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킹>은 흥행을 위해 기획된 영화이다. 평은 관객의 몫이다.

영화 <더 킹>은 흥행을 위해 기획된 영화이다. 평은 관객의 몫이다. ⓒ NEW


<더 킹>이 개봉한지 열흘이 지난 현재, 누적 관객이 300만이 넘었다. 캐스팅의 스케일과 영화에 집중되었던 언론의 관심을 고려했을 때 예상 가능 했던 결과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무언가 개운치 않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두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그럭저럭 지루하지 않게 앉아 있었던 것 같은데 이 영화가 주는 불안함과 씁쓸함의 원천은 무엇일까. 자국 영화가 흥행하는 것은 이유를 막론하고 뿌듯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불가결 하다고 생각되는) 이 영화에 대한 쓴 소리를 해 보려고 한다. 

<더 킹> 은 최근 한국영화계를 점령 하다시피 한, 이른바 '비리 장르'의 공식을 따른다. 박태수 (조인성 분) 는 목포 출신의, 나름 '개천에서 용 된' 케이스의 검사다. 권력을 갈구 하던 그가 한강식 (정우성 분) 이라는 잘나가는 부패 검사 라인을 타고 승승장구 하다가 추락하게 되지만, 결국엔 그가 가진 마지막 한 방으로 부패권력을 응징하고자 한다. 이 플롯 사이 사이를 정치권의 부패, 조직 폭력배의 배후, 미미하게 나마 정의를 추구 하고자 하는 나약한 부초들 등의 설정들이 메운다. 기본 스토리부터 서브 플롯 (sub-plot) 까지 최근 한국 영화들 에서 무수히 존재했고 반복되었던 설정이다.

최근 한국 영화에서 반복되는 설정들

물론 이러한 반복이나 장르적 차용 자체가 문제가 되진 않는다. '장르 (genre)' 라는 단어의 어원조차도 genus, 즉 '종' 이라는 단어에서 파생한 것이다. generic (틀에 박힌), gene (유전자) 등의 관련 단어를 보면 장르 영화로 분류 되거나 장르적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이미 그 '유사성'이 전제가 된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다만, <더 킹>이 아쉬운 것은 최근 개봉한 "정치 비리 영화" 들과 많은 장르적 언어들을 공유하고 있지만, <더 킹> 만의 변주가 미미 하다는데 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박태수가 양심선언을 하면서 기자회견을 하는 설정과 조폭과 검사의 우정, 여자들과 벌이는 '성대한' 파티 설정 등은 영화 <내부자들>과 공유된다. 사건의 재물/희생양 이자 주인공이 나레이션으로 시작/끝을 맺는 설정은 <아수라> 와, 궁지에 몰린 주인공 검사가 구루 (guru) 를 찾아가서 부활하게 되는 설정은 <마스터>에서 사용되었다.

물론 <더 킹> 은 블랙 코미디라는 프레임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앞 서 언급한 작품들과 차별성이 있다. 기존의 장르적 요소를 비틀어서 패러디 한다고 치면 이것도 꽤 흥미로운 프로젝트가 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블랙코미디의 톤이 이 작품에서 효과적으로 전달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일단 배우들의 연기 톤이 적절치 못하다. 블랙코미디의 가장 중추적인 요소는 역설적 '심각함' 에 있다. 코미디 영화처럼 대놓고 익살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심각한 주제에 대해서 심각한 연기를 하는데 연출 방식이나 설정에 있어서 웃음이 터지는 것이 블랙코미디 영화의 기본 공식이다. 이 점에 있어 <더 킹> 은 연기의 톤이 아쉽다. 가령, 박태수의 성장과정과 학창시절을 코믹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오프닝의 20-30 분 정도가 소요되는데 이 부분에서 깔리는 나레이터 (조인성) 의 톤은 '목표한 연기'를 연기하듯 자연스럽지 못하다. 박태수 라는 캐릭터의 능글맞은 성격처럼 내레이션의 연기가 천연덕스럽지 못해서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에피소드들이 공허하게 보인다. 

영화의 악역을 맡고 있는 정우성의 연기도 걸린다. 일반적으로 '선역' 이라는 명칭을 쓰지 않는 반면 '악역' 이라는 명칭이 더 널리 통용되는 이유는 그 만큼 서사에 있어 중추적이고 '전문성'을 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이 전문성은 '관습적임' 과 구별되어야 한다. 정우성의 한강식 검사는 아쉽게도 악역의 스테레오 타입에서 진화하지 못했다. <신세계>, <아수라> 의 황정민이 맡은 악역들, <범죄와의 전쟁> 에서 곽도원의 악역, <황해>에서의 김윤석 분의 악역 등이 찬사를 받은 이유는 이들이 단순히 '나쁜 놈' 을 연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이 맡은 악인들은 악의 '정도'가 아닌 악의 '결'로 기억된다.

<더 킹>과 비교해보면, 사실 한강식은 위의 악역들 보다 좀 덜 나쁜 놈이고, 블랙코미디 장르 맥락에서나 이 작품의 내용적인 맥락에서나 그렇게 극악무도한 인물로 연기할 필요가 없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우성의 연기는 시종일관 과하다. 결이 없고, 데시빌만 높은 악역이다. 적당히 간교하고 거만한 정도로 수위를 잡고 좀 더 입체적으로 접근했으면 좋았을 듯 하다. 

원론적 고민

 <더 킹>의 한 장면

<더 킹>의 한 장면 ⓒ NEW


배우들의 이야기로 글의 상당 부분을 소비했지만 가장 실망했던 부분은 전작 <관상>으로 부상한 한재림이라는 감독의 역량이다. 장르 영화의 관습성과 창작자의 도전이 매끄럽게 드러났던 <관상>에 비해, 이번 작품에서는 창작자의 치열한 고민이 보이지 않는다. 영화의 캐릭터도, 대사도, 설정도, 장면들도 어딘가에서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보아왔던 것들이다. 그 유사성을 넘어 도약하려는 창작자로서의 욕심보다 '비싸게 만들어진 영화의 강박'이 더 드러나는 영화가 됐다.

서론에 언급했던 불안함과 씁쓸함은 최근 한국 영화에서 '재미의 추구'라는 것이 창조성에서(creativity)에서는 점점 멀어지고 안전한 방법 위주, 즉, 흥행에서 패하지 않기 위한 짜깁기와 클리셰를 반복하는 방식으로 진화하는 것에서 비롯한다. 물론 이 대목에서 몇몇 메이저 제작사가 대기업과 함께 영화를 기획 제작하는 현재 한국영화산업의 구조와 제작 방식 등을 고려했을 때 창작자만의 고민은 아니라는 원론적 질문도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한다. 서로 자기 복제를 하다가 공멸할 것인지, 저항과 고뇌가 가능한 선을 올려 볼 것인지를. 1948년, 헐리우드가 황금기를 누리고 있을 때 미국 헌법은 제작사가 배급과 극장사업을 하는 것에서 손을 떼게 하는 충격적 판결을 내렸다 (파라마운트 법, Paramount Decree). 이 법의 제정 이후로, 헐리우드는 약간의 쇠퇴기를 거치긴 했지만 새로운 형식의 블록버스터들과 뉴웨이브 영화들의 상생으로 1970년대에 더 화려하게 부활했다.

내가 이미 관객 300만이 넘어 승승장구 하는 <더 킹>에 늘어놓은 '쓴 소리'는 한국영화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 키워왔던 불안과 염려에서 비롯된 소극적인, 그렇지만 꼭 해야 했던 조치다. 당장 영화산업이 구조적으로 바뀌는 것은 힘들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창작자의 고뇌와 투쟁이 멈춰서는 안 될 것이다. 청나라의 화가였던 리 샨 (Li Shan, 1686~1756) 은 "예술은 눈을 즐겁게 하는 선에서 멈추면 안 된다" 라는 명언을 남겼다. 지금 한국 영화에서 가장 필요한 명제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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