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너의 이름은.>의 서사는 꽤 사회성이 짙다. 그리고 유려하다.
ⓒ 메가박스(주)플러스엠

관련사진보기


최근 개봉한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을 보면서 이상하게 후쿠시마라는 이름이 입에서 떠나지 않았다. 얼핏 보기에 이 이야기는 재난 속에서의 운명적인 사랑을 그린 로맨스 물로도 보인다. 하지만 매끄러운 표피 속에 일본인 특유의 혼네처럼(本音, 속마음), 넌지시 드러나지만 사회성 짙은 서사가 대단히 유려하게 표현되고 있다.

1000년 만에 한 혜성이 지구에 근접할 즈음, 이토모리 라는 산골 마을에 사는 한 소녀( 미츠하)와 도쿄에 사는 한 소년은(타키) 때때로 바뀐 몸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들은 다른 삶에 익숙해지며 서로의 몸에, 노트에, 휴대폰에 메시지를 적어 보내며, 때로는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어느 날 타키는 미츠하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한 선배와의 엉망진창 데이트를 마치고 문득 그녀에게 하고픈 말이 있어 전화를 걸지만 연결되지 않고 이후로 몸은 더이상 바뀌지 않는다. 몇 년 후 타키는 잊혀가는 기묘한 체험의 실체를 알기 위해 이토모리를 찾아 나서지만, 그 마을은 수년 전 혜성 일부가 떨어져 완전히 붕괴했고, 그 소녀의 가족도 모두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소년은 자신의 기억을 되짚으며 과거의 소녀로 돌아가 마을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과거로 돌아가 과거를 시정한다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너의 이름은.>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너의 이름은.>을 보며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떠올랐다. ⓒ 메가박스(주)플러스엠


이 재난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후쿠시마로 연결되는 고리는 우선 과거로 돌아가 과거를 고치려는 서사 구조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보통 시간 여행이라는 형식으로 등장하는 이런 이야기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후회의 감정에 기대있다. '그때 이랬더라면 내 삶이 달라졌을 텐데'라는 안타까운 마음이 보편적인 공감을 일으키는 원동력일 것이다. 이에 상업적인 맥락에서 판타지를 용인한다면 <백 투 더 퓨처> 시리즈처럼 미래는 자기 뜻대로 바뀌어 있을 것이지만, 근본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열망임이 반영된 좀 더 진지한 이야기들은 <12 몽키즈>처럼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나 버리거나, 드라마 '나인'처럼 현실은 고쳐지더라도 예측하지 못한 변화로 인해 삶은 황폐해진다.

하지만 시간 여행의 이야기를 자세히 생각해 볼수록 자연재해는 그 자체로서 시정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특이점이 도드라졌다. 비록 소녀와 마을 사람들을 구조한다는 이야기를 따르는 것이지만 일반적인 시간여행의 설정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특이점은 다른 설정들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보면 자연재해가 아닌 것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성사건이 일어난 이후 수년 후에도 마을은 다른 자연 재난과는 달리, 복구되지 않고 아무도 살지 않는 불모지로 남아 있다. 이는 물 주변의 마을과(이토모리는 산속 호수 주변 마을이다) 유성폭발의 모습처럼 후쿠시마 원전사고와 상당히 닮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사한 사회적인 배경도 넌지시 드러난다. 미츠하의 아버지는 현직 이장쯤으로 보이는 정치인으로 선거유세 장면에서 동네 사람들의 귓속말로 부패해 있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꽤나 먹였으니까. 여기서야 하는 말이지만'이라고. 미츠하는 그런 아버지를 부끄러워한다. 미츠하의 아버지는 그녀의 친구, 카즈히코의 아버지인 건설업자의 집에서 회합을 하는데 카즈히코는 '썩은 내가 진동하는구먼'이라고 직설적으로 투덜거린다. 토건 세력과 정치권의 유착은 일본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이지만 구조를 해낼 수 있을 것인가의 이야기에서는 별 관련 없는 설정이다.

아버지를 설득하라

미츠하는 사람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아버지를 설득하려 한다. 그것도 두 번에 걸쳐서 말이다. 마을의 전기를 끊고 학교 방송실에서 대피 방송을 전파하지만 결국은 경찰에 발각되기에 아버지를 설득하지 않고서는 마을 사람들을 대피시킬 수가 없다. 설득한다는 것은 의지가 있는 것이고 의지란 바꿀 수 있는 일에 대한 것처럼 이 이야기를 다룬다는 것이다.

이는 정치권에 대한 전반적인 냉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설득하지 않고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현실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후쿠시마 원전사고 조사에서 드러난 도쿄전력과 관료들의 무능함에 대한 온건한 시각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책임에 대한 일본사회의 대처와 상당히 닮아있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관계자 40여 명은 2013년 전원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일반 시민들로 구성된 검찰심사회의 재청 때문에 3명의 경영진이 2016년 2월에서야 강제 기소되었다. 이는 시스템의 혁신적 변화를 열망할 수 없는 일본사회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다.

미츠하가 아버지를 설득하러 갔을 때 구체적으로 어떤 얘기를 통해 설득하고 있는지는 완전히 생략되어 있다. 설득하고픈 의지만 있을 뿐 그 방법은 명확하지 않다. 이 이야기는 원전 사고라는 재난에 대처하는 일본사회의 태도를 아주 현실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언뜻 보기에 지나치게 타협적인 태도가 작가의 태도라고 보기에는 힘들 것 같다. 그보다는 일본의 사회 시스템과 원자력 사고라는 특수성이 결합한 교착상태에서(지진과 쓰나미라는 자연 재난의 알리바이도 추가된) 일본인들이 보여주는 내면적 적응 양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후쿠시마는 표면적으로 그럭저럭 수습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미 방사능은 누출되어 버렸고 반감기가 수만 년에 이르는 원자력의 물질의 특성상 완전한 수습은 있을 수 없어 보인다. 도쿄전력과 관료에 대한 불신으로 피해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기조차 힘들며 피할 방법도 마땅치 않다. 오염물질에 의한 질병도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나타날 일이라 지금의 발병자만으로 그 영향을 판단할 수도 없다. 어찌 생각해보면 후쿠시마는 수습된 것처럼 믿지 않고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사안이기도 하다. 보이지 않는 공포를 일상화시킬 수는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후쿠시마는 마치 천 년 만에 돌아온 혜성의 파편이 마을에 추락한 것처럼 돌아오곤 한다. '눈을 뜨고 나니 왠지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눈을 뜨고 나서도 왠지 마치 무언가 잊었다는 감각만이 오래 남는다' 타키는 그녀의 이름조차도 자꾸 기억이 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심으로 잊으려 하기 때문이다. 감독은 일본 사람들의 '무언가 잊고 있다'라는 감각을 더할 나위 없이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이 영화의 일본에서의 기록적인 흥행몰이에는 이러한 의식을 날카롭게 포착하면서도 그 망각이 의미하는 것의 실체를 조심스럽게 그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에게 메이와쿠(迷惑) 문화라는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극도로 삼가려 하는 습성이 있다. 그중 하나가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다테마에(建前. 겉으로 내세운 것)와  혼네(本音, 실제의 마음)이다.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거나 아주 조심스럽게 드러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상징체계는 그야말로 이 둘 사이의 긴장처럼 구성되어 있고, 작가는 매우 능숙하게 그사이를 조율해 내고 있다. 실타래처럼 얽힌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불현듯 작가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잊으려는 당신을 이해한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너의 이름은.>

<너의 이름은.>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말한다. ⓒ 메가박스(주)플러스엠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ㅍㅍㅅㅅ>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너의이름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서사 의존적인 인간의 삶과 사회, 그리고 아름다움에 관심이 많습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