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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색(色)은 소전에서 보듯, 무릎 꿇은 여자를 뒤에서 올라탄 모양으로 ‘성행위’의 형상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 色 빛 색(色)은 소전에서 보듯, 무릎 꿇은 여자를 뒤에서 올라탄 모양으로 ‘성행위’의 형상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 漢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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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여인이 가난한 죄로 나귀 한 마리와 교환되어 늙은 양조장집 문둥이에게 팔려간다. 가마에 실려 가는 도중에 웃통을 벗은 건장한 가마꾼이 그녀를 납치해 한쪽 팔에 턱 걸치고는 수수밭으로 들어간다. 가마꾼은 수숫대를 짓이겨 둥글게 침대처럼 만들고 젊은 여인을 큰 대(大)자로 누인다. 그리고 자신은 그 곁에 무릎을 꿇고(㔾) 앉는다.

2012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모옌(莫言) 원작의 장이머우((張藝謀) 감독의 1987년 데뷔작 영화 <붉은 수수밭(紅高粱)>의 한 장면이다. 장이머우는 왜 이런 장면을 연출한 것일까. 대지가 왕성한 생명력으로 울창한 수숫대를 키워내듯, 인간이 갖는 원초적인 욕망을 색(色)이라는 글자로 풀어내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 팔을 벌린 사람(人)의 모습인 큰 대자 형상과 무릎을 꿇은 사람을 나타내는 절(㔾)이 위 아래로 합쳐지면 바로 색(色)이 되는 것을 멋지게 영상으로 구현해낸 것이다. 수 천년에 달하는 한 글자의 생성원리를 영화의 한 컷으로 만들어내는 그 아이디어와 영상미가 참으로 놀랍다.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표현하기 위해 색(色)의 한자 생성 원리를 활용한 장면으로 보인다.
▲ 영화 <붉은 수수밭>의 한 장면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표현하기 위해 색(色)의 한자 생성 원리를 활용한 장면으로 보인다.
ⓒ 서안전영제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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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색(色, sè)은 소전에서 보듯, 무릎 꿇은 여자를 뒤에서 올라탄 모양으로 '성행위'의 형상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허신의 <설문해자>에는 '얼굴색(顔色)'으로 풀이하고 있는데, 성적 흥분으로 얼굴색이 변한 것에서 그 의미가 파생된 걸로 보인다.

리안(李安)감독의 영화 <색, 계(色, 戒)>는 인간 내면의 욕망과 그것을 이성적으로 경계하려는, 프로이드식 이드, 에고, 슈퍼에고를 상징적으로 그려낸다. 어쩌면 인간은 원시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이드와 사회화를 통한 자기 검열과 경계의 슈퍼에고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즉 <색, 계>의 중간에 놓인 쉼표(,)인지도 모르겠다.

나라가 기울어질 만큼 빼어난 미모를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은 한 나라를 망한 것이 꼭 한 여인의 잘못 때문이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아니나 다를까 왕조 말기에는 경국지색의 악녀들이 등장하는데, 하(夏)의 말희(妺喜), 은(殷)의 달기(妲己), 주(周)의 포사(褒姒), 춘추시대 진(晉)의 여희(驪姬)가 바로 그들이다. 색을 밝혀 정사를 멀리하고 정사에 탐닉한 왕의 잘못을 아름다운 색을 지닌 여인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모든 권력을 지녔던 위정자의 너무 무책임한 자기변명처럼 들린다.

색은 모든 만물이 갖는 저마다의 욕망이고, 그 욕망의 발현이 곧 하나의 빛깔로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 빛깔은 저마다 하나의 의미로 거듭난다. 결실을 맺어야 하는 꽃의 욕망이 화려한 빛깔로 벌을 유혹하는 것처럼 저마다의 욕망은 저마다의 의미를 품고 빛깔을 내뿜는다. 중국인들에게 붉음은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복을 불러오며, 노랑은 중심을 차지한 선택받은 사람을, 흰색은 죽음, 녹색은 자연을 나타내는 것처럼 말이다.


태그:#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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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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