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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고보, 더러는 그의 이름이 생소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 문학사를 공부할 때 아방가르드 문학의 대표주자로서 그의 이름 네 자는 결코 빠지는 법이 없다. 전전(戰前)기에 나고 자라 당시 기억을 지양분 삼아 왕성한 작품을 펼친 이 거장은, 초기에는 전후 만주를 헤메고 가까스로 도쿄까지 돌아왔다.

망명의 기억 등에 기초해 전후파 문학인으로 활동했으나(<끝나는 길의 표지(1948)> 등),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전위 문학인으로 거듭나게 된다.

평론가 하나다 기요테루(花田清輝)가 그의 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이후 두 사람은 함께 50-60년대부터 서구식 아방가르드 문학의 기풍을 일본에서 성공적으로 작품화 해내는데 성공한다.

카프카적 색채를 띄는 초기작 <벽-S.카르마씨의 범죄>, <덴도로카카리야>, <붉은 누에고치> 등에서 실종 모티브 3부작 <모래의 여인>, <타인의 얼굴>, 그리고 <불타버린 지도>를 거쳐 <상자인간>, <밀회> 등의 후기작까지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모두 당대 유행하던 사소설적이고 리얼리즘적인 일본 문단 내부의 상황에서 벗어난 실험적, 혹은 S.F.적 기풍을 선보였다. 자연스럽게 그의 문학은 일본 대내외적으로 상당한 충격을 몰고왔고, 아베 고보의 명성은 세계적인 것으로 발전한다.

'실종 3부작' 의 마지막 작품
▲ 아베 고보, <불타버린 지도> '실종 3부작' 의 마지막 작품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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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야기해 볼 책은 바로 '실종 3부작'이라고 언급한 세 작품 중 가장 나중에 쓰인 <불타버린 지도> 이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이 작품은 자신들의 지도를 잃어버린, 혹은 잃어가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저마다의 굳어진 '일상'을 영위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그 일상의 가치에 대해, 의의에 대해, 존재에 대해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물음표를 던지게 되는 순간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세 그런 물음표를 거두고 다시 평범한 나날을 살아가지만, 그러지 않고 - 혹은 그러지 못하고 - 기존의 지도를 불태워 버리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려지지 않은 길을 향해 자신을 던진다.

작품의 기본 플롯은 다음과 같다. 흥신소에서 일하는 '나'에게 어느날 이유없이 실종되어 버린 자신의 남편을 찾아달라는 아내(의뢰인)의 부탁이 들어온다.

이에 '그'의 흔적을 다방면으로 추적하던 나는, 해결할 수 없는 다양한 의문점들에 봉착한다. 하나하나 풀어보려 할수록 실타래는 계속 얽히기만 하고, 그 과정 속에서 곁에서 추리를 도와주던 이들은 하나 둘 '사라진다'.

역시 마음이 서서히 흐트러져가는 모습을 보이던 주인공은, 추적의 과정에서 괴한들로부터 폭행을 당하게 되고 기억상실증에 걸리게 된다. 이후 '나'는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 못하는 존재가, 즉 또다른 '실종자'가 되어버리고 그 상태로 이야기는 종결된다.

<불타버린 지도>는 순문학 장르에서는 특이하게 탐정소설의 외형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실종의 이유, 범인, 그리고 해결 그 어느 것도 작중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심지어 '그'의 추적 과정에서 만난 이들의 증언과 찾은 증거물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진짜라면 그것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 지도 하나도 언급되지 않는다.

주인공 역시 최종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모든 것이 모호한 회색지대에 감추어져 있다. 그것은 작중의 역할과 주체성이라는 최후의 보루에서도 적용된다. 작품 말미에서 '나'는 실종자로 전환되며 처음 작품이 시작될 때와 같은 배경에 놓인다.

작품이 시작되던 시점에서 '나'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분별해낼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으나, 말미에서는 자신이 누군지도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 극도의 불안상태에 빠져든다.

결국 아무것도 명확히 확인되지 않은 존재인 '그'를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결과적으로는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한 채 '나의 정체성'마저 잃어버리는 것이 아베가 제시한 서사 구조이다. 이는 일차적으로는 읽는 이들에게 혼란과 짜증스러움을 안겨다준다.

일반적인 문학 작품과는 확연하게 다른 양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종자로의 전환'이라는 충격적 반전과 급작스러운 이야기의 종결이라는 두 요소는 독자들로 하여금 책을 덮은 뒤 많은 것들을 반추할 기회를 제공하며, 현대사회에서의 '존재' 자체에 대해 진지한 물음을 던지게 만든다.

크게는 '나' 자신의 개인적 집안사와 의뢰인의 남동생의 존재, 그리고 '그'의 회사 후배 다나카의 존재에서부터, 작게는 추적의 과정에서 마주하는 노숙자, 술집 취객, 스트립쇼를 하는 여인과 같은 다양한 인간군상들까지 작가는 삶의 다양한 모습을 서사 곳곳에 스며들듯 빽빽하게 배치해 두었다.

그 중 단 하나도 제대로 된 자신의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이해가능하게 밝히지 않는다. '그'의 존재마냥 베일에 감싸여 있다. 허나 책장을 넘겨나가며 우리는 그들이 지도를 잃어버린 이들임을 알 수 있게 된다.

그 고통 속에서 '실종' 혹은 '방황'이라는 이름으로 수식된 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독자들은 그 미묘한 분위기에 몰입하게 될 것이다.

너무나 모든 것이 규칙적으로 정돈된 도시 문명 속, 그렇기에 절대 사라질 수 없을 것 같지만 이미 '진짜 나'는 없어진 것 같은 모순된 감정. 그 감정들을 뿜어내고 있는 존재들이 바로 그 회색인간들이기에. 그들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의 우화이기에.

사실 본 소설과 유사한 주제를 소재로 다루는 작품들은 상당히 많다. 그 중 상당히 대중적으로 히트친 것이 다니구치 지로의 만화 <열네 살> 정도일 것이다. 그만큼, 일상에서의 권태와 그로부터의 실존적 고민과 같은 문제는 도시 현대인들에게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지금으로부터 족히 50여 년도 더 이전 시점에 이와 같은 현대적 소재를 뛰어난 완성도의 문학으로 드러내 보였다는 점에서 작가의 역량이 돋보인다. 동시에 <불타버린 지도>가 고전임에도 오늘의 독자들에게도 새롭게 읽히고 충격을 안겨줄 수 있는 문학적 가치가 있음을 증명한다.

일본 문학에 흥미가 있다면, 혹은 현대적이거나 미스테리한 문학을 읽어보고 싶다면 이 책은 일독(一讀)할 가치가 충분하다. 어느덧 자신의 지도를 되새김질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른다.



불타버린 지도 (반양장)

아베 고보 지음, 이영미 옮김, 문학동네(2013)


태그:#아베 고보, #일본 문학, #문학, #불타버린 지도,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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