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1.26 21:35최종 업데이트 17.06.07 11:56
나의 어린 친구들

꿈틀비행기 7호 로스킬데 초등학교 방문() ⓒ 유창재 기자


루이지애나 미술관 앞 바닷가 : 멀리 스웨덴 국경이 보인다 ⓒ 김정여


꿈틀 비행기 7호에는 참 괜찮은 어린 친구들이 있었다. 책임감이 강하고 똑 부러진, 한현이는 우리 조장으로 덴마크 현지인들의 인터뷰 취재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먼저 챙겼다. 그리고 재수를 끝내고 온 두현이, 두현이는 루이지애나 현대 미술관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 좀 더 알게 된 친구이다.

루이지애나 현대 미술관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 맨 처음 우리가 앉아있었던 자리는 13번째 칸이었다. 그 칸은 다른 차량들과는 달리 가운데가 비어있었고 의자가 두 줄로 서로 마주보게 설치되어 있어서 다들 그곳으로 갔다. 따라 들어간 나는 13번 도어의 유리문에 자전거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보고 '저건 뭐지?' 생각하다 다른 사람들과 사진 찍느라 잊어버렸다.


모두들 즐겁게 웃으며 사진을 찍는데 두현이가 "우리 다른 사람들 생각해서 좀 조용해야지 않을까요?"라고 말했다. 두현이는 공손히 걱정하듯 말을 했고 우리는 '아뿔싸 의식하지 못했구나' 생각하며 말을 아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전거를 타고 온 여자가 내 옆자리를 비켜달라고 하기에 우리 모두는 일반차량으로 옮겨와 앉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둘씩 앉아가게 되었는데 나는 두현이랑 앉게 되었다.

자전거 칸을 나타내는 로고 자전거 칸을 나타내는 로고 ⓒ 김명희


루이지애나 미술관으로 가는 열차 안 서로 마주보이는 열차 칸은 자전거용이다. ⓒ 안혜란


두현이는 전형적인 강남8학군에서 고교까지 보낸 학생이다. 고교 때는 의대를 꿈꾸다 재수했고 성적이 모자란 것 같아, 정시로 서울 공대를 지원했으나 안 될 것 같다고 한다. 그동안 공부한 게 아깝고 조금만 더 하면 될 듯해서 한 번 더 도전해볼까 고민하던 중에 꿈틀 비행기를 탔다고 했다.

열차는 설핏설핏 바다를 지나고 아름다운 작은 마을들을 건넜고 그러는 동안 우리는 수능 얘기며 진로 얘기를 두런두런 나누었다. 그런데, 덴마크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나는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자꾸 두현이가 생각나면서 어른으로서 책임을 다 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던 찰나, 7호 꿈틀 비행기가 뜨기 전에 한현이가 독후감에 쓴 구절이 내 눈을 잡아당겼다.

".. 현재 학생, 학부모, 교사라면 대한민국의 교육 시스템이 가혹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낄 것이다. 중학교 때 무엇이든 좋으니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라고 말씀하시는 선생님이 계셨다. 모두가 그 말이 옳다는 것을 느꼈지만 단 한명도 실천할 수가 없었다. 형편이 어려워서, 남들에게 무시당할까 두려워서, 무엇보다도 모험했다가 실패하면 구제받을 방도가 없으니까. 이런 망가진 구조에서 무작정 개인의 변화만을 요구하는 건 잔인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냥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이 글을 쓴다. 바뀌어야 할 사회구조는 내가 어찌할 수 없지만, 내 삶을 통하여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이다.

운명처럼 떠난 수학여행

서귀포 앞 바다 검은 현무암이 도드라진 주상절리가 무겁게 다가오는 서귀포 바다 ⓒ 김정여


1970년대 말, 제주도의 여고 시절, 수학여행은 '뭍'으로 왔다. 배를 타고 목포항에 도착한 후, 열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는데, 서울에서는 많은 코스가 관광버스로 이루어졌다. 운명의 장난일까? 피곤해서 자다 깨다 하다가 갑자기 눈에 띈 것이 이화여대 캠퍼스였다.

마침 그곳에서는 버스에서 내려 잠시 걸을 수 있었는데, 때는 오월이라 담쟁이 넝쿨이 우거진 고풍스런 캠퍼스 건물 앞 잔디밭에서는 삼삼오오 모여 앉은 대학생들이 눈부시게 청춘을 빛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자신감에 넘쳐 보였고 책을 읽거나 얘기하는 모습들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 이 학교야! 나는 이 학교에 올 거야." 첫 눈에 반한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싶게 꽂혀 버렸다. 드디어 나에게도 뭔가 공부할 목표가 생겼다. 그래서 내 나름으로는 열심히 공부를 했고 학력고사를 봤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인생에 대한 중요한 눈을 뜨는 청소년기에 '나는 누구이며, 내 인생에서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고민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특별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학생의 진로나 삶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다만 학교에서 공부를 좀 하면 자신의 정체성이 인정되는 듯 싶고 그렇지 않으면 주변인으로 빙빙 도는 것이 학교생활이다. 지금보다 여유가 많고 친구들과 소소한 추억이 많았음에도 삶에 대한 진지한 탐색이나 '나' 자신을 찾고자 애쓰는 일은 전적으로 개인 몫이다. 그것이 중요하다고 말해주는 사람조차 없다. 그렇게 삶이 흘러간다.

학력고사 성적이 발표되던 날, 선생님이 내미시는 성적표를 받아들었을 때, 나는 아직도 그 종이를 받아들었을 때의, 내 가슴에 스미던 허무한 감정을 기억한다.'내 인생을 저당 잡히며 공부를 하였건만, 학력고사 점수가 적힌 종이 한 장 달랑, 내가 이거 하나 받자고 그렇게 읽고 싶은 책도 놀고 싶은 것도 마다하고 공부를 했던가?'

점수표를 맞춰보니 얼추 이대 과학교육과는 노려 볼 만했다. 그런데 갑자기 큰 장애물이 나타났다. 어머니가 반대를 하시는 거다. 그동안 내가 공부하는 게 안쓰러워 아무 얘기를 안 했을 뿐, 사실 아버지께서는 의대를 가거나 아니면 사범대를 가라고 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제주에서 서울까지 학비며 생활비가 좀 비싼가? 따라서 여기서 사범대라 함은 바로 옆에 갈 수 있는 국립사대를 말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청천벽력같은 일이 내게 벌어졌다. 그 날부터 어머니의 눈물콧물 바람과 밀항하며 돈 버시는 아버지의 서러운 얘기들.. '나 혼자 좋다'고 내 원하는 대로 하자고 차마 할 수 없었다.

깊은 구렁에 빠진 슬럼프 기간

제주항 앞, 사라봉의 등대 폭풍우가 몰려오던 날 사라봉의 등대 모습 ⓒ 김정여


3월이 되어 김빠진 맥주 꼴로 나는 제주 사대를 들락거렸다. 첨 보는 남학생들과의 수업은 상당히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쉬는 시간에 책상에다 동전을 잔뜩 놓고 짤짤이나 하며 껄떡대는 그들을 보면 혐오감에 차올랐다.

여고 시절 적어도 친구와 나는 '상아탑을 쌓으러 대학에 간다'고 얘기했었고 어떤 것이 바람직한 삶인지, 공감되는 책에 대한 토론을 시작하면 친구의 집과 우리 집을 왔다 갔다 하기를 한 두 시간쯤 거뜬히 넘기곤 했었다. 우리는 그렇게 진지하게 생활했었는데, 겨우 짤짤이나 하다니? 유치하게.. 상처받은 데다 편견에 차 있으니, 모든 것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일주일 내내 방안을 뒹굴면서 '내가 잘못해서 이런 게 아닌데, 왜 내가 당해야 하나?' 하는 부당함, 슬픔, 억울함이 차올라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쩌다 겨우겨우 학교에 나갔고 시험을 봤다. 당시는 계열별 모집이어서, 많으면 120명, 적으면 60여명이 넘는 학생들이 한 강의실에 모여들었기에 출석 체크는 그리 엄중한 편이 아니었다. 어찌어찌 1년을 마칠 무렵에야 든 생각이 이렇게는 못산다는 것!

어차피 집안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면, 나 홀로 대학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해야 한다. 나는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섬 안에 갇혀서 대학까지 보낸다는 것이 너무나 싫었다. 그러다 우연히 알게 된 것이 의대는 생활비까지 주는 장학금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해 겨울이 지나고 2월말이 되면서 나는 가족 아무도 모르게 휴학계를 냈다. 그것을 믿고 다시 이대 의대로 목표를 세우고 학교 가는 척 하면서 독서실에 가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귀향과 약속

루이스 보서의 작품2 좌절, 학교공부에서 좌절한 학생을 연상케한다. ⓒ 김정여


루이스 보서의 작품1 나를 옭아매는 현실의 절망을 느끼게 하는 루이스 보서의 작품 ⓒ 김정여


그러던 여름 무렵, 일본에 밀항했던 아버지가 돌아왔다. 떠난 지 15년이 넘도록 혼자 숨어 지내며 돈을 버시다가 병든 늙은이가 되어 돌아오셨다. 너무 어려서 떠난 터라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었던 나로서는 아버지가 낯설었고 비밀리에 재수하는 터라 가능한 아버지 눈에 띄지 않도록 도망 다녔다.

어쩌다 가끔 여고 시절 친한 친구들과 어울려 밥 먹으러 갔다. 그러다가 친구들끼리 미팅, 축제, 서클 활동, 남자친구 얘기 등을 할 때면 내 스스로 선택한 일임에도 초라해지고 자괴감이 들곤 했다. 어찌어찌 다시 학력고사를 보고 성적이 나왔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의대는 쉽지 않을 듯하다. 그렇지만 내가 가고 싶었던 곳이 이대 아니던가? 그래서 1지망으로는 이대 의예과를, 2지망으로는 과학교육과를 써 넣었다. 친구 언니의 자취집에 며칠 붙어있으면서 면접시험을 봤다.

그리고 나온 결과는 1지망 불합격, 2지망 합격. 나는 기뻐할 처지가 아니었다. 재수를 하면서부터 어디든 그냥 의대로 가야겠다고 그래야 집에서 독립하고 졸업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후기 대학교를 고르는 동안에 대입 규정이 바뀌어서, 전기에 합격한 학생은 무조건 후기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뿔싸! 그 누구에게도 제대로 의논할 처지가 못됐던 나는 입시 정보를 챙겨야 한다는 것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내가 법을 이길 순 없으니, 승복할 수밖에.

그렇다고 그렇게 1년 동안 고생해서 얻은 결과를 물거품으로 만들기가 싫었다. 그래도 내가 가고 싶었던 대학 아니던가? 이대로 물러설 순 없다는 생각에 합격통지서를 들고 아버지께 사정을 했다.

아버지는 한 마디로 '안 된다'고 하시면서 마침 신창에 있는 잔치집으로 내려가 버리셨다. 생각 생각하다가 안돼 나도 버스를 타고 오랜만에 고향으로 내려갔다.

때는 겨울이라 잔치를 여는 친척 집엔 장작불이 타오르며 피어오르는 연기와 음식 냄새며 분주히 나르는 사람들,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었고 아버지는 오랜만에 남자 친척 분들만 있는 곳에 함께 모여 있었다.

그 옛날엔 한 주먹 하셔서 그리 당당하셨다고 언니들로부터 들었었는데, 한 쪽 구석에서 남이 하는 얘기만 조용히 듣고 있는 아버지, 안쓰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저것 가릴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아버지, 등록금만 대주세요. 그 다음엔 제가 어떻게든 해나갈게요!"라고 외쳤다. 집안 어른들은 내 합격통지서를 보시고, 기특한데 어떻게 좀 보내주지 그러냐고 나를 두둔해주셨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입학금을 포함한 80만원이 넘는 거금을 내고 일단 등록을 마쳤다. 아버지는 등록금을 내주시며 "네가 알아서 한다고 했으니, 졸업할 때까지는 방학에 집에 내려올 생각도 말고 가능한 성공하거든 그때 들어오너라. 그러겠다고 약속한다면 해주겠다"고 하셨다.

이제 등록을 했으나 서울서 살아갈 일이 막막했다. 나의 걱정은 이제 곧 어머니의 근심이 되었다. 그러던 차에 동네 아주머니가 어머니의 푸념소리를 듣고 '몰래바이트' 자리를 구해주셨다. 당시는 전두환 정권시절이어서 대학생들의 아르바이트 과외가 금지되었다.

그런데 보험회사 지점장으로 서울서 온 부부가 그 얘기를 듣고 자기 딸을 위한 과외교사로 그 집에 입주해 살면서 밥을 먹여주고 교통비만 주는 조건으로 나를 채용(?)하기로 한 것이었다.

2월 말이 되어서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도착하자 아주머니가 나를 맞았고 그날 저녁에 나는 처음으로 내가 가르칠 성희네 집에서 소갈비 대접을 받았다. 아주머니는 내가 엄마와 함께 오려니 생각했었나 보다.

내가 서울로 떠나기 전에 어머니는 신신당부하기를 '주인집 눈 밖에 나지 않게 가능하면 방청소나 설거지도 도와라'고 말씀하셨다. 늘 내가 집에서도 하던 것이어서 어머니 걱정 끼치지 않으려고 곧이곧대로 뒷날 아침에 방청소를 열심히 했더니, 아주머니는 "안 해도 되는데.." 하시면서도 매우 좋아하셨다.

남의 집에서 눈치를 보며 사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것도 과외를 잘 못해 잘리면 어쩌나? 하는 자기 약점을 가진 사람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우선 나의 가장 큰 문제는 '주거와 교통비는 해결되었더라도 국립 사대보다 네 배는 비싼 등록금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래서 입학식이 끝나자마자 조교선생님을 찾아가서 내 사정을 말하고 장학금 제도를 물어보았다. 나의 성적으로 장학생에 선발되지 않은 이유도 궁금했다. 그런데 조교선생님 왈, "우리학교는 수석만 장학금이 있어. 특별 장학금을 제외하고는! 게다가 2지망으로 합격하게 되면 설사 수석보다 성적이 높더라도 장학금을 줄 수는 없지 않을까?"

이건 또 뭔 소린가? 뒤통수를 세게 후려 맞는 느낌이었다. 당시 국립 사대생이면, 누구나 수업료만 내면 된다. 한 학기가 20만원이 안되었다. 그런데 장학금을 받게 되면 7500원의 학도호국단비만 내면 된다. 전체 학생의 10% 좀 넘게 그런 혜택을 받았다.

그런데 여기는 딸랑 한 명이라니! 분명코 입학안내 홍보 책자에서 화려한 수식의 장학금을 무지 많이 봤건만, 그게 생색내기용이었단 말인가? 게다가 졸업 후의 상황도 녹록지 않았다. 사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때부터 국립대 교사 발령도 적체되기 시작했다. 사립대의 경우는 스스로 순위고사에 합격하지 않은 한 교사로 나가는 것은 어림없었던 것이다.

남들은 입학식을 하고 청운의 꿈에 부풀어 기쁨에 들떠 있을 시간에 나는 이틀 밤을 고민했다. '내가 남의 집에서 몰래 과외를 하더라도 교통비를 뺀 나머지 생활비와 학비를 벌어야 한다. 장학금도 전액 받기가 힘들다. 앞날의 성공도 보장할 수 없다' 그 어느 조건도 제주 사대로 돌아가는 것보다 좋은 게 없었다.

그래도 되돌아가기는 싫었다. 그렇지만 혼자서 학비와 생활비를 다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상황 얘기는 해야 할 것 같아, 아버지께 전화로 말씀드렸다. 맨 처음에 아버지가 하신 일성은 "너, 어린 아이냐?"였다. 단호하게 한 마디를 하시기에 나는 "알겠습니다. 아버지, 제가 내려가겠습니다"라고 답했다.

내가 서울 오기 전 '철석같이 했던 약속을 이행하든가. 아니면 돌아가는 방법 밖에 길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복학하는 것도 기간이 정해져 있기에, 3월 초 입학하고 며칠 되지 않아서, 나는 친구에게 나 대신 자퇴서를 내 달라고 맡겨놓고 다시 가방을 싸들고 제주로 가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절망을 견디고 알아낸 것들

밤새 고민하고 또 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던 시간들이 지나고 다시 들여넣기 싫은 현실 속으로 발을 담가야 할 순간이 왔다. 내 일생의 가장 우울한 여행, 온통 비감을 질겅질겅 씹으며 그 비행기 속에서 나는 내내 기도했다. "아아, 주여! 제발 이 비행기가 추락하게 해주옵소서!" 나는 자살할 자신이 없었을 뿐 살기가 싫었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그 어떤 것도 없다는 절망 속에서 문을 열고 들어가 이불을 깔고 드러누웠다.

아버지는 전화 속에서 그런 반응을 보이면 그냥 참고 견디리라 생각하셨나 보았다. 내가 그토록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절망의 바다에 빠져버리리라는 생각은 못하셨던 것 같다. 내려오고 난 후에야, 정 원한다면 학비는 대주겠다고 말씀하셨으니까. 그러나 며칠 고민하는 사이에 자퇴서는 제출되었고 꼼짝 없이 나는 괴로움의 바다에 빠져서 헤어 나올 수 없게 되었다. 그 당시에 찻집에서 나왔던 팝송이 "Sea of heart break"였는데,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면 그 때에 서늘하게 가라앉던 슬픈 감정이 떠오른다.

아버지 무덤으로 가는 길 황사평 공동묘지, 아버지 무덤으로 걸어가다. ⓒ 김정여


현들아, 지금 30년도 훌쩍 넘은 그 시간이 흐르고 나니, 나는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는 게 있단다. 그 후의 삶까지 모두 얘기하려면 매우 오래 걸릴 것이기에 일단 지금껏 살아본 결과, 내가 말할 수 있는 것만 먼저 말하련다.

첫째, 나의 문제는 정말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고민한 게 아니었다. 다만 남들이 얘기한 대로 화려한 포장지가 좋아서 빠진 열정이었다. 물론 경제적 상황이 좋았다면 가지 못한 길로 가보는 것도 나쁘진 않았을지 모르지. 그러나 직업을 얻는 등의 실질적인 면에서는 불리했었던 것이 사실이다.

둘째, 남들이 좋다고 말하는 것을 따라가는 것은 바보이다. 당시 상황을 보면, <전국에 있는 국립 사대의 경우는 남들보다 반값 등록금을 내고 다녔고 졸업하면 의무적으로 발령을 받아야 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당시 공대나 경영대는 굉장히 인기가 있는 반면, 사범대는 인기가 없어 교사가 모자랐다는 것을 의미해. 남들은 공대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해서 월등히 높은 봉급과 복지 혜택을 받는데 교사는 봉급도 낮고 처우도 열악해서 특히나 남학생들은 기피했었기 때문에 국립대학은 학비 혜택을 줬던 것이다.

이는 뒤집어 말하면 남들이 좋다고 하는'시류'는 때에 따라 변한다는 거다. 생각해봐, 그 옛날 대졸자들이 무시하던 직업인 9급 공무원이나 교사 같은 직업을 얻으려고 요즘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노량진 학원을 들락거리는지를! 그 옛날에는 이처럼 선망이 대상이 될지, 누가 상상이나 했나 말이다. 그러니, 시류에 맞추어서 인생의 목표를 결정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게다가 앞으로 너희들이 살아갈 세상은 한 두 직업으로 인생 끝까지 갈 수가 없단다. 알다시피 인공지능과 경쟁하는 4차 산업혁명이 머지않아 자연스럽게 우리 주변에 스며들 거야. 처음에는 스마트폰이 뭔지도 모르다가 요즘 누구나 하듯이, 그렇게 변할 세상이 2020-2030년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하나의 직업을 닫고 또 다른 직업의 문을 두드려야 해. 어떤 일이든 내가 원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닫힌다는 것은 실패감을 느끼게 하고 새로운 문을 여는 데는 도전정신이 필요해. 그런데 그것은 머리로 생각해서 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견뎌내는 작업이 필요로 해. 나의 경우를 보면.

나는 옳든 그르든, 내가 원하기에 노력해봤고 내 뜻대로 되지 않았어. 그래서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지독한 절망과 무력감에 시달렸었지. 그리고 상처를 입으면서도 어떻게든 빠져나왔어. 그렇다면 내가 했던 1년 동안의 재수 생활은 헛살았던 것일까? 첨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단다. 실제적인 이익을 따진다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살면서 지금에 이르고 보니,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구나.

내가 실패를 해보지 않았다면, 아마 삶에서 어떤 문제에 부닥쳤을 때, 나는 뚫고 나갈 용기를 잃었을 거야. 그러나 나는 늘 정면 승부를 했고, 생채기를 거듭하면서도 뚫고 나가다보니, 힘이 생기더라. 그건 무슨 대단한 성공을 말하는 것은 아니야. 그러나 만일 지금 내가 직업을 잃게 된다 할지라도 나는 잘 살아갈 자신이 있음을 말해. 즉, 삶의 나락이라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음 또 도전거리가 나타났군." 이라고 생각하며 잘 견뎌나갈 맘 속 자신감 말이야.

살아보니, 삶은 희한하게도 하나의 문이 닫힌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돌아서면, 돌아서기만 하면 다른 문이 열려. 다만 돌아서느냐 마느냐를 선택하는 것이 그 누구가 아니라 내 자신이며, 그 선택이 어려운 것일 뿐, 용기 있게 선택해나가면, 길은 열리게 되어 있어. 이것이 내가 삶을 통해 얻은 것이야.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 "처절하리 만치 자신에 대해 고민을 해. 단지 남들이 좋다하는 얘기 말고."  '정말 나는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귀 기울이라고 말하고 싶어. 그것만 잘 얻어낼 수 있다면, 그 일이 무엇이든지 빠져서 할 수 있고 빠져서 하는 일은 지평을 넓혀 나가기 쉽기 때문에 실패를 걱정할 필요가 없단다. 그 일이 무슨 일이든, 우리 젊은 친구들이 넘어지는 것에 두려워않고 인생을 당당히 뚫고 나갈 수 있을 거라 나는 믿어.

부디, 그대들의 태어난 소명대로의 길이 열리기를!

비행기의 날개 비행기 안의 사람들은 각자 어떤 생각에 젖어 갈까? ⓒ 안혜란


덧붙이는 글 이제 고3 학생들은 누구는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고 누구는 재수를 택하는 기간일 겁니다. 누구는 행복한 여유를 즐길 수 있지만, 또 다른 누구는 괴로움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방황하는 시간이 되기도 하는 것이 겨울 이시간일것 같아요. 우리 학생들은 덴마크와는 달리, 모든 것을 떠밀리듯 결정하고 그에 대해 스스로 책임져야 하죠. '각자 도생!' 말하지 않아도 피부로 느껴지는 절박한 경쟁들, 우리나라 어디서나 어느 세대서나 나타나는 모습이죠. 꿈틀 여행에서 만난 우리의 어린 친구들은 모두 보석같았습니다. 그러나 덴마크 청소년에게서는 찾아볼 수 있는 여유와 느긋함을 즐기는 친구는 없었지요.. 예전의 저와 비슷하게 헤맬 것 같은 어린 친구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 쓰다보니 길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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