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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유아대상 영어학원의 내부 모습
 한 유아대상 영어학원의 내부 모습
ⓒ 이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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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영상 속, 예쁜 교복을 차려입은 아이들이 금발 머리 외국인과 교실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초보적인 대화이지만 아이들의 영어 발음이 유창하다. 영상을 보는 학부모들의 눈이 선망의 눈빛으로 빛난다. 나는 지금 유아 대상 영어학원의 입학 설명회에 와있다.

'반일제 이상 유아 대상 영어학원'(아래 유아 대상 영어학원)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처럼 오전부터 하루 3시간 이상 운영하며 영어를 가르치는 학원이다. 흔히 '영어유치원'으로 불리고 있지만 '유아교육기관'이 아닌 학원법의 적용을 받는 '어학원'이다.

사교육걱정 발표에 따르면 2015년 기준으로 서울에 224곳이 있었고, 하루 평균 교습 시간은 4시간 57분(초등학교 기준 하루 7.4교시), 월평균 교습비는 약 89만 원에 달했다. 연간 비용으로 따지면, 4년제 대학의 연간 등록금(평균 667만 5천 원)의 2배에 가까운 비용. 지나치게 비싼 교육비와 100% 영어로만 생활하는 환경 때문에 평범한 학부모들이 쉽게 입학을 결정하지 못하는 곳이다. 나는 왜 이곳에 온 것일까?

일각에서는 빠른 속도로 심화되는 영유아 사교육의 핵으로 언급하기도 하고, 5~7세 유아의 발달 단계에 맞지 않는다고 우려하나, 정작 유아 대상 영어학원의 내부 작동방식은 거의 가려져 있다. 유아 대상 영어학원이 획기적인 외국어 교육 상품인지, 아니면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지난해 말, 유아 대상 영어학원 입학 설명회 세 곳을 방문했다.

내가 방문했던 유아 대상 영어학원 입학 설명회에서 일정한 설명 패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자녀가 살아갈 시대에 영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유아기에 외국어를 배우는 것이 얼마나 효과가 큰지를 강조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각 학원의 프로그램과 일과를 설명하고, 교사진과 식사, 안전 등과 관련된 부분을 언급한 후, 구체적인 등록 절차를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것이다. 이중 설명회에서 가장 긴 시간을 들여 정성스럽게 설명한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영어교육의 중요성과 조기영어교육의 효과성에 대한 부분이었다.

유아 대상 영어학원의 홍보 논리① : '글로벌 시대에는 영어가 중요해'

한 유아대상 영어학원의 교재 전시 모습.
 한 유아대상 영어학원의 교재 전시 모습.
ⓒ 이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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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4차 산업혁명 시대는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보다 훨씬 급변하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2개 국어는 물론 3개 국어까지 하며 글로벌 시티즌이 되어야 하죠." - E학원 00점 원장

"우리 아이들은 대학과 사회에 나가서 영어로 강의를 듣고, 영어로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럽도록 요구받을 겁니다. 우리 어머님 세대에는 영어가 입시와 취업을 위한 도구였지요? 그러나 우리 아이들 세대에 영어는 깊은 사고를 하고 자기 의견을 표현하는 전략적인 도구가 될 것입니다." - S학원 00점 원장

입학 설명회에서 진행자는 우리 아이들은 '글로벌 시티즌'이 되어야 하며, 3개 국어까지도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입시와 취업을 위한 도구를 넘어, 영어로 사고하고 깊이 있는 의사 표현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실제로 학부모 카페 등에 가보면, 유아 대상 영어학원 학부모들은 대학 입시 등을 염두에 두기보다, 자녀가 '글로벌 시대'에 전 세계를 누비며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하는 것으로 보였다. 2018년부터 수능 영어영역 절대평가가 시행되고 영어 특기자 전형이 줄어드는 추세이기에 영어가 대입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지만, 대입의 메리트가 사라지더라도 영어를 잘하면 세계를 무대로 활동할 기회가 커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고 해서 글로벌 시대를 대비한 경쟁력이 생기는 것일까? OECD가 제시한 미래 사회에 필요한 핵심 역량은, 영어 능력이 아니라 스스로 생활하는 능력과 다양한 사람들 속에 섞여 소통하는 능력 등이다. 기업 인사 담당자들이 대졸자에게 요구되는 직업 기초 능력으로 꼽는 것 역시 문제 해결 능력, 대인 관계 능력 등이었으며, 외국어 능력의 중요도는 10개 항목 중 가장 낮았다(한국직업능력개발원, 2007).

김희삼 KDI 연구위원 역시 대기업의 채용 기준에서 영어 능력은 구직자의 인성, 적성 등에 이어 5순위에 불과했다며, 한국 사회의 '영어 과잉'이 심각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결국 외국어 능력이 과거보다 중요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미래 사회의 핵심 역량으로서 외국어가 실체 이상으로 과장된 측면이 있는 것이다.

유아 대상 영어학원의 홍보 논리② : '영어는 어릴 때 배워야 해'

유아 대상 영어학원에서는 글로벌 시대에 영어가 중요하다는 것 외에도 영어를 배우기 위해서는 유아기에 시작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만 3세부터 만 5세가 소리에 대해 민감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큽니다. 그래서 언어는 어렸을 때 하는 것이 가장 좋아요." -E학원 00점 원장

"학령기 아이들이 언어를 배우면 언어를 분석적으로 받아들여서 모국어와 외국어를 구분합니다. 언어를 분석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어요? 분석한다는 거예요. 주어 동사 목적어... 그러나 유아는 언어를 감각적으로 받아들여요. 직관적으로 받아들여요. 뜻으로 받아들이지 분석하지 않아요. 모국어와 외국어의 구분이 없기 때문에 외국어로 사고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 아이들이 두, 세 가지 랭귀지를 할 수 있다는 것." -S학원 00점 원장

"촘스키 언어학자가 말한 것처럼 우리 아이들은 그냥 이중 언어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요." -P학원 00점 교사

입학 설명회에 참관한 많은 학부모는 영어는 어릴 때 배워야 효과적이라는 논리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나 영어는 과연 어릴 때 배워야 효과적일까? 촘스키의 주장은 우리 현실에도 맞는 것일까?

촘스키는 인간에게는 생득적으로 언어습득장치(LAD: Language Acquisition Device)가 있어 선천적으로 언어를 쉽게 배울 수 있으며, LAD는 1~6세 사이에 가장 왕성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이 시기에 아동이 언어 환경에 자연스럽게 노출되기만 하면 몇 개의 언어라도 모국어와 같이 습득할 수 있다고 했다(Chomsky, 1965).

그러나 촘스키를 인용하는 이들이 간과하는 사실이 있다. 촘스키 등의 조기언어교육 연구는 영어를 외국어로서 배우는 환경(EFL; English as a Foreign Language)이 아니라 영어가 지역사회에서 상용되고 있는 상황에서 제2언어로서 배우는 조건(ESL; English as a Second Language)을 전제로 한 것이다(신동주, 2007).

영어를 배우는 결정적 시기가 있다는 것은 미국이나 캐나다와 같은 영어권 국가, 다시 말해 영어를 사용하고 영어에 노출되고 영어로 상호작용하는 환경에서 이루어진 연구로, 우리와 같은 EFL(English as a Foreign Language, 외국어로서의 영어) 상황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선 성인 이후가 영어 교육의 적기

육아정책연구소에서 발표한 '유아 사교육 실태와 개선 방안: 조기 외국어 교육 효과를 중심으로' (2015) 내용으로, 중국어 학습의 효과는 성인에 가까울 수록 컸다.
▲ 연령별 중국어 사전, 사후 검사 차이 육아정책연구소에서 발표한 '유아 사교육 실태와 개선 방안: 조기 외국어 교육 효과를 중심으로' (2015) 내용으로, 중국어 학습의 효과는 성인에 가까울 수록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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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일반적 환경에서는 언제 외국어를 배우는 것이 효과적일까? 최근 육아정책연구소에서 발표한 재미있는 연구 결과가 있다. 만 5세, 초3, 대학생 세 그룹을 대상으로 중국어 학습을 하고 연령집단에 따른 듣기, 말하기, 읽기 능력을 비교해본 것이다. 유아 대상 영어학원 입학 설명회에서 들은 대로라면, 만 5세 유아의 외국어 능력이 더 크게 향상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듣기 영역의 경우 연령에 따른 유의미한 차이가 없었으며, 말하기 영역은 만 5세 유아보다 초등학교 3학년 아동과 대학생들에게서 수업 효과가 더 크게 나타났고, 읽기 영역은 대학생의 수업 효과가 가장 컸다. 결국 외국어 학습은 취학 전 유아에게는 큰 효과가 없을 수 있으며,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 학습의 효과가 충분히 나타나는 것은 성인 이후라는 것이다(육아정책연구소, 2015). 이는 구조적인 학습 환경에서 외국어로서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경우에는 인지발달이 제대로 이루어진 후에 배우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그간의 연구 결과들(Snow, Hoefnagel-Hohle, 1977; Marinova-Todd, Marshall & Snow, 2000; 우남희, 2002 등)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와 같은 EFL(English as a Foreign Language) 환경에서도 부모가 노력해서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에 가깝게 영어 노출 환경을 만들면 학습 효과를 거두지 않을까 하는 학부모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아 대상 영어학원을 다니며 하루에 5시간 이상 영어에 노출되고, 집에서 영어 DVD를 꾸준히 시청하거나 부모와 영어로 대화하며 지냈다고 하더라도,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일상생활의 대부분은 다시 한국어로 이루어지게 된다.

한 유아대상 영어학원의 유치부 졸업자 과정 프로그램이다.
 한 유아대상 영어학원의 유치부 졸업자 과정 프로그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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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 소통할 기회나 필요성이 떨어진 상태에서 영어 사용 능력이 더는 발달하기 힘들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영어 학원에서 내놓는 상품이 바로 초등부 연계 과정이다. 유아 대상 영어학원을 졸업한 아이들이 '영어를 까먹지 않도록' 초등학교 방과 후에 영어 집중 코스를 개발한 것이다. 이 코스를 진행하는 데 유아 대상 영어학원 못지않은 비용과 시간이 든다는 것은, 유아 대상 영어학원에 자녀를 입학시키는 부모들이 쉽게 간과하는 현실이다.

요약하면, 유아 대상 영어학원에서는 '앞으로 영어는 더 중요해질 것이다', '영어는 어릴 때 배우는 것이 효과적이다'라는 두 가지 논리로 학부모를 설득하고 있었다. 그러나 '글로벌 시대'가 될 것이기에 아이들이 영어로 자유롭게 소통해야 한다는 것은 실체 이상으로 과장된 목표에 불과하며, 어릴 때 배우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것은 우리나라와 같은 EFL(English as a Foreign Language) 환경에서는 적절하지 않다.

그런데도 유아 대상 영어학원에 자녀를 입학시키고자 하는 학부모 중에서는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더라도 자녀가 즐겁게 영어를 접할 수 있는 것에 만족하는 이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아 대상 영어학원에서 아이들은 어떤 교과목의 수업을, 어떤 교재로 공부하고 있을까? 다음 기사에서는 유아 대상 영어학원의 커리큘럼과 교재 등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덧붙이는 글 |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보도자료(http://cafe.daum.net/no-worry/1QDs/1182)로도 실린 글입니다.



태그:#유아대상 영어학원, #유아대상 영어학원 입학설명회, #조기영어교육효과, #유아 사교육, #영어 사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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