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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옥희 울산교육감이 12월 8일 별세했습니다. 노 교육감은 전교조 창립멤버로 참교육 실천에 앞장서 왔습니다. 그는 2018년 지방선거에서 울산교육감에 취임한 이후 최하위 수준이던 울산의 무상급식률을 전국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등 울산 지역의 교육 환경과 교육 복지 개선에 힘써왔습니다. 

2022년 지방선거에서 승리하며 '울산 최초 재선 진보교육감'이 된 노 교육감은 지난 6월 <오마이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공교육은 국가책임"이라고 평소 소신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많은 이들이 애통해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노 교육감의 이야기를 담은 2017년 1월 안건모 시민기자의  '평범했던 수학 선생님은 왜 노동운동가가 되었나' 기사를 다시 소개합니다. 노옥희 울산교육감의 명복을 빕니다. [편집자말]
울산과학대 정문에서 봉수로를 따라 현대아파트가 늘어서 있는 길을 가다 보면 4층짜리 상가 건물이 보인다. 그 건물 3층에는 '삶을 나누는 공간 더불어 숲'이라는 북카페가 있다. 각종 소모임을 운영할 수 있는 소모임 공간이 있고, 어린이방도 따로 있다. 다양한 동아리 활동, 학습소모임, 소규모 네트워크들이 지역 내에 뿌리를 내리고 활발히 활동할 수 있도록 공간을 빌려 주고,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더불어 숲은 9년 전에 문을 열었다. 이곳 대표로 있는 노옥희는 얼마 전에 부모교육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아이쿱생협, 참교육학부모회, 어린이책시민연대 등 18개 단체가 조합원으로 가입돼 있다. 노옥희는 이제껏 교육운동과 노동운동, 그리고 진보 정치 활동 등을 하며 살아왔다. 현재 박근혜퇴진 울산 비상시국 시민행동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노옥희의 삶을 따라가 본다.  
 
작은도서관 더불어숲
 작은도서관 더불어숲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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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옥희의 어린 시절

노옥희는 1957년 김해 한림면 면 소재지에서 4킬로미터 떨어진 모정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위로 오빠 셋과 언니가 있고, 아래로 여동생 하나가 있다. 아버지는 정미소를 하셨다. 집에는 늘 쌀을 사려는 쌀장사들과 방아를 찧기 위한 사람들로 붐볐다. 아버지는 학교 교육을 많이 받지는 않았지만 기계를 고치는 기술이 뛰어나 동네에서 기계가 고장 나면 찾아와 모셔 갈 정도였다. 아버지는 경운기로 논이나 밭을 갈아 준 뒤 삯을 받기도 하고, 나락을 사들여 도정해서 쌀도 팔고, 닭을 키우는 등 여러 가지 일을 했다.
 
노옥희 어린 시절. 오른쪽은 셋째 오빠
 노옥희 어린 시절. 오른쪽은 셋째 오빠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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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옥희는 걸어서 20분 정도 걸리는 금곡초등학교를 다녔다. 어릴 때는 몹시 말라 있었다. 모두들 가난한 시절이었다. 겨울이면 손에 때가 새까맣게 끼고 트고 갈라져 피가 나기도 했다. 몸이나 머리에서 이가 기어 나오기도 했다. 겨울이면 호롱불 아래 둘러앉아 내의를 벗어서 이를 잡기도 했다. 양말이 떨어지면 전구를 발꿈치 부분에 넣어 기워서 신었다. 추석이나 설이 되면 부모님이 새 옷이나 신발을 사 주었기 때문에 명절을 손꼽아 기다리기도 했다.

중학교는 집에서 4킬로미터 떨어진 한림중학교에 다녔다. 날마다 왕복 2시간가량을 걸어야 했다. 체구도 작고 빼빼 마른 데다가 얼굴까지 새까매 늘 어디가 아프냐는 소리를 들었다. 통지표에는 '종합 진단 요망'이라는 의견이 쓰여 있기도 했다.

노옥희는 공부를 잘했다. 하지만 몸이 약해 체육을 잘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입시 때가 돼 부산여고에 원서를 넣었지만 떨어졌다. 체육을 못해도 입시에 떨어진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는데, 충격이 컸다. 첫 실패를 경험했다. 중학교 때까지 지니고 있었던 우월감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노옥희는 후기인 데레사여고에 입학했다.

그 학교는 천주교 재단의 학교였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자 잘사는 친구들이 많아 처음에는 열등감이 생겼지만 곧바로 적응했다. 성적도 많이 좋아졌다. 키도 한 해에 10센티미터씩 자라 키가 큰 친구들과 어울렸다. 어떤 이들은 노옥희와 친구들을 보고 농구 선수들이 합숙하다 나왔냐고 묻기도 했다.
 
고등학교 2학년 수학여행
 고등학교 2학년 수학여행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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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레사여고를 졸업하고 대학은 무난히 들어갔다. 부산대학교 수학과에 진학했다. 집안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6남매가 모두 학교에 다니니 살림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노옥희는 부모님의 고생을 덜고자 과외 아르바이트 등을 하면서 학교에 다녔다.

대학 1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결혼한 큰언니가 친정을 오가며 살림을 챙겼으니 어려움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대학 생활은 평범했다. 박정희 말기였지만 시대 상황을 잘 몰랐다. 노옥희는 문리대로 진학해 교직 과목을 이수해 교사가 됐다. 거창한 꿈이나 기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부모에게 더는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자기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교사가 되고자 했다.

학교를 졸업할 무렵, 문리대 게시판에서 울산의 현대공고에서 교사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봤다. 사택을 제공하고 월급도 더 많이 준다는 내용이 마음에 들었다. 그동안 부산에서 7년을 살았다. 오빠와 함께 자취하다가, 오빠가 졸업한 뒤에는 결혼한 언니 집에 살았고, 대학 때에는 입주 과외를 하면서 지냈다. 그러니 사택을 제공한다는 문구에 꽂히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선택이 노옥희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울산, 그곳은 '현대 왕국'이었다.

1979년 3월 어느 날, 노옥희는 두꺼운 앙고라 담요와 살림살이 몇 가지를 들고 울산의 동쪽 끝 방어진에 있는 남목마을에 도착했다. 울산 시내에서 한참 떨어진 방어진, 학교가 있는 남목고개를 넘어가는 길은 어느 시골로 가는 느낌이었다. 옛날 가옥과 논밭이 대부분이었다. 가끔 10평~15평 정도 되는 3층짜리 주택이 보였다. 당시 현대건설이 헐값에 땅을 사서 세운 허름한 복도식 사원 주택이었다.

노옥희가 지낼 사택은 빨간 벽돌로 바깥을 치장한 5층짜리 아파트였다. 이곳은 교사들과 현대그룹 계열사에 다니는 사원들이 사는 아파트였다. 연탄아궁이에다 문틀은 아귀가 맞지 않아 거센 바람이 쌩쌩 들어오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아파트였다. 게다가 혼자 쓸 수 있는 방도 아니고 미혼자는 두 사람당 한 채를 같이 써야 했다. 그래도 공짜로 살 수 있는 아파트였기에 별 불만은 없었다.

학교는 걸어서 20분가량 걸리는 산등성이에 있었다. 현대공고 학생들은 대부분 객지에서 온 아이들이었다. 현대공고를 졸업하면 현대그룹에 취직이 잘 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린 학생들이 방을 얻어 자취 생활을 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그 당시 울산에는 설립된 지 40년이 넘는 울산공고와 개교 2년째인 현대공고가 있었다. 이 두 학교는 울산의 현장 노동자들 대부분을 배출하고 있었다.

간혹 늦은 나이에 입학한 학생도 있었고 소년원을 거쳐 온 학생도 있었다. 졸업한 뒤에는 거의 대부분 공장에 취직했다. 먼저 자격증을 따는 것이 학교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전문 교과 중심으로 돼 있는 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노옥희는 아웃사이더처럼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젊은 교사들과 재미있게 어울렸다. 수업을 마치고 나면 저녁도 같이 먹고, 현대중공업 정문 앞 현대백화점 3층에 있던 '아리아'라는 음악다방에 모여 학생들 얘기와 동료 교사들 얘기로 시간을 보내곤 했다. 동료 교사들끼리 결혼한 커플도 여럿 생겼다.
 
1986년 YMCA 글우리독서회와 성공회 교회에 다녔던 후배 명숙, 김외화와 함께.
 1986년 YMCA 글우리독서회와 성공회 교회에 다녔던 후배 명숙, 김외화와 함께.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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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11월 가을소풍 때 동료 교사 고복실 선생과 제자들, 노옥희
 1982년 11월 가을소풍 때 동료 교사 고복실 선생과 제자들, 노옥희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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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시대였지만 노옥희가 다녔던 부산대학교는 '유신 대학'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박정희 독재정권 내내 별다른 정치 행동이 없었다. 학도호국단에서 교련 수업을 받는 등, 대부분의 학생들은 민주화 운동은 꿈도 꾸지 못했다.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중 10·26이 터졌다. 박정희의 죽음은 혼란스러웠다. 부마항쟁이 터졌다. 부산 쪽에서 대학생들의 데모 소식이 간간이 들려왔다. 동생은 운동권이었다. 그해 부산대학교에 입학한 동생이 걱정스러웠다. 어느 날은 퇴근한 뒤에 시외버스로 부산에 가서 동생이 잘 있나 확인하기도 했다.

역사의식이나 정치의식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현대그룹에 속해 있는 사립 현대공고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정주영 이사장은 1년에 한두 번 올까 말까 했는데, 그가 학교에 오는 날이면 온통 난리가 났다. 학교장은 현대재단 관계자의 눈치를 보기에 바빴다. 이들의 눈 밖에 나서 그대로 잘리거나 강제로 다른 학교로 옮겨 가는 일이 많았다. 노옥희가 보기에 뭔가 알 수 없는 거대한 힘이 학교를 움직이고 있었다. 부당한 지시에 마음속에 반항심이 싹트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객지 생활을 하는 어린 제자들이 늘 안쓰럽고 불쌍해 보여 뭐라도 해 주고 싶은 생각이 자꾸만 늘어갔다.

역사의식에 눈을 뜨다

어느 날 고향 친구가 근무하는 울산YMCA(기독교청년회)에서 여름방학 캠프를 가는데 자원봉사를 할 교사가 모자란다며 도와 달라고 부탁해 왔다. 노옥희가 초등학생 반을 맡아 6박 7일을 봉사하게 됐다. 그런 계기로 노옥희는 YMCA와 가까워졌고, 당시 간사였던 이상희 선배를 알게 됐다.

1982년 YMCA 간사 이상희 선배의 도움으로 YMCA에서 글우리독서회를 만들었다. 주로 소설이나 사회과학 책을 읽고 독후감을 나누며 그 내용을 회보로 만들어 배포하는 활등을 했다. 독서회에서는 당시 사회문제에 대해 비판적인 의식을 일깨워 주는 소설과, 현장 수기인 <현대의 휴머니즘>, 한국 현대사를 다룬 <해방 전후사의 인식>,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파헤친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 경제사를 다룬 <인간의 역사>, 변증법의 기초를 가르쳐 주는 <철학에세이>, 노동문제를 일깨워 준 <전태일 평전> 등을 읽었다.

"내가 본격적으로 사회에 눈뜨기 시작했던 시기가 바로 이때다. 그간 살아왔던 삶에 대한 부정이 시작되었고, 알 수 없었던 것에 대해 뭔가 어렴풋이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전두환이 정권을 잡던 1980년대는 워낙 탄압이 심했던 시절이었다. 전국에서 YMCA 내에 교사 모임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대표적인 사업은 형편이 어려워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을 위한 근로 청소년 야학이었다. 노옥희는 울산을 대표해서 전국 모임에 참여하게 됐다. 여름방학에는 영남권 연수, 겨울방학에는 전국 연수가 있었다. 노옥희는 전국에서 뜻이 맞는 교사들을 만나게 되자, 좋은 교사가 돼 교육 환경을 바꾸겠다는 마음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노옥희는 교사 조직을 만들기 위해 정신없이 일에 매달렸다. 독서 모임, 교사 모임, 근로 청소년 야학에다가 학교에서 대학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을 방과 후나 일과 시작 전에 따로 모아 보충수업을 했다. 결핵 판정을 받았을 때도 일을 멈추지 않았다. 아는 만큼 정직하게 실천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노옥희의 삶이 바뀌는 계기가 되는 일이 벌어졌다.

박아무개라는 제자가 있었다. 그 제자는 부모를 모두 잃고 고모 댁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 학생은 학교 매점에서 일하는 등 돈을 벌어 가며 학교에 다녔다. 노옥희는 그 제자의 어려운 사정을 알았기에 특히 더 애정이 갔다. 그 제자는 졸업 후 부산 사상공단에 취업했다. 이른바 '마찌꼬바' 금형 공장이었는데 그곳에서 그만 사출기에 손이 눌려 손목을 자르게 되는 대형 산재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1980년대 초는 노동조합조차 없는 회사가 많았고 산재를 당해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 제자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노옥희는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 뛰어다녀 봤지만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사장 앞으로 되어 있는 재산도 없어서 보상금 한 푼 받을 수가 없었다. 그 제자는 절망했고 분노했다.

"어느 추운 겨울 밤늦은 시각에, 그 졸업생이 비에 흠뻑 젖은 채로 당시 학교 사택에서 자취하고 있던 나를 찾아왔다. 술이 많이 취해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태라 도저히 그냥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학교 사택에서 결혼도 안 한 여교사가 졸업한 제자를 재워 주다 무슨 소문이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잠시 망설였지만 방에 들어오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 윗목에다 이불을 깔아 재웠지만, 어린 나이에 부모도 없고 손목까지 잘렸으니 그 절망이 얼마나 클까 생각하면서 정작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노옥희는 이런 제자를 보면서 학생들에게 전공과목만 열심히 가르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교사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길이 없을지 생각했다. 학생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면서 아이들과 함께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위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두렵고 괴로웠다.

노옥희는 제자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산재 보상과 노동자들의 권리를 지키는 노동조합이란 것이 법으로 보장돼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길이 보였다. 노동자로 살아갈 제자들에게 노동자 의식을 갖게 하는 책도 읽게 하고, 노동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동료 교사들을 조직하는 일에 집중했다.

노옥희는 학생의 진로를 지도하기 위해 졸업생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묻는 설문지를 만들어 돌렸다. 울산과 광양에 있는 졸업생들까지 도와줘서 5백 부 넘게 설문지를 받을 수 있었다. 그 설문지를 혼자서 바를 정(正)을 써 가며 일일이 분석했다.

노옥희는 그 설문 조사를 통해 제자들이 하루에 몇 시간 일하고 임금은 얼마를 받는지 자세한 근무 조건을 알게 됐다. 대학을 나오지 않은 제자들은 갖가지 차별을 받고 있었다. 희망이 없는 노동자 생활을 벗어나고 싶어 야간대학에 다니는 제자들도 있었다.

노옥희는 그때부터 제자들에게 노동자로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함께 책도 읽고 자기 생활에 대해 글도 쓰게 했다.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학생들과 함께 책도 읽고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눴다. 그러다 보니 제자들이 실습을 나가서 부당한 처우를 받게 될 때 이전처럼 침묵하거나 묵인하지 않는 학생들이 생겨났다. 노옥희는 교사라는 직업이 학생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1986년 교육 민주화 선언

1982년에 창립된 YMCA중등교육자협의회에서는 민주화를 갈망하는 각계각층의 선언에 힘입어 1986년 5월 10일을 교사의 날로 정해 교육 민주화 선언을 하기로 했다. 영남권에서 80명의 교사가 함께 부산 YMCA집회에 참석했다. 울산에서는 노옥희와 정익화 뿐이었다. 교육 민주화선언은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보장, 강요된 보충수업 및 심야 학습 철폐 등 지극히 상식적인 내용이었다. 하지만 교사들이 일으킨 최초의 집단행동이라 교육계는 물론이고 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교장은 시도 때도 없이 노옥희를 교장실로 불러 들여 닦달했다.

그러나 노옥희는 포기하지 않았다. 영남 지역 Y중등교협에서는 9월 6일 교육민주화 실천결의대회를 열었는데 노옥희는 경찰의 눈을 피해 행사장인 부산YMCA 강당으로 몰래 들어갔다.

노옥희는 애초 행사에서 별다른 역할을 맡지 않았다. 그런데 경찰의 방해로 참석하지 못한 교사들이 있어 노옥희가 축시를 낭송하는 역할을 맡게 됐다. 축시 제목은 김진경 선생의 <백두산 사진을 보면>이었다. '교실 안에 걸어 둔 백두산 사진을 본 장학사가 사진을 붙였다는 이유로 선생을 그만두게 했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노옥희는 그 시의 내용이 뭔지도 몰랐다. 학교에서는 징계 절차에 들어갔다.

추석은 매년 오지만 선생님은 한 번 가면 다시는 못 온다

그해 9월말 징계가 본격화됐다. 갓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1학년이 된 학생들이 집단행동에 나섰다. 시험을 거부하고 선생님을 지키겠다고 결의했다. 학생들은 등교를 거부하고 울산교육청으로 갔다. 고등학교 문제는 마산에 있는 경상남도 교육위원회로 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는 한나절이나 시내를 돌아다녔다. 결국 학생들은 교장 면담을 약속받고 나서야 해산했다.

노옥희는 "왜 그렇게 했냐"고 학생들에게 물었다. 제자들은 "추석은 매년 오지만 선생님은 한 번 가면 다시는 못 온다"고 말했다. 노옥희는 그 말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결국 몇몇 학생은 학교에서 잘리거나 징계를 당했다.

노옥희의 징계는 현대학원에서 이루어졌다. 노옥희는 현대그룹의 실체와 대면하게 됐다. 재심은 현대중공업 안에 있는 한 건물에서 열렸고 징계위원장은 현대중공업 신익현 상무였다. 징계의 계기가 된 교육민주화선언에 관해서는 별 얘기가 없었다. 이런 대화가 오갔다.

"수학 교사가 왜 학생들에게 노동조합 운운하느냐?"

"졸업해서 노동자로 살아가야 할 학생들에게 노동조합에 대해 기본적인 것을 가르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니냐."

"현대는 노동조합이 필요가 없다. 노사협의회가 있어서 다 하기 때문에 노동조합을 안 한다."

"어떻게 노동조합과 노사협의회가 같은가?"

그들은 '감히 누구 면전이라고'하는 식의 태도만 보였다. 노옥희는 교사가 그런 사람에 의해 거취가 결정된다는 사실이 한심하고 화가 났다. 그들이 교사를 대하는 태도에서 현대중공업이 노동자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1986년 10월 24일, 노옥희는 학교에서 쫓겨났다. 교직 생활 7년하고 8개월 만이었다. 그 뒤로 현대공고 졸업생들이 취직 면접시험을 볼 때면 "노옥희 선생을 아느냐?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물론 좋은 선생이라고 답한 학생은 취직이 되지 않았다.

"어쩌면 이 때문에 현대그룹과 새로운 인연으로 마주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악연이었다. 이후 나는 노동운동의 길에 들어섰고 당연히 현대그룹이 상대가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987년 8월 18일 현대중공업에서 출발해 남목고개를 넘어 행진하고 있는 노동자군대
 1987년 8월 18일 현대중공업에서 출발해 남목고개를 넘어 행진하고 있는 노동자군대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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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직되고 난 뒤 노옥희는 '울산사회선교실천협의회'(아래 울사협) 단체 산하 노동문제상담소에서 간사로 일하게 됐다. 초창기에는 부산 노무현·문재인 변호사 사무실에서 노동법률상담소를 운영하고 있던 하동삼 선생이 매주 토요일 특별 상담을 맡아 주었다.

정세는 급속히 변하고 있었다. 박종철 학생 고문치사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울산에서도 대중 집회를 준비했다. 당시 그런 일을 담당할 단체가 없어 울사협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전두환은 4·14호헌 조치를 발표하고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전국에서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만들어져 국민 항쟁이 시작됐다. 울사협이 각종 시국집회를 준비하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노옥희는 경찰의 눈을 피해 행사를 알리는 유인물을 인쇄하고, 동료들에게 전달했다.

"동료들과 밤에 봉고차를 타고 다니며 집집마다 유인물을 뿌렸는데 주로 '6·10 범시민 결의대회'와 '6·25 평화 대행진' 등 가두시위를 알리는 내용이었다."

6월 26일에 노옥희는 "노동 생존권 압살하는 군부독재 몰아내자"라는 내용을 담은 유인물을 뿌리다가 경찰에게 붙잡혔다. 경찰에 연행돼 3일간 구류를 살았지만 묵비권을 행사해 다른 사람들에게는 피해를 주지 않았다. 노태우의 6·29선언으로 시위는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우리 사회를 뿌리부터 흔들어 놓을 새로운 투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1987년 7월 5일 현대엔진에서 권용목이 주도해 드디어 노동조합을 설립했다. 울사협 노동문제상담소는 <울산노동소식> 지면에 현대엔진 노조가 설립됐다는 소식을 알렸다. 기사는 타자기로 치고, 제목 글씨는 직접 손으로 써서 만들었다. 현대미포조선 노동조합 설립을 비롯해 현대그룹 노조 설립 소식을 계속해서 발행했다. 상담소에는 신규 노조 설립, 어용 노조 민주화 관련 문의가 빗발쳤다.

현대엔진 노동조합을 이끌던 권용목을 중심으로 현대그룹의 다른 노동조합들은 '현대그룹노동조합협의회'를 만들어 연대 투쟁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드디어 1987년 8월 17일, 18일 샌딩머신, 트럭, 지게차 같은 중장비로 무장한 노동자 대군이 남목고개를 넘었다. 막고 있던 경찰이 혼비백산해 달아났다. 노옥희는 그때 처음으로 노동자의 힘을 봤다.

그해 8월 말, 노옥희는 장태원 소장과 함께 '집시법'과 '노동쟁의조정법'의 3자개입 금지위반으로 구속됐다. 12월 31일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으로 장태원 소장과 함께 석방됐다. 그이는 다시 노동자들 삶 속으로 들어갔다.

평생의 반려자 천창수

어느 날 노옥희는 현대중전기 노동자 천창수를 만났다. 그는 전두환 정권 시절 사범대학을 졸업했는데 박정희 정권 시절에 유신에 반대하다 구속된 전력이 있다는 이유로 발령을 받지 못했다. 천창수는 정수직업훈련원을 다녀 전기 기능사 자격증을 따서 1982년에 현대중전기에 위장취업했다. 천창수의 선배 유상덕 선생이 "노옥희 선생을 만나보라"고 했지만 천창수는 대학 졸업 사실을 숨기고 현장에 취업한 상태라 함부로 누굴 만날 형편이 되지 못했다.

울산에 내려온 지 6개월 만에 천창수가 노옥희를 찾아왔다. 그 뒤 천창수는 노옥희가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할 때 많은 도움을 주었고, 현대그룹 각 사업장에 노동조합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모아 소모임을 같이 진행하면서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때는 먹지를 깔고 타자로 쳐서 등사기로 밀어 홍보물을 만들던 시절이었다. 타자기를 이용하기 전에는 먹지를 밑에 깔고 손으로 글씨를 썼는데 필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왼손으로 쓰기도 했다. 주로 노옥희 자취방에서 작업을 했다.

노옥희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때 노동쟁의조정법의 3자개입금지 위반으로 구속됐을 때였다. 그때 천창수의 선배인 배남효가 천창수에게 "노옥희 선생이 면회를 기다리더라"고 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해 면회를 오게 되면서 그전과는 다른 관계로 발전했다. 노옥희는 말했다.

"결혼을 한다면 '이 사람과 하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항상 상대방을 존중해 주는 그의 태도를 보면서, 운동을 하면서도 남아 있던 열등감을 극복하고 자신을 내 긍정하는 힘이 생기게 되었다."
 
1989년 1월에 올린 민중 혼례식
 1989년 1월에 올린 민중 혼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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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을 일주일 앞둔 날이었다. 현대중공업노조가 파업 중이던 1989년 1월 8일, 천창수는 조합원 18명과 함께 언양 석남산장에 신년 수련회를 하고 있었다. 새벽 3시 30분께 조직폭력배 수십 명이 들이닥쳤다. 마스크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이들은 횃불을 들고 석남산장을 포위한 뒤 방안으로 뛰어들어 이름을 확인하며 각목, 야구방망이, 곡괭이자루로 등, 가슴, 허리 등 온몸을 폭행했다. 이들은 "더 이상 파업에 관여하면 죽여버리겠다"며 카메라와 녹음기를 빼앗고 한 시간 만에 산장을 떠났다.

이 조폭들은 곧바로 새벽 5시 30분께 전하동 '현대그룹해고자협의회' 사무실을 습격해 권용목, 김서호, 배남효, 이용희에게도 테러를 가했다. 권용목은 팔이 부러지는 중상을 당했다. 현대그룹이 계획해 노조 파괴자로 악명 높은, 제임스 리로 불린 이윤섭과 현대엔진 한유동 전무를 중심으로 조직폭력배를 동원해 저지른 일이었다.

이 사건으로 천창수도 허리를 심하게 다쳐 병원에 입원했다. 일주일 뒤, 결혼식을 할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테러에도 굴하지 않는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허리에 보호대를 하고 결혼식을 올렸다. 울산에서 처음 있는 민중 혼례였다. 인천에서 걸개그림과 결혼식 비디오를 빌려왔고, 축시는 백무산 시인이 직접 지어 낭독했고, 축가는 <동지>등의 투쟁가로 대신했다. 결혼식을 마치고는 신혼여행도 가지 못한 채 결혼식 날 아침에 나왔던 동강병원 입원실로 다시 들어가서 결혼 첫날을 보냈다.

"결혼할 당시만 해도 남편은 대학 때 이미 구속된 전력이 있고 또 해고된 상태라 시어머님은 아내인 내가 좀 말려 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노동운동 좀 못하게 해 달라고 말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둘이 한통속이라는 걸 아시고는 오히려 나를 더 원망하기도 했다."

천창수는 결혼 3개월 뒤인 4월 15일 3자개입금지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노옥희는 수배 중이었기 때문에 함께 지내지도 못했다. 천창수가 석방되고 나서는 부부가 신문 배달을 해야 했다. 둘 다 해고자 신분이었기 때문에 수입이 전혀 없었다. 수련회가 있는 날이면 밤을 새우고 새벽에 신문을 돌려야 하는 고달픈 생활이었다. 노옥희는 어린이 책 외판원도 했다. 생계는 그럭저럭 유지했지만 친지의 경조사는 챙길 수 없었다. 천창수는 회사 정문 앞에서 <한겨레>를 팔기도 하고 소식지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복직 투쟁을 이어갔다.

전교조 결성

1989년 5월 28일에 전교조가 결성됐다. 전교조가 결성되자 정부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전교조를 탄압한다. 다른 산업 현장의 노조 결성과는 다른, 우리 사회의 뿌리를 흔드는 사건으로 규정하고 전방위적으로 압박했다. 1989년 7월 9일 '전교조 탄압 저지 및 합법성 쟁취 범국민대회'에서는 참가 교사 2천여 명 전원이 연행됐다. 그 과정에서 울산에는 교사들 20명이 해직됐다. 노옥희는 전교조에서 정책 활동과 연대 사업을 담당했다. '교사가 왜 노동자인가', '왜 교원 노동조합인가'를 이야기하는 홍보물을 만들어, 교사는 물론이고 시민 협의회에 참가한 단체들에게 알려 나갔다.

1천5백여 명의 전교조 해직 교사들은 투사로 단련돼 갔다. 해직 교사들의 복직 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명동성당의 계단에서 천막도 없이 침낭을 덮고 밤을 지새고 정부 종합 청사 앞마당과 청와대 들머리에 기습적으로 난입하기도 했다. 노옥희는 둘째 아이를 임신한 만삭의 몸으로 경찰서에 연행된 적이 있었는데, 경찰서 안에서 신발을 벗어 바닥과 철창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항의를 하기도 했다.

1994년 전교조와 교육부 간에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1994년 3월 해직된 교사들이 모두 학교로 돌아갔다. 정익화 선생도 1년 6개월 만에 복직이 됐다. 하지만 현대그룹 소속 현대학원은 여론도 무시한 채 노옥희를 복직시키지 않았다. 그 무렵 울산이 광역시로 승격되면서 전교조도 경남 지부 울산 지회에서 울산 지부로 분리 승격되었다. 모두가 복직해 유일하게 남은 해직 교사인 노옥희가 울산 지부장을 맡게 됐다. 지금껏 그들을 보좌하는 역할을 했는데 이제 앞에 나서게 된 것이었다. 1999년 전교조가 합법화되면서 드디어 전교조가 현장에 조직적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노옥희는 울산 지부장을 역임할 무렵인 1997년 전태일기념사업회로부터 삼미특수강노동조합과 함께 전태일노동상을 수상한다. 1987년 2월 울산 지역에 최초로 울산노동문제상담소를 개설해 상담소 활동을 통해 노조 건설 지원 사업과, 이후 지역 노동운동 발전에 기여한 바가 크다는 게 수상 이유였다.

"전태일 노동상은 현대공고 교사로 있을 때 '내가 앞으로 어떤 일을 하든 이 아이들에게 힘이 되는 일을 하자'고 결심했던 것처럼 그 뒤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잊지 않도록 하는 힘이 되어 주었다."
 
1988년 전교조 탄압분쇄 집회에 참석했다가 연행되는 노옥희
 1988년 전교조 탄압분쇄 집회에 참석했다가 연행되는 노옥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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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9월, 노옥희는 공립학교인 명덕여중으로 복직됐다.

"함께해 준 조합원들과 지역의 많은 선후배들이 노력해서 이루어진 복직이었다. 복직되어 학교에 가니 전교조 동지들과 지역에서 보낸 축하 화분과 축전, 축하 팩스가 밀려 왔다. 13년간의 해직 생활을 한꺼번에 보상받는 느낌이 들 만큼 감동적이었다."

노옥희는 2000년에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 수석부본부장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그런데 전교조 울산 지부에서 2002년 교육위원 선거에 출마하라고 권유했다. 교육위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이 되면 사표를 내야 한다. 임기를 마쳐도 학교로 돌아갈 수 없다. 교육위원은 당시 무보수 명예직이었기에 현직 교사가 교육위원에 출마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

"13년 만에 어렵게 복직한 학교를 스스로 그만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복잡하고 학교에서 한 사람의 좋은 교사로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육위원이 되어 교육 정책을 바꿔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해 출마를 결심했다. 이런 어려운 결심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전교조 동지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언론에서는 전교조 후보들이 당선되기 어렵다고 했지만 4명을 뽑는 선거에서 쟁쟁한 후보들을 물리치고 당당히 1등을 했다. 정찬모 선생도 강남에서 당선이 됐다. 그동안 보수 일색이었던 울산교육청에 처음으로 진보적인 교육위원들이 등장해 활동함으로써 크고 작은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기 시작했다. 교육위원 첫 임기가 끝나 갈 무렵 2006년 2월 초, 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 울산시장 후보로 출마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온다. 노동자가 중심이 되는 제대로 된 진보 정치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이때의 결정에 대해 후회하느냐고 묻는다면 후회하지 않는다고 대답하겠지만, 그래도 또다시 그 같은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면 아마도 다른 결정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내 인생에 엄청난 변화와 큰 시련을 가져다 준 일이었고, 전교조 선생님들을 비롯해 내게 다른 역할을 기대했던 분들께는 지금도 미안한 마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노옥희는 시장 선거에 출마했지만 당선되지 못했다. 그리고 민주노동당이 분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2008년 2월 3일 민주노동당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심상정 비대위의 당 혁신안이 부결된 뒤, 노옥희는 탈당을 선언했다.

2008년 3월 16일 진보신당이 창당되자마자 노옥희는 진보신당에 입당하고 권유에 못 이겨 울산 동구 국회의원으로 출마했다. 하지만 울산 동구에서 현대그룹의 높은 벽을 넘을 수가 없었다. 결국 승리하지 못했다. 그리고 2010년 노옥희는 다시 시장 선거에 도전했지만 또다시 실패한다. 간발의 차이로 10퍼센트에 미치지 못해 선거비용도 한 푼 보전받지 못했다. 노옥희는 선거 결과에 책임을 지고 위원장직을 사퇴했다.

"혼날 줄 알고 왔는데 왜 혼내지 않아?"

학원 한 번 보내지 않고 키운 딸은 이른바 전액 장학금을 받는 장학생으로 'SKY대학'에 진학했다.

그런 딸아이가 대학 2학년에 막 올라갈 즈음 어느 날 갑자기 남자를 데리고 내려왔다. 결혼할 사람이라고 했다. 부부는 잠깐 말문을 잃었다. 아르바이트 하던 가게의 사장이라고 했다. 딸보다 14살 많은 35살이었다. 게다가 임신했다는 것이다. 그제야 정신을 차려서 '임신했다고 다 결혼하는 것은 아니다', '정말 결혼할 사람인지 더 생각해 보자'고 했다. 딸은 울었다.

"혼날 줄 알고 왔는데 왜 혼내지 않아?"

노옥희와 남편은 한숨이 나왔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딸아이가 임신하고 울산에 내려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임신했다는 말도 못하고 혼자 앓았을 걸 생각하니 노옥희는 그게 더 마음이 아팠다. 부랴부랴 3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주례는 심상정 의원에게 부탁했다. 지금은 그 외손녀가 여섯 살이다. 딸아이는 복학해서 4학년을 다니고 있다.

"비단 자녀 교육만이 아니라 뭐든 저절로 되는 법은 없다. 많은 것을 잃고 얻은 소중한 깨달음이었다. 정성을 들인 만큼 결과가 나타난다는 이치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노옥희의 마지막 꿈

노옥희는 교육을 바로 잡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교육감이다. 그런데 되돌아보니 지역주민이 둘레에 보이지 않았다. 울산 동구에서 30년을 살았는데 어떤 주민은 노옥희가 당연히 울산 시내에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동구 주민들과 만나고 함께하는 과정이 없었던 걸 반성했다.

"그저 옳은 소리만 한다고 사회나 정치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옳은 일을 헌신적으로 하면 당연히 알아주겠거니 생각해 온 것은 나만의 주관적인 판단이었다. 운동으로서의 정치를 넘어서는, 실제 힘을 조직하는 정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구체적으로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도 하게 됐다."

2009년 4월, 노옥희는 주민들 삶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북카페 '삶을나누는 공간 더불어숲'을 열었다. 뜻을 함께하는 노동자, 교사, 장애인부모, 학생, 주부들이 준비 과정부터 참여했다. 신영복 선생이 제호까지 써 줬다. 울산 동구는 울산 시내에서 한참 떨어진 곳이기 때문에 명사 초청 월례 강좌나 청소년 인문 아카데미는 인기 있는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2006년 시장 선거 때 최순영, 심장정 국회의원이 노옥희 후보 지원 유세를 하고 있다.
 2006년 시장 선거 때 최순영, 심장정 국회의원이 노옥희 후보 지원 유세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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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옥희의 지나온 삶은 가시밭길이었다. 하지만 노옥희는 지난 세월을 후회하지 않는다. 교사로서 노동자들과 함께했고 노동자 정치 세력화와 진보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온몸을 바쳤다. 노옥희는 이제 다시 북카페 더불어숲에서 주민들과 함께하고 있다. 주민들과 책을 읽으며, 삶을 나누고,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

현대사를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온 노옥희. 짧은 지면에 그이의 삶을 십 분의 일도 보여 주지 못했다. 그래도 올곧게 살아온 노옥희의 삶을 조금이라도 엿볼 수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글을 맺는다.  
 
지난 2022년  3월 21일 아프가니스탄 특별기여자 자녀들의 첫 등굣길을 함께한 노옥희 울산교육감의 모습.
 지난 2022년 3월 21일 아프가니스탄 특별기여자 자녀들의 첫 등굣길을 함께한 노옥희 울산교육감의 모습.
ⓒ 노옥희 교육감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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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인터뷰와 노옥희가 쓴 책 《이제 다시 시작이다》(폴리테이아, 2011)를 참고해서 썼습니다.이 글은 작은책 2017년 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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