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욘 A , 린드크비스트 저. 최세희 역. 문학동네
▲ 책표지 욘 A , 린드크비스트 저. 최세희 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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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렛미인>의 작가인 욘 A. 린드크비스트의 소설 <언데드 다루는 법>을 읽기로 작정한 건 별거 없었다. 단지 그가 북유럽 작가라는 것이었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 <킬러 안데르스와 그의 친구들>의 요나스 요나손, <스노우맨>의 요 뇌스베 등이 펼쳐놓은 북유럽 소설의 매력 때문에 평소 좋아하지 않던 장르지만, 집어 들었다. 재미있으면서도 뭔가를 생각하게 하는 결코 가볍지 않은 그런 소설 말이다.

<언데드 다루는 법>은 시체들이 깨어난 스톡홀름 전역에서 혼란에 빠진 인간 군상의 모습을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그렇다고 좀비 영화에서 보아왔듯이 끈적끈적한 피를 뚝뚝 흘리고, 절뚝거리면서도 기괴한 표정으로 달려드는 모습이나 드라큐라 영화의 오싹함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 있다. '레지던트 이블'이나 '워킹 데드'류의 공포를 원한다면 빨리 책을 접는 게 나을 것이다.

<언데드 다루는 법>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좀비, 죽음에서 깨어난 망자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들은 <레지던트 이블>이나 <워킹 데드>의 좀비처럼 공격적이지도 않고, 강시처럼 진한 화장을 하고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요란함도 없다. 그들은 단지 집에 돌아가고 싶어 하는 귀소본능에 충실한 날송장들일 뿐이다.

"말레르는 여자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직감적으로 알았다. 모든 사람이 원하는 바로 그 것.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p.72.

이 정도 되면 언데드(Undead)를 사전은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살피고 가는 게 좋겠다.

"언데드란 신화, 전설, 창작물 등에서 죽었는데 살아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산송장' 같은 존재들이다. 한때 죽었는데 살아있는 것처럼 행동하거나 생명의 특정 징후를 나타내는 초자연적 존재라는 의미로 사용되지만, 이것은 말을 사용하는 이에 따라서 매우 가변적이다. 고스트 같은 무형의 산송장도 있고 흡혈귀나 좀비처럼 형체를 갖고 있는 것도 있다.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산송장에 대한 전승이 존재하며, 현대의 판타지나 호러 장르에서도 빈번히 사용되고 있다." - 위키백과

위키백과가 언급했듯이 현대 판타지나 호러 장르에서 빈번히 사용되고 있는 언데드는 한결같이 공격적이다. 반면 <언데드 다루는 법>은 혐오와 사랑이 공존하는 만남을 통해 인간 내면의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게 한다. 썩은 내를 풀풀 풍기며 푹 꺼지고 초점 없는 눈을 가진 망자가 당신이 사랑하는 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게 한다는 것이다.

그 망자는 당신이 그토록 돌아오기를 빌고 또 빌었던 사랑하는 아내일 수도 있고, 아들, 손자일 수도 있다. 천국을 지배하고, 이 세상을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든 존재 같은 이가 교통사고로 죽었다가 처참한 몰골을 하고 벌떡 일어났다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사람은 사랑하는 이를 쉽게 떠나보내지 못하는 존재임을 주인공 다비드는 이렇게 말한다.

"영안실에서 벌어지는 사태에 대해 들었을 때도 다비드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그 역시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혐오스러웠고, 비현실적이었고, 동시에 논리적으로 합당한 결과였다. 오늘밤 세계가 암흑에 먹히고 말았으니, 죽은 자라고 생명을 얻어 돌아오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p.116.

소설 속에서 주인공들은 사랑하는 이의 격리를 어떻게든 막아보고자 몸부림친다. 깨어난 자들은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고, 검역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전혀 공격적이지 않은 망자들의 인권은 누구 하나 말하지 않는다. 검역 당국자들에게 있어서 깨어난 자들은 '우리'가 아닌 배제할 대상일 뿐이다.

주인공들은 내가 사랑하는 이가 단지 하나의 실험 대상, 신기한 구경거리로 전락하는 것을 방치할 수 없다는 절박함을 보인다. 그래서 작가는 인간 실존에 대해 고민하는 주인공들을 통해 사랑의 한계를 가늠해보고 싶었다며 이렇게 묻는다.

"생전에 사랑했던 사람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 우리는 그들을 어느 선까지 받아들이고, 어떤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작가의 고민은 '뇌사'와 같은 문제에 봉착한 이들에겐 상당히 현실적일 수 있다. 물론 소설에서 말하는 '언데드'가 의학이 말하는 뇌사와 다르긴 하지만, 죽음이란 것이 허용되지 않은 존재들을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 죽음을 종말로 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게 한다는 것이다. 의학이 신진대사의 정지를 죽음으로 정의하고 있다면, 언데드는 죽음을 다시 정의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저자는 생명윤리의 문제가 과학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항변하고 있는 셈이다. 소설 속에서 무신론자였던 플로라의 심경 변화는 작가의 고민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인간은 왜 태어나는 걸까? 무슨 이유로 태어나는 거냐고. 어마어마한 이 수수께끼에 대해 플로라는 완전히 무지했다. 죽음의 과학에 그 문제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플로라는 몇 분 동안 육신의 껍데기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p.431.

나와 다르기 때문에 느끼는 두려움과 혐오, 그 가운데 사랑을 이야기하는 이 책은 공포소설이라기보다는 철학책에 가깝다.


언데드 다루는 법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 지음, 최세희 옮김, 문학동네(2016)


태그:#언데드, #산송장, #좀비, #언데드 다루는 법, #욘A.린드크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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