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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높이가 무려 18m에 이르는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 218호)이 있다. 도상으로는 관음보살상인데도 흔히 '은진미륵'이라 불리는 유명한 불상으로 국내 최대 석불이다.
   국내 최대 석불인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8호)이 있는 논산 관촉사.
 국내 최대 석불인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8호)이 있는 논산 관촉사.
ⓒ 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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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하면 무너져 가는 백제를 구하고자 계백장군이 오천 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나당연합군에 맞서 치열하게 싸웠던 황산벌 전투가 생각난다. 결국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백제인들이 나라와 더불어 그들의 뼈를 묻어야 했던 황산벌. 이곳을 굽어보는 자리에 관촉사 절집이 자리 잡고 있다. 나라도 어수선하고 마음도 스산해서 오랜만에 가까운 지인들과 함께 역사의 흔적을 찾아 논산 나들이를 하게 되었다.

지난해 12월 19일 창원시 진동서 오전 8시 30분에 출발한 우리 일행이 논산시 관촉로3번길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12시 10분께. 우리는 관촉사 인근 식당에서 점심을 먼저 하고 관촉사로 올라가기로 했다. 피꼬막 요리, 도토리전, 도토리묵 등 맛깔스러운 반찬이 곁들여 나오는 떡갈비 정식으로 일단 허기진 배를 채웠다.

거대한 불상.. 어떻게 상반신을 올려 놓았을까


   관촉사 석등(보물 제232호).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국보 제12호) 다음으로 크다.
 관촉사 석등(보물 제232호).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국보 제12호) 다음으로 크다.
ⓒ 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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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산 중턱에 자리 잡은 관촉사(灌燭寺, 충남 논산시 관촉로1번길). 이 절집에는 높이가 무려 18m에 이르는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 218호)이 있다. 도상으로는 관음보살상인데도 흔히 '은진미륵'이라 불리는 유명한 불상으로 국내 최대 석불이다. 우리가 관촉사를 찾아간 이유 또한 석조미륵보살입상을 보기 위함이었다.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에 이르니 계단길이 이어졌다. 계단길 따라 올라가 곧장 미륵전 쪽으로 걸어갔다. 가만히 미륵전 안을 들여다보니 부처를 모셔 두지 않았다. 왜 그럴까 했더니 북벽에 설치한 유리창으로 부처의 얼굴이 비쳤다.

미륵불은 괴로움이 많은 사바세계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나타난다는 미래불로 대개 산이나 들 등 바깥에 세워진 경우가 많다 한다. 그제야 미륵전 안에 따로 부처를 모시지 않은 심오한 뜻에 고개가 끄떡여졌다. 천 년이 넘은 석불과의 첫 만남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관촉사 미륵전 유리창으로 비친 은진미륵.
 관촉사 미륵전 유리창으로 비친 은진미륵.
ⓒ 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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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가 들고 있는 연꽃 가지가 아직도 내 가슴속에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부처가 들고 있는 연꽃 가지가 아직도 내 가슴속에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 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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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촉사 인근 식당서 일행과 떡갈비정식으로 맛난 점심을 했다.
 관촉사 인근 식당서 일행과 떡갈비정식으로 맛난 점심을 했다.
ⓒ 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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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전 뒤쪽으로 가니 보통 사람들 키의 열 배가 넘는 거대한 석불이 눈앞에 펼쳐졌다. 옆으로 길게 찢어진 눈, 넓은 코, 두꺼운 입술, 큼직한 손, 어깨에 닿을 듯 말 듯 늘어뜨린 귀걸이처럼 축 처져 있는 귀, 머리에 쓰고 있는 높은 관 등 하나하나가 엄청난 크기라 한눈에 보아도 위엄이 넘쳐 흘렀다.

그리고 몸체에 비해 큰 얼굴에 원통형 관 위로는 네모난 갓 모양의 보개(寶蓋)가 이중으로 올려져 있는데 청동으로 만든 풍경이 모서리에 달려 있어 자꾸 눈길이 갔다. 더욱이 부처가 들고 있는 연꽃 가지가 마치 자비의 씨앗을 뿌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고려 4대 임금 광종 19년(968)에 왕명을 받은 혜명대사가 조성하기 시작하여 37년 만인 7대 목종 9년(1006)에 완성된 은진미륵은 토속적인 생김새로 당시 충청도 일대에서 유행하던 불상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거대한 몸집으로 절로 감탄하게 하고, 장엄하고 상서로운 기운으로 그 품속에서 삶의 위안을 얻고 싶게 하는 이 석불에는 흥미로운 설화가 전해 온다.

반야산 기슭 사제촌에 사는 여인이 산에 올라 나물을 뜯는데 어디선가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 그곳으로 찾아가 보니 갑자기 땅속에서 커다란 바위가 솟아 나왔다. 이 기이하고 신비스러운 일을 보고 받은 조정에서는 하늘이 내린 돌이라 여겨 혜명대사에게 어명을 내려서 불상을 조성하게 했다. 그래서 솟아난 바위로 허리 아랫부분을 만들고, 상반신은 거기서 12km 정도 떨어진 우두촌에 있는 바위로 만들게 되었다는 거다.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 218호).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 218호).
ⓒ 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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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높이가 무려 18m에 이르는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8호), 그리고 석등(보물 제232호).
 높이가 무려 18m에 이르는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8호), 그리고 석등(보물 제232호).
ⓒ 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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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촉사 배례석(충남유형문화재 제53호).
 관촉사 배례석(충남유형문화재 제5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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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당시 이렇게 거대한 불상을 세운 의도가 무엇일까. 고려 광종은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 강화에 힘쓴 왕이다. 어쩌면 백제인의 얼이 여전히 가슴 밑바닥에 남아 있었을 이 지역 사람들에게 강력한 고려의 힘을 보여 주고자 함은 아니었을까.

이 불상에 대한 또 다른 궁금증은 큼지막한 아랫부분 위에 어떻게 상반신을 올려놓을 수 있었을까 하는 거다. 전해지는 바로는 상반신을 올려놓을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해 고심하던 스님이 사제촌을 지나가다 아이들이 흙으로 불상을 만들고 놀면서 모래언덕을 쌓아 삼등분 된 불상을 끌어올리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한다.

남다른 규모와 영험한 위엄이 널리 알려지면서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 3년(1909)에는 일본인들에 의해 어처구니없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불공드리러 왔다며 이 절집에 묵었던 일본인 몇몇이 부처의 큰 갓 위에 있던 금동화불을 훔치고 이마에 있는 광명주도 깨뜨려 놓은 황당한 사건이다. 나라가 힘이 없어 기울어져 가던 때라 그런 수모를 당했겠지만 정말이지, 분하고 슬픈 일이다. 

석조미륵보살입상과 함께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석등(보물 제232호)이 미륵불 앞에 위치하고 있다.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국보 제12호) 다음으로 커다란 규모를 보여 주는 고려 시대 걸작으로 미륵불에 흠뻑 빠져 있다 보면 자칫 지나칠 수가 있다. 석등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불자들이 부처님께 합장하고 예를 올리던 배례석(충남유형문화재 제53호)이 놓여 있다. 그 위에 동전들이 얹혀 있어 좀은 생뚱맞은 기분도 들었지만 우리들의 고달픈 삶 속에서 간절히 바라는 소망 같은 게 느껴졌다.

왕건은 왜 개태사 절집을 세웠을까

   개태사 철확(충남민속문화재 제1호).
 개태사 철확(충남민속문화재 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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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후 2시 30분쯤 관촉사에서 출발하여 개태사(開泰寺, 논산시 연산면 계백로)로 이동했다. 개태사는 936년 후백제 신검으로부터 항복을 받은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일을 기념하여 지은 절집이다. 왕건은 왜 여기에 개태사를 지었을까. 그는 후백제를 멸망시킴으로써 통일의 대업을 이루게 된 것이 부처님의 은혜와 하늘의 도움이라 여겼다. 그래서 황산을 천호산(天護山)이라 이름을 바꾸고 개태사도 창건했다 한다.

지금은 옛 영화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조용하고 소박한 절집이다. 우리는 철확(충남민속문화재 제1호)이 있는 곳으로 바로 갔다. 철확은 대형 철제 솥으로 창건 당시 주방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크기로 보아 한때 번창했던 절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다. 개태사가 폐허가 되면서 벌판에 버려져 방치되고, 대홍수로 인해 하류로 떠내려가는 등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기도 했지만 오늘날까지 이렇게 보존이 되어 그나마 다행스럽다.

개태사에서 더 머물고 싶었지만 집으로 돌아갈 길이 멀어 우리 일행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창원을 향해 길을 떠났다. 흥망성쇠를 되풀이하면서 역사는 흘러가고, 빈손으로 태어나 다시 빈손이 되어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삶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옛사람들의 숨결을 느끼면서 역사의 흔적을 더듬는 여행은 어떻게 보면 인생의 답을 찾는 시간인 것 같다.



태그:#은진미륵, #철확, #관촉사, #개태사, #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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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3.1~ 1979.2.27 경남매일신문사 근무 1979.4.16~ 2014. 8.31 중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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