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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기사] TV 나온 '착한 짜장면' 또 망했다

그러나 현실은 역시 냉혹했다. 그들이 내민 계약서 초안은 처음부터 끝까지 갑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역시 냉혹했다. 그들이 내민 계약서 초안은 처음부터 끝까지 갑을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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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재오픈하면서 자연주의를 완성했다. 모든 농산물을 유기농으로 바꾸고, GMO를 완벽하게 Non-GMO로 바꾸고 나니, 재료비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인공조미료 대신 천연재료로 감칠맛을 내야 하는지라 원래부터 재료비가 만만찮았는데, 이제는 가격을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짜장면은 5천 원에서 8천 원으로, 짬뽕은 8천 원에서 1만 원으로 올렸다.

그러나 이 또한 패착이었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으라고 하거늘, 우리는 꿈만 야무졌지 주변 환경이 어떤지 자본주의적 계산 능력은 제로에 가까웠다. 짜장면 8천 원과 짬뽕 1만 원이 먹히려면 강남이나 분당 또는 꽤 규모가 있는 호텔로 가야 한다는 걸 망해가면서 겨우 깨달았으니 말이다.

그만큼 짜장면과 짬뽕은 맛과 모양에 이어 가격에까지 고정관념이 뿌리 깊은 음식이다. 남편은 힘들 때마다 왜 하필 짜장면을 시작해서 이 고생인지, 그것도 자연주의 짜장면을 해서 중간에 포기도 못하고 오기로 버티는 바람에 더 고생인지 후회한다. 다른 음식, 일테면 한식을 했더라면 크게 성공은 못해도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을 거라고 후회한다. 나도 그리 생각한다. 그러나 누구를 탓하나? 남편님, 당신이 마라도에서 산 탓이지. 우리 가게 이름이 달리 '마라도에서 온 자장면집'이냐고.  

그런데 호주에 이민 간 페이스북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한국에서 식당을 한다는 게 참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유럽이나 호주는 외식비가 무척 비싸다고 한다. 기본이 8천 원이고, 1만 원, 2만 원짜리 음식도 흔하다. 일반 짜장면도 한 그릇에 15달러나 한단다. 한국에서는 지금도 3천5백 원짜리가 있는데 말이다. 우리 가게의 자연주의 짜장면이라면 20달러, 그러니까 1만8천 원 정도는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지금 고작 6천 원 받는 짜장면을 말이다.

아, 허리가 푹 꺾인다. 음식값이 이러니 직원을 쓸 엄두도 못 내고 우리 부부 둘이서 하루 10시간이 넘는 고강도 노동을 쉬지 않고 해도 모으는 돈은 얼마 되지 않는다. 수익의 많은 부분이 대출이자와 월세로 살점 떨어지듯 떨어져 나가고, 생활비로 또 큰돈이 나가고 나면, 돈 모아서 내 가게 한 평, 내 땅 한 뙈기 마련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호주에서 음식값이 비싸도 식당들이 돈을 잘 버는 까닭은 주요 고객인 노동자들의 주머니가 빈약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주권을 취득하기 전까지는 코피 터지도록 열심히 노동해야 하는데, 그 대가로 주당 1백만 원을 번다. 그렇게 한 달에 4백~5백만 원을 버니까 한 끼 식사에 1만~2만 원을 내도 괜찮은 거다. 노동자가 곧 소비자이고, 소비할 돈이 있어야 내수가 살아나고, 일자리도 생긴다.

호주에서 가장 월급이 높은 직업은 광부다. 의사, 변호사 같은 전문직보다도 높다. 물론 세계 불황의 여파가 호주에도 불어 닥쳤지만, 한국에 비하면 천국이다. 한국에서 '쎄가 빠지게' 일하는 것의 반만 해도 식당을 3개씩 4개씩 확장할 수 있다고 한다. 진심 부럽다. 진심 억울하다. 한국은 해마다 오른다는 시급 수준이 고작 몇백 원이다. 이 증가율로 가자면 10년 뒤에나 1만 원이 될까 말까다.

방송 탄 후, 동업 제안 이어졌지만...

이런 지옥 같은 한국에서, 그 천국 같은 호주에서도 어렵다는 자연주의 식당을 하는 마당에 위치 선정에도 실패, 가격 책정에도 실패, 방송사의 배신까지, 이래저래 망할 요인만 쌓여갔다. 결국, 재오픈 후, 1년 3개월 만에 백기를 들었는데, 그 짧은 동안에도 또 황당한 사건들이 있었다.

<먹거리 X파일>에 방송이 나간 직후부터 동업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처음 전화로는 방송 잘 봤다, 감동 받았다, 도움을 주고 싶다, 로 시작하지만, 정작 만나서 얘기해보면 어떻게 우리 기술을 빼내서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할 것인지가 유일한 목적이었다. 그러나 누군가 만나자고 할 때마다 우리에게도 키다리 아저씨 같은 사람이 나타나는 게 아닐까 하는 순진해 빠진 기대감에, 준다는 도움은 받아야 도리지 하는 합리화까지 중무장해서 만나곤 했다. 남는 것은 늘 자괴감과 자책감, 그리고 핏줄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믿지 말라는, 약육강식이라는 자본주의의 생존법칙에 대한 재확인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일화 하나만 끄집어 내보자. 제주시 영업을 시작한 지 서너 달 되었을까, 서울이라면서 전화가 와서 동업 운운하길래 그동안 댁 같은 전화 많이 받았다, 그러나 전혀 생각이 없다고 잘라 말했더니, 자신이 속해 있는 회사는 다르다며 소개를 하더라. 그 회사는 유명한 캐릭터 전문 기업이었다. 캐릭터 이름은 들어도 모르겠더니, 인상착의를 설명하자 어디선가 본 적은 있는 캐릭터였다. 찾아보니 규모가 꽤 큰 중소기업이었고, 대표 캐릭터 외에도 아이들 TV 만화로도 나온 캐릭터도 있었다. 그 정도면 이번엔 뭔가 다르겠구나 싶어서 몇 번의 통화를 더 했고, 그 후 사장과 함께 우리 가게를 두 차례 찾아왔다.

술상 봐 놓고 늦게까지 얘기를 나누다 보니,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 부부와 비슷한 생각이 많았다. 캐릭터를 직접 개발해 젊은 나이에 승승장구 성공을 했는데, 유기농에도 관심이 많아 원래는 회사 건물 지하에 유기농 매장을 열고 싶어 알아보던 중에 우연히 우리 가게를 알게 되어 그 자리에 짜장면집을 열고 싶어졌다고 했다. 우리에게 무척 호의적이었고, 동업의 조건도 우리를 상당히 배려해주려는 대목이 많았다. 결국, 우리는 동업 제의를 받아들여 그 회사에 직접 가서 매장 자리를 둘러보고, 계약서 초안을 검토하기로 했다.

호의적이던 동업 제안, 현실은 역시...

위치는 강남이었으며, 매장은 넓고 세련되었다. 평택에서 가게를 옮기기로 했을 때 우리 음식이 가장 잘 팔릴 곳으로 강남을 1순위로 꼽았지만, 현실적인 조건과 심리적인 거부감 때문에 포기했던 걸 생각하면, 욕심을 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가 기술만 투자해서 동업회사를 만들고, 그 수익을 나눠 갖는 것이 조건이라면 이만한 기회가 다시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역시 냉혹했다. 그들이 내민 계약서 초안은 처음부터 끝까지 갑을 위한 것이었다. 원천 기술을 가진 자가 갑이어야 하거늘 천민자본주의 나라에서는 역시 돈을 쥔 자가 칼자루를 쥔 자였다.

우리는 계약서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면서 충격을 추스르지 못했다. 우리가 제주에서 서울까지 먼 걸음을 한 이유는 그들과 동등한 파트너십을 만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제주에 찾아와 그런 말을 했고, 그런 제스처를 보여주었다. 우리가 쉽게 마음을 열지 않자 동업 외적인 이야기에도 많은 공을 들였고, 우리는 그것을 정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계약서는 야누스의 두 얼굴처럼 달랐다. 가장 충격적인 대목은 계약 기간이 끝난 후에 모든 권리가 그들 회사에 귀속된다는 것이었다.

동업하겠다면 동업관계를 반영구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먼저가 아닌가? 그러나 그들은 동업 기간조차 정하지 않은 동업관계가 끝난 그다음의 일에 더 관심을 보였으며, 너무나 당연한 듯이 자신들이 모든 권리를 다 가진다고 적시해 놓았다. 수많은 '갑질' 사례에서 단물 쓴물 다 빼먹고 나면 헌신짝 버리듯 을을 내치는 일, 원천 기술을 다 빼냈다 싶으면 계약 파기도 서슴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우리 역시 그런 경우를 당할까 봐 여러 건의 동업 제의를 뿌리쳤지만, 적어도 그들만큼은 다를 거라 믿었다. 하지만 나라 전체 시스템이 부당하게 돌아가는데, 의도했든 안 했든 그 부당한 시스템 덕을 보고 돈을 번 자들이 부당하지 않게 을을 대하는 일은 혁명만큼이나 어려운 모양이었다.  

문제투성이 계약서, 뭐가 문제냐고?
      
그들 눈에는 우리가 뭘로 보였을까? 비록 우리가 돈 버는 머리가 트이지 않은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들이라 해도 어떻게 그런 계약서에 사인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계약서도 제대로 못 읽는 멍청이로 본 걸까? 우리는 계약서에 줄을 그어가며 그 모멸감을 삭이려고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물어보았다. 그 초안을 누가 작성했는지. 그 회사 전속 변호사가 썼다고 했다. 그렇다면 담당자인 부장과 최종 결정자인 사장은 초안을 끝까지 다 읽어나 보았는지 다시 물었다. 물론이라고 했다. 그리곤 이런 질문이 돌아왔다. "뭐가 문젭니까?" 사장이 한 말이었다.

말문이 턱 막혔다. 사장까지 검토를 끝냈고,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그 초안에 대해 내가 첫 항목부터 끝 항목까지 밑줄 좍좍 그은 것을 조목조목 따지는 것은 시간 낭비에 불과했다. 문제가 너무 많아 할 말이 없다고 했다. 사장은 원하는 바를 얘기해야 초안을 수정할 것 아니냐고 했다. 성질 같아서는 그냥 자리를 박차고 나오고 싶었으나, 그런데도 미련이 남았는지 초안을 내가 다시 써서 보내겠노라고 했다. 그때 다시 처음부터 이야기하자고 했다.

그렇게 서울행은 아무 소득도 없이 끝났다. 제주로 돌아와 지인에게 상담도 해가면서 여러 날을 궁리해 보았다. 그 지인은 갑의 처지에 선 회사에서 체인점 개설 담당자로 일했다. 그러니까 회사를 대신해서 수많은 갑질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애초에 동업일랑 생각을 말라고, 이 세계가 얼마나 더러운지 말도 못한다고 강변을 했었다. 그런데도 우리 처지가 너무 곤궁하다는 것도 잘 알았기 때문에 정말 좋은 조건이라면 하라고 응원도 해주었다.

그 초안 얘기를 들은 지인은 역시 '착한 갑'은 없다며 당연한 거라고 했다. 우리 쪽에서 다시 초안을 쓰고, 최대한 우리를 보호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서 계약서를 완성한다 해도, 갑은 어디에서라도 구멍을 찾아내어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계약 파기를 시켜 우리의 모든 것을 가져갈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 지금까지 자기가 해 온 일이라며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동업은 포기하고, 다른 제안을 했다. 기술 이전을 해주고 육지 판권을 팔겠다고 했다. 다만, 우리는 제주에서 이 가게를 유지할 테니, 제주에만 체인점을 내지 않으면 된다고 했다. 판권료로 10억을 불렀다. 물론 협상용이라서 큰 금액을 부른 것이다. 그들이 이 음식의 가치를 얼마나 쳐주느냐에 따라, 그들이 영업에 얼마나 자신 있느냐에 따라 협상가가 결정될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돈이 절실했다. 평택에서 진 빚이 억이 넘었고, 재오픈도 역시 빚으로 시작했다. 육지에서 우리 음식이 다른 이름으로 전국 체인점을 넓혀가는 일이 가슴 아플 게 뻔했지만, 까짓거, 눈 딱 감고 포기 못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우리 힘으로 체인점을 낼 재간도 없었고, 궁극적으로는 제주에서 농사를 지으며 정착하는 게 목표였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며칠이 흐른 뒤, 없었던 일로 하자는 대답이 돌아왔다. 몇억이라도 줄여서 한 번이라도 협상을 해보자고 할 것이지, 단번에 팽팽하게 쥐고 있던 줄을 놓아버리다니, 김이 팍 샜다. 그 정도까지는 우리 음식이 가치가 없다고 본 모양이었겠지만, 그 회사 연매출 규모에 따르면 10억은 아무것도 아닌 돈인데, 왜 일언지하에 거절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렇게 해서 몇 달을 오가던 동업 이야기는 싱겁게 끝이 났다. 지인의 말대로 동업을 시작했다가 더러운 꼴 안 보고 끝난 게 천만다행이라고 위로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일은 훌훌 털어버리면 그뿐인 그저 그런 에피소드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경제매거진 <이코노믹리뷰>에도 함께 실립니다. 이 이야기는 2013년에 일어난 일이며, 현재 '마라도에서온자장면집'은 평택이 아니라 제주도 화순에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자연주의짜장면, #착한식당, #마라도에서온짜장면집, #NO-MSG, #NON-G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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