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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후불제 민주주의>(유시민, 돌베개, 2009)를 읽고 카페 주인인 저자와 기자가 만났다는 '가상의 상황'을 설정해 작성한 서평입니다. 그 외의 내용은 사실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 기자 말

"안녕하세요, 저번에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로 뵙고 또 뵙네요. 그때 입맛에 맞아서 또 왔어요!". 카페 주인장이자 지식소매상 유시민은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다. 어색한 웃음을 입에 머금고 애써 나를 반기는 척했다. 그는 한 손에 책을 쥐고 자리에 앉아있었다. 보고 있던 책을 놓고 싶지 않아 보인다. 하긴 요즘 장사가 잘되는 카페 주인이라 조금은 불친절해도 이해해야지. "<후불제 민주주의>(유시민, 돌베개, 2009) 하나요!" 주인의 안색이 바뀌었다. 보고 있던 책을 접고 나에게 다가왔다.

<후불제 민주주의>, 유시민, 돌베개, 2009
 <후불제 민주주의>, 유시민, 돌베개, 2009
ⓒ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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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이 헌법 제1조를 당위에서 존재로 바꿉니다

헌법 제1조는 이렇게 말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영화 <변호인>(2013)에서 배우 송강호가 말했고, 광화문 광장에서 방송인 김제동도 말했다. 지난해 말, 촛불 든 시민들은 헌법이 우리에게 건네는 첫 번째 말을 마음속에 품었다. "사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유시민에게 물었다.

"저는 대한민국이 '아직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리의 민주주의는 아직 할부금을 다 치르지 않은 채 타고 다니는 승용차와 비슷해요. 우리는 아직 민주주의를 온전히 우리 것으로 만드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다 치르지 않았죠. 헌법 제 1조는 '존재'를 서술한 것이 아니라 '당위'를 선언한 것일 뿐이에요.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공화국이 되어야 한다고 외치는 것이죠." (59쪽)

"많은 사람이 자기가 늘 주권을 행사한다고 착각하거나, 그와 같은 착각을 하도록 강요당하면서 살아요. 대한민국에는 국민에게서 나오지도 않았고 국민의 위임을 받지도 않았으면서, 국민의 행복을 해치고 국민 위에 군림하는 부당한 권력이 너무나 많고, 그 힘 또한 매우 강하죠." (60쪽)

헌법 제1조가 이미 '당위'가 아닌 '존재'였다면, 작년 말 우리가 촛불을 쥐고 모이지 않았을 거다. 매주 토요일 우리는 못다 한 '민주주의 할부금'을 내기 위해 광장에 모였다. 어른들은 얼른 할부금을 처리해 아이들이 제값 치른 민주공화국에서 살도록 하기 위해 나왔다. 아이들은 스스로 할부금을 갚기 위해 함께했다. "촛불이 모여 헌법 제1조를 당위에서 존재로 바꿔가고 있는 것 같아요." 내가 말했다.

"자기가 주권자임을 알고, 누구에게도 부당하게 나의 주권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지니고 있으며, 나의 주권을 제대로 행사하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 학습하고, 국민에게서 나오지 않은 부당한 권력이 나의 주권을 침해할 때 분연히 일어나 연대하고 투쟁할 줄 아는 개인이 민주공화국을 만들고 유지하는 힘의 원천이에요." (62쪽)

민주공화국은 터무니없는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자유

'우리는 스스로 어디까지 말해도 된다고 생각할까.' 나는 나름대로 우리의 표현할 수 있는 자유는 어디까지일까 실험해 본 적이 있다. 거창한 건 아니다. 2015년에 나는 학보사 기자였다. 짧은 칼럼을 하나 써야 했다. 새벽이었고, 이제 곧 마감해야 했다. 겨우 한 편을 썼다. 제목은 '김정은 만세'였다. 요약하자면 무슨 말이든 말할 자유는 있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아래는 그중 일부다.

"김정은 만세/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인정하는 데 있는데//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시인이 우겨 대니/나는 잠이 올 수 밖에//김정은 만세/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인정하는 데 있는데//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관리가 우겨 대니//나는 잠이 깰 수 밖에"

알다시피 김수영 시인의 시 '김일성 만세'를 살짝 고친 글이었다. 그날 학보사 기자들은 내부 회의를 했다. "이 정도도 못 실어요? 무슨 의미인지 아시잖아요.", "무슨 의미인지 알지, 근데 그건 너무 자극적이야." 나는 이 글이 지면에 실렸으면 했다. 신문으로 나와서도 '누구든, 무슨 말이든 말할 자유는 있지'하며 아무런 논란이 되지 않길 바랐다. 밤새 고민하는 우리가 설레발친 것이길, 2015년 대한민국이 이 정돈 되길 바랐다. 사실 내가 '김정은 만세'를 외칠 수 있을지, 없을지를 고민한다는 것 자체로 이미 대답은 끝났지만 말이다. "'김정은 만세' 실렸을 거 같아요?"

"민주공화국은 국민 대다수가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는 견해를 말할 자유까지도 너그럽게 관용하는 체제입니다. 마찬가지 이치에서 사회주의·공산주의를 선전하고 찬양하는 자유도, 그런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하거나 폭력을 동원해 관철하려고 하지 않는 한 모두 허용할 때 대한민국은 진짜 민주주의 사회가 돼요. 문제는 자기의 견해를 관철하기 위해 사적·공적 폭력을 동원하는 데 있는 것이지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는 것 그 자체가 아니죠." (110쪽)

'김정은 만세'를 지면에 싣지 말자는 판단은 선배의 강압이 아니었다. 그 결정에 나도 동의했다. 그럴 줄 알았지만, 그 날 나는 고민했다. 무엇보다, 어쩌면 기성 언론보다도 겁 없고 당찬 생각을 해야 하는 학보사에서도 할 수 없는 말이었구나. 우리가 스스로 이렇게 많이 위축됐구나. 이건 나의 문제일까, 사회의 문제일까.

"그런데 정말 재밌는 일이 일어났어요. 그 글이 빠진 신문이 발행되고 얼마 안 지나서, 옆 학교에서 김수영 시인의 '김일성 만세'가 대자보로 붙었더라구요. 누가 공식적으로 게시한건 아니구요, 몰래 붙인 걸로 알고 있어요. 여러 언론에서 그걸 기사화했고, 우리 학교 학생 게시판에서도 논란이 일었어요. 표현의 자유라고 해도, 북한을 옹호하는 발언을 할 수 있느냐? 라는 거죠. 시끌벅적했습니다."

<썰전>, JTBC, 2016.12.15
 <썰전>, JTBC, 2016.12.15
ⓒ 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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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선택을 무조건 찬미하는 지식인과 언론인, 정치인들을 경계합시다. 현대는 권력자의 시대가 아니라 대중의 시대에요. 권력을 비판하는 지식인은 많지만 대중을 비판하는 지식인은 드물어요. 그들은 국민의 냉정한 자기성찰을 방해해요. 현명한 국민들만이 아첨과 직언을 구별하고 직언하는 자에게 보상할 줄 알아요. 결국 권력의 도덕과 능력은 장기적으로 대중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해요." (167~168쪽)

민주주의 대한민국 만드는 길은 쉽지 않다. 매번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해야 하고 여차하면 촛불 들고 광장에 모여야 한다. 당신들이 주인이 아니라, 우리가 주인임을 그들이 까먹지 않도록 목 아프게 소리쳐야 한다. 민주주의적인 대표를 뽑을 게 아니라, 민주주의적인 국민이 돼야 한다. 민주주의가 아니면 그 자리에 있을 수 없도록 대한민국을 바꿔야 한다.

나는 정치인보다 지식소매상 유시민이 좋다. 정치인이라면 국민에게 쓴소리할 수 없을 거다. 표 떨어지니까. 지식소매상은 다르다. 쓴소리해도 된다. 나 같은 사람은 더 찾아갈 테니까.

덧붙이는 글 | 작가와 제가 만나 이야기 했다는 상황은 설정입니다. 그 외 모든 경험, 내용은 모두 사실입니다.



후불제 민주주의 - 유시민의 헌법 에세이

유시민 지음, 돌베개(2009)


태그:#유시민, #후불제 민주주의, #표현의자유, #민주주의, #학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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