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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머니가 물었다. "왜 쟤랑 결혼했어?"
 할머니가 물었다. "왜 쟤랑 결혼했어?"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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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홍천군 남면에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게 있었다. 적당한 규모의 마트, 천오백 원짜리 김밥을 파는 분식집, 이천 오백원짜리 아메리카노를 파는 아늑한 커피숍. 마트와 분식집과 커피숍을 번갈아가며 들락거리는 동안, 내 몸은 오랫동안 잊고 지낸 휴식이란 걸 기억했다. 그렇게 이틀. 한껏 무거워진 몸을 겨우 끌고 모텔을 나왔다. 가자. 남면부터는 횡성을 향해 걷는다.

"횡성에는 뭐가 유명한 줄 알아?"

작은 천을 따라 걸으며, 내가 물었다.

"뭔데?"
"한우."


여행을 떠나기 전, 우리는 '행동강령'이란 걸 적었다. 술을 마시지 않겠다느니, 하루에 3만 5천 원만 쓰겠다느니 등 전혀 지켜지지 않는, 그래서 더는 들여다보지도 않는 메모들. 횡성에 가면 행동강령 중 하나를 꼭 지키려고 한다. '각 지역 유명음식 먹어보기'. 한우를 먹을 건수가 생겼다. 우리는 말없이 입술을 씰룩댔다.

이틀 후면 추석이다. 쉬지 않고 꼬박 이틀을 걸으면 추석 당일에 맞춰 횡성 시내에 도착할 수 있다. 하루 예산이 3만 5천 원인 걸 감안하면, 7만 원은 족히 나올 한우는 부담스러운 식사다. 그러나 무조건 먹을 것이다. 그게 우리의 행동강령이니까. 그리고, 풍성한 한가위에 평소처럼 에너지바만 씹을 순 없으니까.

 동네를 배회하는 개. 너도 배고프니?
 동네를 배회하는 개. 너도 배고프니?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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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터처럼 녹아버린 머릿속

오늘은 해가 유난히 뜨겁다. 배낭은 두 배 더 무겁다. 다리는 세 배 더 당긴다. 2주간 매일 신어온 트레킹화는 새 신발처럼 걸리적거린다. 이틀 동안 쉰 탓이다. 내가 스포츠 선수거나 에베레스트 정상을 오르는 등반대원이라면 이 정도 고생쯤 무시해버리겠지. 하지만 나는 나다. 역경을 딛고 일어설 줄 아는 스포츠 선수도 아니고 에베레스트 등반대원도 아닌, 서울에서 드문드문 직장생활을 하다 월세방을 빼고 강원도 어디쯤을 걷고 있는 서른 넘은 여자. 입 안에서 욕이 몽글몽글 돋았다. 가득 차버린 욕을 뱉어내려는 찰나, 오르막길 도로가 등장해 내 말문을 막아버렸다.

지금껏 걸어본 길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국도. 인적 없는 시골길. 차 많은 2차선 도로. 뱀 나오는 야산. 그중 최악은 차 많은 2차선 도로다. 그 다음은 지금 걷고 있는 오르막길 도로다. 지쳐 쓰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살짝 경사진 길. 걸어도 걸어도 회색 아스팔트 도로뿐인 지루한 풍경. 나무 한 그루 없이 받아내야 하는 잔인한 태양. 나는 횡성을 떠올렸다. 횡성에 가자. 한우를 먹자.

 쉬지 않고 꼬박 이틀을 걸으면 추석 당일에 맞춰 횡성 시내에 도착할 수 있다. 횡성에 가면, 한우를 먹어야지.
 쉬지 않고 꼬박 이틀을 걸으면 추석 당일에 맞춰 횡성 시내에 도착할 수 있다. 횡성에 가면, 한우를 먹어야지.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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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보인다. 젊은 남자 둘. 길을 가운데 두고 세워진 각각의 오토바이에 비스듬히 기대어 우리를 쳐다본다. 나는 조금 멋쩍어져서 고개를 살짝 숙인다. 두 남자 사이를 걷는다. 남자들의 시선이 우리를 위, 아래로 훑는다.

마을의 끝은 굴다리. 굴다리 위에 집 한 채. 마당에 주차된 승용차 뒤로, 바다처럼 파란 원피스를 입은 꼬마 여자아이가 고개를 내민다. 나는 아이에게 손을 흔든다. 여자아이 곁으로 커다란 산 같은 남자가 등장한다.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아이에게 무언가 속삭인다. 아이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남자의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나는 남자가 닫아버린 문을 바라본다. 문 너머의 것들을 그려본다. 기름 냄새. 뜨끈한 방바닥. 모자람 없이 흘러나오는 TV 소음. 웃음소리.

 횡성 시골길
 횡성 시골길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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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전거와 밭
 자전거와 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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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었다. 머리가 아팠다. 피할 길 없는 햇볕 때문이다. 명절이라는 단어에 담긴 어딘가 촌스러운 느낌, 질척한 기분, 올해는 나 없이 추석을 보낼 엄마 아빠. 그런 것들이 머릿속을 미지근하게 돌아다니다 어디론가 흘러가 버렸다. 아무리 걸어도 변함없는 풍경은 머릿속을 더 멍하게 했다. 머릿속은 아무 냄새도, 형태도, 색깔도 없이 버터처럼 녹아버렸다. 두 다리만 기계적으로 움직인다.

배고파.
밥 먹고 싶어.

걷다가 식당을 발견하는 건 환상적인 일이다. 식당에 들어가면 배낭을 내려놓을 수 있다. 땀에 찬 신발도 잠시 벗을 수 있다. 근육통에 시달리는 두 다리를 쉴 수 있다. 차가운 정수기에서 강같이 마르지 않는 물을 마시고 또 마실 수 있다. 그중에 제일은 밥을 먹는 행위다. 따끈하고 고슬고슬한 밥. 알싸한 된장찌개. 달달한 진미채와 시큼한 열무김치. 한식당은 도보 여행자에게 있어 최고의 식당이다. 뭉친 근육도 풀고 밥을 먹고 수분을 충분히 섭취한 후, 계산대 옆 미니 자판기에서 공짜 커피까지 뽑아 마시고 나면 인당 6천 원이라는 값을 치르는 게 염치없다는 생각까지 드니까.

그러면 뭐하나. 식당이 나와야 말이지.

식당은 하루에 한 개 마주칠까 말까다. 오늘 12시 무렵 식당이 세 개나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우리는 아침을 먹고 출발했다는 이유로, 조금 늦은 점심을 먹는 게 좋겠다며 아이스크림만 한 개씩 빨고 마을을 지나쳤다. 대체 무슨 자신감이었을까. 한 시간 후에 배가 고파졌다. 그 후 세 시간 넘도록 배고픔에 절은 휴짓조각처럼 흐느적대며 걷고 있다. 역시 기회는 눈앞에 있을 때 잡아야 한다.

 12시 무렵 식당이 세 개나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우리는 아침을 먹고 출발했다는 이유로, 조금 늦은 점심을 먹는 게 좋겠다며 아이스크림만 한 개씩 빨고 마을을 지나쳤다.
 12시 무렵 식당이 세 개나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우리는 아침을 먹고 출발했다는 이유로, 조금 늦은 점심을 먹는 게 좋겠다며 아이스크림만 한 개씩 빨고 마을을 지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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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당이 있는 마을 시동리
 식당이 있는 마을 시동리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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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 식당 아냐?"

더스틴이 말했다. 식당인가? 식당이다! 홍천보다 횡성에 가까워졌을 무렵이었다. 3대째 내려오는 막국숫집. 고집스럽고 오래된 분위기가 흐르는 집이었다. 우리는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앞을 서성였다. 메뉴 때문이었다. 막국수. 막국수라면 춘천 초입에서부터 질리게 먹었다. 반나절 굶고 걷기만 한 지금 이 상황에서도 마다할 정도로 질리게.

빈속으로 두 시간을 더 걸었다. 막국수라도 먹을걸. 역시, 기회는 눈앞에 있을 때 잡아야 한다. 까다로움은 여러 개의 선택지를 가진 자에게만 허락되는 성질이다. 2km 앞에 휴게소가 있다는 표지판이 보였다. '휴게소'라는 단어 아래 숟가락 하나, 젓가락 한 쌍이 나란히 그려져 있다. 2km면 40분 안에 걸을 수 있다.

멍한 머릿속에 휴게소의 이미지를 주입해봤다. 깔끔한 푸드코트. 한식, 분식, 일식, 중식으로 분류된 메뉴. 식권을 사고 조금 기다리면 청량하게 울리는 벨 소리. …. 흐뭇하군. 가격대비 가장 배부르고 만족스러운 한 끼를 먹자. 돈가스? 비빔밥? 아니, 돈가스랑 우동이 같이 나오는 세트를 먹겠다. 추석이니까 특별히 식후 핫바도 한 개 사 먹고. 커피도 한 잔 마셔야지. 버터처럼 녹녹하던 머릿속이 40분 후 찾아올 만족과 평온함을 떠올리며 일렁였다.

 2km 앞에 휴게소가 있다는 표지판이 보였다. '휴게소'라는 단어 아래 숟가락 하나, 젓가락 한 쌍이 나란히 그려져 있다.
 2km 앞에 휴게소가 있다는 표지판이 보였다. '휴게소'라는 단어 아래 숟가락 하나, 젓가락 한 쌍이 나란히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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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게소의 노란 간판이 보였다.

"건너편이야…."

절망에 찬 나의 흐느낌. 바로 앞에 있는 휴게소인데, 도로 때문에 갈 수 없다. 건너편으로 가려면 가드레일을 넘어야 한다. 가드레일을 넘는 동안 차라도 쌩하니 달려오면 사망이다. 좀 더 안전한 길은 500m를 되돌아가 굴다리로 길을 건넌 후, 500m를 반대로 다시 걷는 방법이다. 즉, 눈 앞에 휴게소를 두고 1km를 더 걸어야 한다. 부산까지 800km를 걸어가는 마당에 고작 1km가 뭐가 그리 큰 문제겠느냐마는, 오늘은, 지금은, 매우 큰 문제다. 너무 배가 고프고, 너무 덥고, 너무 힘들어서.

 바로 앞에 있는 휴게소인데, 도로 때문에 갈 수 없다. 건너편으로 가려면 가드레일을 넘어야 한다.
 바로 앞에 있는 휴게소인데, 도로 때문에 갈 수 없다. 건너편으로 가려면 가드레일을 넘어야 한다.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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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없잖아."

더스틴이 말했다. 그래, 밥을 먹어야지. 우리는 울분을 꾹 참고 길을 되돌아갔다. 그렇게 30분 후, 노란 간판 아래 섰다. 내 상상 속에서 일렁대던 거대한 휴게소의 모습은 아니었다. 푸드코트처럼 생긴 테이블이 많은 공간은 영업을 종료했는지 커다란 자물쇠로 문이 잠겨있었다. 다행히 그 옆에 매점이 열려 있었다. 메뉴는 돈가스와 우동, 두 종류. 한식, 양식, 일식, 분식 중에서 고를 수 있는 선택의 기쁨 같은 건 없었다. 그래도 낙심하지 말자. 먹을 수 있는 게 어디야. 막국수가 아닌 게 어디야.

"죄송한데, 오늘은 차례 준비 때문에 햄버거밖에 안 돼요."
"…."


돈가스 1인분과 우동 1인분을 주문하는 나에게, 계산대 뒤에 선 남자가 늘어놓은 대답은 이따위였다. 나는 벙쪄서 아무 대답도 못 한 채 자리에 주저앉았다. 휴게소 안에는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기름 냄새가 가득했다. 여자 셋이 TV를 마주 보고 앉아 전을 부치고 있다. 손님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차례상을 준비하는 며느리들이다.

사장 할머니는 부엌에서 커다란 냄비에 담긴 국물 간을 맞추고 있다. 풍성한 한가위 보내세요! 분홍색 한복을 차려입은 TV 속 아역 배우가 소리쳤다. 우리는 하나도 안 풍성한데. 명절이면 늘 먹을게 넘쳐났는데, 오늘은 종일 굶으며 뙤약볕 속을 걷고도 밥 한 공기 먹기가 어렵다. 막국수를 마다하고 두 시간을 더 걸은 터라, 햄버거를 거절할 여유는 없었다. 뭔가 패배한 기분으로 햄버거 하나와 과자 한 봉지를 샀다. 추석 별미다.

 식당이 있는 시동리 마을
 식당이 있는 시동리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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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동리
 시동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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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가득한 창가에 앉아, 싸구려 인스턴트 햄버거와 과자 부스러기를 우울하게 씹었다. 힘없는 두 눈은 매점 안에 제멋대로 풀어뒀다. 젊은 남자 두 명이 서성대고 있었다. 하나는 계산대 앞에 서 있는, 우리에게 팔 수 있는 게 고작 햄버거뿐이라고 말한 그 남자다. 다른 한 명은 선 채로 TV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 그림 나온다. 사장 할머니 아들들이다.

8년 전 미국에 가지 않았다면, 더스틴을 만나지 않았다면, 만나는 과정에서 뭔가 잘못되었더라면. 어떤 작은 우연이라도 들어맞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나도 지금 이 시각, 저 세 며느리처럼 어느 지방 소도시에서 전을 뒤집고 있었을지 모른다. 전을 부치고, 산적을 구워내고, 나물을 무치고, 저녁을 두 번 차려내고, 술상을 봐오고, 화수분처럼 계속 나오는 설거지를 하는 동안 TV 소리는 계속 귓가를 맴돌고.

나쁘지 않네.

나는 전을 부치며 TV를 보고 있는 세 며느리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배는 안 고프겠지. 나는 밥이 먹고 싶다. 방금 밥을 먹었는데 밥을 내오고 또 내오는 고모들 때문에 괴로워하고 싶다. 하지만 지금의 난, 밥을 먹기는커녕 햇볕에 정수리를 뜨끈히 지지며 멍하니 도로 위를 걷는 신세다.

명절 전야에 시댁으로 끌려가 온종일 음식과 설거지를 해야 하는 신세는 면했다만, 그런 신세인 저들은 적어도, 에어컨 나오는 가겟방에서 기름기 가득한 더부룩한 배를 고통스러워할 수 있지 않은가. 추석날 시댁도 아니고 친정도 아닌 길바닥에서, 나만큼이나 미친 남편과 함께 하염없이 걷고 있는 건 내가 선택한 길이지만, 지금도 그 선택을 바꿀 생각은 없지만, 오늘만큼은 모르겠다.

오늘만큼은, 시어머니 잔소리도 좋고 애 울음소리도 좋고, 도대체가 도움이 안 되는 남편도 괜찮으니, 푹신하고 편안한 의자에 가만히 앉아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온종일 전을 부치는, 그리고 먹는, 한국 어느 소도시의 며느리이고 싶다.

햄버거 반 개로 달랜 속으로 두 시간을 더 걸었다. 돈 쓰고 싶다. 돈 쓰는 거 말고는 기분 전환 방법을 모르는데 젠장, 돈 쓸 구멍이 없다. 예산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왕창 써줄 수 있는데. 비싼 호텔 방 하나 잡아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왜인지도 모른 채 울어버리고 싶은데. 나름 큰 마을인 공근면까지 걸었지만, 비싼 호텔은커녕 작은 여인숙 하나도 없었다. 공근면에 숙소가 없다면 횡성군 전까지는 어림도 없다. 오늘도 야영이다.

"왜 외국인이랑 결혼했어? 저 사람이 부자야?"

 돈 쓰는 거 말고는 기분 전환 방법을 모르는데 젠장, 돈 쓸 구멍이 없다.
 돈 쓰는 거 말고는 기분 전환 방법을 모르는데 젠장, 돈 쓸 구멍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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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햄버거 반 개로 달랜 속으로 두 시간을 더 걸었다.
 햄버거 반 개로 달랜 속으로 두 시간을 더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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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근면에는 식당이 여럿 있었지만 모두 차례 준비로 일찌감치 문을 닫았다. 결국 공근면에서도 점심을, 아니 저녁을 먹지 못했다. 아침에 나눠 먹은 김밥 하나, 점심쯤 먹은 아이스크림 하나가 오늘 식사의 전부다. 이 불운을 오늘 아침에 미리 알았더라면 아마 발도 떼지 못했겠지. 역시 앞으로 닥칠 고난은 모르는 편이 나은 것 같다.

혹시 모를 한 밤의 아사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구멍가게에서 라면과 물을 샀다. 값을 치르고 있는데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밖으로 나가니 할머니 한 분이 거의 소리를 지르듯 말하고 있었다. 할머니의 과격한 삿대질을 받아내고 있는 상대는….

"더스틴!"


어느 나라 사람이야? 여기서 뭐 해? 누구랑 왔어? 할머니의 질문 공세에 더스틴은 침착하게 천천히, 한국말로 대꾸했다. 국토 종단해요. 철원에서 부산까지 걸어요.

"무슨 일이세요?"
내가 나섰다.

"여기서 부산까지 걸어간다고?"
"네."
"집은 어딘데?"
"집이요? 원래 서울 사는데, 지금은 집이 없어요."


1mm가량 더 가늘어진 할머니의 두 눈. 그 안에 담긴 회색 눈동자가 위, 아래로 바삐 움직였다.

"집이 없어? 여기 집값 싸. 여기서 하나 얻지?"
"아 그게 아니라,"
"애기는?"
"……."
"아 애기는?"
"애는 안 낳아요."
"뭐어? 그러면 안되아!"


젠장. 또 시작이다. 명절 연휴에 가족과 친척을 멀리 떠나 낯선 시골 땅까지 왔는데, 우리 엄마 아빠도 하지 않는, 시어머니도 하지 않는 명절 잔소리를 들어야 하나? 다 내 잘못이다. 그냥 조만간 낳을 계획이라고 둘러댔어야 한다. 걷다가 만난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최대 관심사는 우리의 2세 계획이란 걸, 모범답안은 한 가지라는 걸, 진즉에 알고 있었는데 말이다. 골치 아프게 됐다.

 밭일하는 할머니
 밭일하는 할머니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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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횡성 시골길
 횡성 시골길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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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왜 외국 사람이랑 결혼했어?"


할머니가 한 발짝 성큼 다가섰다. 나는 두 발짝 뒤로 물러섰다. 할머니가 다시 한 발짝. 나도 한 발짝. 그렇게 어색하게 왈츠를 추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던 할머니와 나는 타협지점을 찾아 공근면 한복판에 섰다. 왜 쟤랑 결혼했어? 응?

"그냥 살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요."
"왜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외국인이랑 결혼을 했을까? 부자야? 저 사람이 부자야?"
"부자요? 아니요, 부자 아닌데요."


할머니는 암묵의 타협을 어기고 한 발자국 다가섰다. 뽀뽀라도 할 기세다.

"있지, 그거 알아? 이왕 외국 사람이랑 결혼하려면 부자랑 해야 돼. 우리 고모 손녀가 방글라데시 남자랑 결혼했는데. 아 그 사람이 워낙 부자여야지. 결혼해서 그 여자도 잘살게 해 주고, 그 여자 부모 형제도 잘살게 해 주고. 그랬다니까? 지금은 서울서 큰 식당 하면서 떵떵거리며 잘 살아."
"아 네. 좋으시겠어요."
"이왕 외국 사람이랑 결혼하려면 부자랑 해야 혀."
"어쩌죠. 이미 결혼을 해버렸는데."
"에이그. 이왕 하려면 부자랑 해야 하는데."


이 할머니가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건가. 한국 어느 소도시의 며느리이고 싶다는 아까 그 말, 취소다. 나는 더스틴이 내 남편인 게 좋다. 부자가 아니어도 된다. 외국인이어도 상관없다. 나만큼 미친것도 마음에 든다. 이대로가 좋다. 나는 대꾸 대신 바닥에 놓인 배낭을 어깨에 이었다.

 풍성한 한가위
 풍성한 한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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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어디가!"
"가려고요. 여긴 잘 데도 없고."
"아 여기 육교 아래에 텐트 치고 자! 육교 건너편으로 가면 시골 깡촌이야! 아무것도 없어! 여기 이 공근면이 이 일대 중심지인데 무얼. 서울로 치면 뭐냐. 그래 여의도! 공근면은 한마디로 말하면 서울의 여의도야! 내가 여기 20년을 살았다고. 이 동네는 해코지하는 사람도 없고 주정뱅이도 없어. 얼마나 좋은 동넨데. 건너편 깡촌으로 가봐. 민박도 없어. 재워주는 사람이라도 있을 줄 알지? 없어!"
"네 할머니. 추석 잘 보내세요."


더스틴에게 가자고 손짓했다. 우리는 함께 육교 계단을 올랐다. 육교를 건너는 우리를 졸졸 따라오는 할머니의 시선이 느껴졌다. 민박이 없기는 공근면도 마찬가지다. 누가 재워주길 바라지도 않지만, 공근면에도 재워준다는 사람 하나 없다. 시각은 7시 반을 지나고 있었다. 할머니에게 붙잡혀 있는 동안 해가 꼴깍 넘어가 버렸다. 해진 후에는 걷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오늘은 어쩔 수 없다. 저 할머니는 무조건 피하고 봐야 한다.

"저 할머니가, 왜 너랑 결혼했녜. 외국인인 주제에 부자도 아닌 너랑."
"외국인이면 부자여야 하는 거였어? 큰일 났네. 부자 될 계획도 없는데."
"내가 할머니한테 왜 네 욕하냐고 막 화내야 했는데. 똑 부러지게 대답 못 했어. 미안?"


더스틴이 웃었다. 부자도 아니고 부자가 될 계획도, 부자가 될 일도 없는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어두운 밤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경운기 타고 가는 아빠, 딸, 아들
 경운기 타고 가는 아빠, 딸, 아들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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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 남면(양덕원리)에서 횡성 공근면까지 걷기


경로: 홍천 남면 양덕원리 - 시동리 - 유치리 - 횡성 공근면 상창봉리 - 공근리 - 공근면
거리: 약 27.2km
소요시간 : 약 9시간
난이도: 중
추천: ★★★☆☆ (대부분 지방국도를 따라 걷기 때문에 길이 험하진 않지만, 쉴 곳이 없어서 힘들다. 남면에서 멀지 않은 시동리 이후에는 식당을 찾기 어렵다)

경로 소개


홍천 남면 - 시동리


홍천에서 원주로 이어지는 샛길이 있는데, 군에서 만든 비승사격장으로 막혀있다. 횡성 쪽으로 조금 빠졌다가 원주로 갈 수밖에 없다. 샛길은 아니지만, 대부분 지방국도라 차가 많이 다니지 않는다. 가끔 나오는 오르막길 도로는 힘들지만.

시동리 - 유치리 - 횡성 공근면 상창봉리

시동리는 군부대 근처라 식당이 몇 개 있다. 상점, 떡집, 약국 등 필요한 건 다 있는, 당구장까지 있는 마을이다. 여기에서 꼭 밥을 먹고 다시 걸을 것을 추천한다. 우리는 아이스크림만 한 개씩 먹고 걸었다가 이후 식당을 만나지 못했다.

공근리 - 공근면

계속 지방국도를 걷는다. 험한 길은 아니지만 쉴 곳이 없어서 힘들다. 걷다 보면 봉춘막국수가 나오는데 막국수에 질리지 않았다면 꼭 먹고 가길 추천한다. 우리는 먹지 않아서 맛은 모른다만, 이 뒤로도 식당을 찾는 게 쉽지 않으니까.

막국숫집에서 조금 더 걸으면 캠핑장이 있다. 텐트 치는데 3만 원을 받기 때문에 딱히 여기서 쉴 이유는 없다. 조금 더 걸으면 휴게소. 작은 매점인데 돈가스와 우동을 판다. 우리가 갔을 때는 추석이라 햄버거만 팔았지만.

휴게소에서 7km를 더 걸으면 공근면이다. 공근면에는 식당이 몇 개 있고 숙소는 없다. 야영할 게 아니라면 8km를 더 걸어 횡성군 시내로 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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