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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가족' 중심적인 명절 문화로 인해 '명절 나기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여성들이 많습니다. 막중한 가사노동의 부담을 떠안는 것은 물론, 명절임에도 친정에 가 본 적이 없는 여성들도 있습니다. 이번 설날, 혹은 다음 추석에는 며느리들이 '시가'로 가서 차례를 지내는 관습을 벗어나, 사위들이 '처가'로 먼저 가보는 게 어떨까요? 처가에서 명절 나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명절 문화가 조금은 달라질지도 모릅니다.[편집자말]
2년 전이다. 3시간이 넘게 KTX를 타고 부모님 댁에 도착했다. 어둑어둑 해는 졌지만 명절마다 찾아가는 고향은 언제나 포근하다. 두 딸이 사촌 형제들과 놀 생각에 들뜬 마음을 온몸으로 분출할 때 아내는 조용히 가방을 풀고 옷과 물건을 정리했다.

까치설날이 지나고 우리 설날이 되자, 우리는 차례를 지내고 세배를 했다. 선산을 찾아 조상에 인사를 드린 후 친척 어르신을 뵙고 나니 벌써 저녁이다. 그제야 부모님, 형네 식구 그리고 우리 가족은 모두 거실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그동안 있었던 아이들의 성장 이야기는 물론 직장생활의 안녕과 경제적 고단함을 조곤조곤 나누며, 서로의 잔에 술을 채워 부딪치던 중 갑자기 아버지와 어머니가 눈빛을 주고받으시더니 짧게 한 말씀 하신다.

"올해부터 2년에 한 번씩 추석에는 오지 말고 처가에 가든 여행을 하든 너희들이 계획해서 따로 시간을 보내라."

7남매의 장남인 아버지와 맏며느리인 어머니. 두 분이 함께 살아온 40년이 넘는 세월을 감히 짐작해보건대 두 아들 내외를 두고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상상 그 이상의 일이다. 장남인 형이 살짝 당황해하는 사이, 둘째이자 막내인 나는 '여행'이란 말에 방점을 찍으며, '넵' 하고 시원하게 답했다. '우리도 명절에 해외로 여행 한 번 가보는 거야' 하는 꿈에 부풀어서 말이다.

처가에 가서, 지난 명절의 아내 모습 떠올랐다
 
차례상(자료사진)
 차례상(자료사진)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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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고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었다.

추석날, 미리 처가까지 방문한 형은 중국으로 가족 여행을 갔다. 그리고 나는 인천공항이 아니라 처가로 향했다. 명절 당일 처음으로 처가를 찾은 나도, 그런 나를 맞이하는 처가 식구도 어색하긴 마찬가지였다.

아이들과 같이 어른들께 인사드린 후 살며시 거실 한쪽에 자리 잡았다. 식욕을 자극하는 명절 음식의 냄새가 코를 지나 배를 쿡쿡 찌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아셨는지 장모님은 이것저것 먹을 것을 챙겨주신다.

TV와 음식을 번갈아보던 나는 점점 멀뚱멀뚱해지기 시작했다. 수십 차례 방문한 처가이니 낯선 곳도 아니고, 나란히 앉은 사람들도 오늘 처음 본 이들이 아닌데, 간헐적인 침묵 사이에 흐르는 이 어색함은 도대체 뭐지? 멋쩍어 두 딸에게 괜스레 말을 건네 보지만, 놀이에 빠진 녀석들에겐 더 이상 나의 목소리는 닿지 못했다.

매번 명절 후 다가오는 주말에 친정에 가면, "시댁 어른들이 음식 준비도 다 하시고 챙겨주셔서 편히 먹고 와서 힘들지 않았다"라고 하는 아내의 말을 듣고는 그렇게 믿었다. 나도 열심히 가사노동을 하고 아이들을 돌보니까. 그런데 내가 명절에 처가에 가 보니, 웬걸. 이제야 지난 명절의 아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힘이 넘치는 장난꾸러기 조카들과 두 딸이 차례를 방해하지 않도록 작은 방에 모아 함께 놀이를 한다.' '배고프다, 심심하다 투덜대며 수시로 요구사항을 쏟아내도 큰 소리 나지 않게 상황을 모면한다.' '차례가 끝나면 쟁반을 정리해 음식을 차리고, 식사 후엔 차를 준비하고 설거지를 한다.' '다시 끼니때가 되면 음식을 준비하는 아내.' 그러다 문득 시댁이란 공간에서 아내가 스스로를 외딴섬으로 느끼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이른다.

주방에 있는 아내를 바라본다. 친정에 가도 시누이가 앉아서 음식을 기다리는 시대는 아니니 올케와 함께 음식을 준비하고 식탁을 정리해야 한다. 친정에서도 몸은 여전히 바삐 움직인다. 하지만 얼굴엔 생기가 넘치고 목소리엔 자신감이 가득하다. 역시 홈그라운드는 이런 곳이다.

명절이 지나면 주부들의 명절 증후군 발생과 명절 후 이혼이 증가한다는 신문기사가 종종 눈에 띈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하며 무심코 지나쳤던 남들의 이야기가 나와 아내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명절에 처가로 가고서야 알게 되었다.

물론 이런 깨달음이 처가에 문안을 자주 드린다거나 경조사에 빠짐없이 참가하며 명절 준비를 함께 하는 것과 같은 급격한 변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게 익숙함이 아내에겐 낯섦일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일상에서 아내와 부딪힐 때면 이런 생각을 꺼낼 수 있는 작은 여유가 생긴 정도이다. 

아내를 이해하기, 처가를 이해하기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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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4월, 아내는 장모님을 모시고 처형이 살고 있는 말레이시아에 가고 싶어했다. 그러면 나에겐 에너지와 식욕이 넘치고 때론 섬세한 손길이 필요한 아홉 살 딸과 아직 기저귀에 의지해 잠잘 때면 엄마를 찾는 세 살 둘째가 남겨진다.

아내가 없는 5일간의 독박 육아를 상상했다. 내 스스로의 능력을 믿어볼까 하다가도, 한편으로는 한 걸음 물러나고 싶기도 했다. 그럼에도 처가에서 아내가 할 몫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을 다 잡았다.  

아주 길게 느껴졌던 5일이 지나고서 아내가 돌아왔다. 그리고 한 달 뒤,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아내는 지방에 계신 시부모님을 서울로 초대했다. 취향을 고려해 뮤지컬을 예매하고 궁궐 투어는 물론 맛있는 식사까지 준비했다.

아내 덕에 부모님과 여행하듯 시간을 공유하니, 서로를 바라보고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추억을 함께 쌓는 기회가 되었다. 서로의 역할 수행에 국한되었던 이야기가 선호하는 취미생활, 문화체험과 여행에서 느낀 감성으로까지 확장되기도 하여 부모님과 같이 있는 시간이 좀 더 경쾌해지기도 했다.

올해엔 처가에 먼저 가는 두 번째 명절이 기다리고 있다. 오랜 시간 운전을 하거나 명절 음식을 준비하며 생기는 고단함이 아니라 또다시 어색한 침묵을 견뎌야 하는 명절증후군을 겪을지 모른다. 하지만 더 넓은 가족을 이루고, 더 자주 서로를 만나고, 더 깊이 상대를 이해하는 유쾌한 명절 나기를 상상하며 처가에 가려한다. 2년에 한 번씩 처가에 먼저 가는 것이 우리 가족의 명절 문화를, 내 삶의 일상을 조금이나마 변화시킬 수 있다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작가 윤기혁씨는 책 <육아의 온도>를 썼습니다.


태그:#유쾌한 명절 나기, #2년에 한 번씩 처가로 갑니다, #명절, #설날, #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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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책 : <육아의 온도>(2014, somo), <육아살롱 in 영화, 부모3.0(공저)>(2017, sb), <젊은 공무원에게 묻다>(2020, 남해의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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