하고 있습니다.
 콜로니아 곳곳에는 올드카를 소품으로 활용하여 도시의 정취를 더하고 있습니다.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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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호세 무히카의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무히카 대통령의 연설은 현직 정치인의 언어라고는 믿기 힘든 지구 문명에 대한 근원적인 통찰과 문제제기를 하고 있습니다. 처음 이 연설을 접하고 들었던 생각은 '아마 작고 평온한 나라의 지도자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였습니다. 

그러나 관심을 갖고 우루과이의 굴곡진 근현대사와 무히카 개인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알아가면서 그러한 추측이 빗나가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젊은 시절 도시게릴라 활동을 하기도 했던 무히카는 우루과이 군부독재 시절 14년 간의 투옥생활을 겪고, 1985년 출소하여 하원의원, 상원의원, 농축수산부 장관 등을 거쳐 2010년 3월부터 2015년 2월까지 5년간 제40대 우루과이 대통령을 지냅니다.

당선시 지지율은 52%였는데 퇴임시 지지율이 65%에 이르렀다는 수치에서 보이듯, 그는 국민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얻은 성공한 대통령이었습니다. 무히카 재임 이전과 비교했을 때, 우루과이의 경제지표와 행복지수가 향상되었음은 물론입니다. 

무엇보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인권지도자로서의 면모는 더욱 돋보입니다. 쿠바 관타나모에 수감되어 있던 아랍인 범죄혐의자 6명을 인도받아 우루과이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고, 시리아 난민 120명을 인도적 차원에서 받아들였으며, 국제적으로는 콜롬비아 정부군과 무장반군 평화협상의 중재자 역할을 하는 등 2012년, 2013년 연속으로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호세 무히카 전 우루과이 대통령
 호세 무히카 전 우루과이 대통령
ⓒ 교육리포트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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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히카가 세상의 주목을 받았던 또 하나의 이유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으로 불릴 만큼 청렴하고 소탈한 그의 생활에 있었습니다. 그는 늘 직업란에 '농부'라고 적었는데, 정치활동을 하면서도 늘 작은 농장에서 손수 농사를 지었습니다. 

대통령 당선 이후에도 대통령궁이 아닌 이 농장에서 87년식 낡은 폭스바겐 자동차를 직접 몰고 출퇴근 했으며, 주말에는 마을 사람들과 격의 없이 어울렸습니다. 대통령 재임시 받았던 월급의 87%를 자선단체와 NGO에 기부하며, 매해 장애인, 노숙자, 소년소녀가장 등 불우한 계층의 국민들을 대통령궁으로 초청하는 것을 잊지 않았던 인간적인 행보에 많은 이들이 찬사를 보냈습니다.

당신은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정치란 사회의 잠재적 역량을 최대한으로 조직해내고 키우는 일입니다. 권력의 창출 그 자체는 잠재적 역량의 계발과 무관하거나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돌이켜 보건 데, 우리의 지난 10년은 사회의 잠재된 역량을 극대화하는데 실패한 시간입니다. 앞선 대통령은 국가를 수익 대상으로 삼는 비즈니스의 극치를 보여 주었고, 현직 대통령은 해방 이후 쌓여 온 한국사의 모든 적폐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국가의 안보가 아닌 정권의 안보가 중요했고, 국민의 행복보다는 특정세력의 이익을 도모했습니다. 다양한 목소리와 다른 견해는 '국민'과 '非국민'의 이분법적 통치로 갈라치기 했습니다. 무히카라는 탁월한 정치인을 가진 우루과이가 새삼 부럽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정치지도자에게 국민과 교감하고 소통하는 청렴은 중요한 덕목입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정치인 무히카에게 더욱 주목해서 바라봐야 할 지점은 '철학 있는 정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에서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전략과 감각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철학'이 빠진 '기획'과 '공학'으로는 결코 정치적인 성공을 거둘 수 없고 국민이 행복해질 수 없음이 자명합니다.

불과 1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영화 같은 일들이 벌어지며, 우리의 대통령 선거도 훨씬 앞당겨질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갑작스럽게 당겨진 정치일정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정치적인 기획과 공학이 난무할 것으로 짐작됩니다.

정치지도자 한 개인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갖는 것도 순진하고 위험한 생각이겠지만, 시대와 대중의 요구와 의식수준이 만들어 내는 것이 또한 정치지도자라는 측면에서 우리도 이제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선보이기에 부끄럽지 않은 '철학 있는 지도자'를 다시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시련으로 단련된 사람이 성숙하고 내면의 깊이를 갖게 되듯이, 산천 또한 시련으로 단련되면서 깊은 편안함과 아름다움을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우루과이 콜로니아는 그런 땅이었습니다. 사람이 산천을 닮아가는 것이라면, 콜로니아와 무히카는 그 느낌과 이미지가 참 잘 어울립니다. 

우루과이보다 더한 풍파와 시련을 겪어온 대한민국도 이제는 편안하게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 땅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그 땅에 어울리는 새로운 시대와 철학있는 지도자를 맞이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콜로니아는 황색 바다입니다. 해질녘 바다의 풍경은 우리나라의 서해를 연상시킵니다.
 콜로니아는 황색 바다입니다. 해질녘 바다의 풍경은 우리나라의 서해를 연상시킵니다.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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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2016년 말부터 약 1년간의 일정으로 세계일주 인문기행을 하고 있습니다.



태그:#우루과이, #콜로니아, #무히카, #대통령, #인권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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