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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아공의 300년 넘은 인종차별을 지지한 것은 백인들만이 아니었다. 비백인, 즉 남아프리카원주민인 흑인들 중에도 적극 가담한 이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터키를 대표하는 소설가 엘리프 샤팍(Elif Shafak)은 그의 저서 <이스탄불의 사생아>에서 "일어서서 항거할 수 없는 사람이나 반대할 능력이 결핍된 사람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저항 안에 삶의 열쇠가 들어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일어서서 항거할 수 없는 사람이나 반대할 능력이 결핍된 사람'을 우리는 노예라 부른다.

<2번가에서> 에스키야 음파렐레 적, 배미영 역, 문학과 지성사
▲ 책 표지 <2번가에서> 에스키야 음파렐레 적, 배미영 역, 문학과 지성사
ⓒ 고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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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가에서>는 인종별로 거주지를 지정한 아파르트헤이트 체제하의 흑인 빈민가에서 성장한 현대 흑인문학의 아버지 에스키아 음파렐레의 자서전이다. 남아공 자서문학의 신호탄이 된 이 작품은 작가가 어떻게 노예이기를 거부했는지 덤덤하게 그리고 있다.

작가는 세계대공황과 인종차별 정책 속에서 '저항'을 통해 자아를 찾고 성장해 가는 모습을 그리면서도 격렬하게 울분을 토로하지 않는다. 오히려 절제된 가운데 차별 받는 이들을 솔직하게 그리는 모습은 간혹 웃음을 유발하여 가슴을 아프게 할 정도다. 그래서 혹자는 "넬슨 만델라가 남아공 정치의 별이라면 에스키아 음파렐레는 문학의 별이다"라고 말한다.

"그게 무슨 말인가? 빨고 있던 백인의 옷깃에 침을 뱉은 뒤에 할머니가 물었다." -p.82.

이 책은 단순히 남아프리카의 과거 인종차별을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인종차별로 인해 지배받는 자들의 정신이 어떻게 피폐해졌는지도 함께 고발하고 있다. 남아공의 300년 넘은 인종차별을 지지한 것은 백인들만이 아니었다. 비백인, 즉 남아프리카원주민인 흑인들 중에도 적극 가담한 이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정신이 피폐해져 노예와 다를 바 없었던 이들이었다.

"아프리카인 경찰들은 곤봉을 아주 잔인하게 사용했다. 미친개들 한가운데로 굴러 떨어진 사람처럼 피를 흘리며 경찰서로 끌려가는 경우가 수도 없이 많았다. 왜 체포하느냐고 따질 때마다 경찰이 하는 말은 늘 정해져 있었다. "가서 백인한테 말해." 그러면서 주먹으로 때리거나 곤봉으로 찌르거나 넓적한 손으로 철썩 때리는 것이었다."-p.172.

차별받는 세상에서 아프리카인들을 더욱 아프게 한 이들은 같은 아프리카인들이었다. 이것은 흡사 일제 때 조선인을 가장 악랄하게 괴롭힌 이들이 조선인 순사들이었던 것과 다를 바 없다. 순사들은 뼛속같이 '일본인'이기를 원했던 노예들이었다. 영혼을 판 노예근성 때문에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사람이었다.

동시대에 아프리카인 경찰이 있었고, 조선인 순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책을 읽으면 아프리카인들의 고통이 훨씬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아프리카인들은 우리 조상들이 일제의 수탈에 항거하며 한반도를 떠났던 것보다 더 비참하게 자신들의 터전을 잃었다. 그들은 '슬럼가 철거'라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터전인 2번가의 주택이 철거될 때, 쥐들이 흩어져 도망가듯 아무런 말도 못했고, 흩어져 도망가야 했다.

"흑인들은 지난 300년 동안 계속 그랬던 것처럼 쉬지 않고 봇짐을 지고 계속 움직였으며 굽은 등으로 터덜터덜 걸으며 자기가 힘이 더 세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이제 흑인들은 예전처럼 춤을 추지도 노래를 부르지도 않고 과거에 등을 지고 흐릿한 지평선을 마주보면서, 수량이 늘었다 줄었다 하는 저수지에 갇힌 물 흐름 속에서 움직일 뿐이었다. 그들은 흑인들의 귀에 늘 소리를 질러댔다. 움직여, 이 깜둥이야, 말 안 들으면 잡아 가둘 테다, 어서 움직여." -p.224.

절망이 반복되다보면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노예근성은 그렇게 압박받는 자들에게 각인된다. 그곳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훗날 반체제 활동으로 해고당하고, 사무보조원으로 생계를 이어가다 정부의 탄압으로 망명했던 작가조차도 '2번가'를 벗어나리라고는 꿈도 꿔보지 않았다고 할 정도면 알만하지 않은가?

"구정물과 파리와 가랑이 아래로 흘러내린 오줌 자국을 묻힌 아이들과 아이들의 의자를 쪼아대는 닭들이 있는 2번가 같은 곳은 아주 많다. 나는 태어나서 줄곧 2번가에서 왔다 갔다 했고 그 악몽에서 벗어나리라고는 꿈도 꿔보지 않았다. 아직도 내가 살아 있는지, 실은 이게 '저승 문턱을 넘는' 또 다른 길은 아닌지 의아할 때가 많다…." -p.227.

유년 시절부터 망명길에 오른 30대 후반까지 공포 그 자체였던 시대를 살았던 에스키아 음파렐레는 가난과 잔인한 제도에 맞섰다. 치열한 삶을 살며 저항했던 그에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작가는 유년 시절부터 '백인이 다니는 길에 거치적거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실수를 통해 배웠다'고 말한다. 그래서 백인들이 길을 다 차지하며 나란히 걸어가면 길을 비켜주는 것을 당연히 여겼다. 백인은 흑인들을 2번가에 가두고는 자비를 기대하지 말라고 가르쳤던 시대였다. 그런 삶 속에서 어떤 이들은 노예근성을 키운 반면, 에스키아 음파렐레는 저항했고, 민족의 빛이 된 작가가 될 수 있었다.

"그(백인)는 나를 철저히 궁지에 몰아붙여서 내가 흑인임을 절대로 잊지 않게 했다. 그는 나더러 자기에게 거짓말을 하면서도 뻔뻔해지라고 가르쳤다. 뒷문에 익숙해지게 만들었기 때문에, 나는 그의 흑인 하인이 주인의 가게에서 훔친 물건을 원가보다 싸게 샀다." -p.317.

흐릿한 저항의 음성을 낼 뿐이었던 종교에 믿음을 보류하다

에스키야 음파렐레는 기독교적 배경에서 성장했다. 할머니의 신앙적 유산과 교회학교와 목사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공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저 이따금씩 흐릿한 저항의 음성을 낼 뿐'이었던 교회의 가르침에 믿음을 보류한다.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에서 피난처를 찾으면서 현실을 외면하는 설교에 저항한다.

"극적인 무엇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정상적인 과정의 일부로 받아들였던 것들을 이제 내 인생이 거부했다. 2번가에서는 도저히 벗어날 길이 없어 보였고, 나의 증오심은 그 거리의 모든 집들을 다시 세우게 했다. 나는 종교의 필요성에 의문을 던졌다. 나는 사면초가에 몰린 채 믿음과 불신을 모두 어중간하게 보류시켜버렸다." -p.233.

책을 읽으며 '믿음과 불신을 모두 어중간하게 보류시켜버렸다'는 작가의 고백에 가슴이 아려왔다. '골고다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정치 현실에서는 멀찍이 떨어져' 정의를 위해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계속 뒷걸음만 친 것이 남아공교회만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었다.

국가라는 이름으로 백인 야만주의가 코앞에서 쑥쑥 자라고 있어도 남아공 교회는 침묵 혹은 동조했다. 불의에 침묵한 종교는 노예근성에 물들어 압박받는 이들을 위로하기는커녕 사라지지 않고 계속 떠오르는 모욕을 주었다. 불의에 저항하지 않는 교회는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의 온몸에 생채기를 내고 말았다.

"내 평생 수많은 사람들이 내 영혼 속에 들어와 지내면서 나의 영혼을 이리저리 잡아끌었다. 나는 냉혹한 통제와 열광적인 신앙과 경찰의 가혹한 감시 아래에서 온몸에 생채기를 내며 살았다." -p.318.

리로이 존스는 말했다. "노예가 노예로서의 삶에 너무 익숙해지면 놀랍게도 자신의 다리에 묶여있는 쇠사슬을 서로 자랑하기 시작한다. 어느 쪽의 쇠사슬이 빛나는가, 더 무거운가 등." 이처럼 노예근성은 인간성을 좀먹는다. 에스키아 음파렐레는 <2번가에서>에서 이 시대에도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는 노예근성을 고발한다. 이 책은 노예근성을 극복할 것을 외치고 있다. "저항하며 살 것인가, 노예로 살 것인가?"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2번가에서

에스키아 음파렐레 지음, 배미영 옮김, 문학과지성사(2016)


태그:#에스키야 음파렐레, #넬슨 만델라, #남아공, #인종차별, #아파르트헤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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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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