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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긴급교직원회의

1997학년도 6월 초순 무렵 어느 날 갑자기 점심시간 후 5교시 직전 임시 긴급 교직원회의가 열린다는 전달이었다. 일과 도중에 그런 일은 좀처럼 드물었기에 대부분 교사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3층 큰 교무실에 모였다.

나는 그 무렵 다른 교무실에서 있었기에 그날 임시 교직원회의 때는 평소처럼 3층 제1교무실 교장선생님 자리와 가까운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날 교장선생님의 얼굴이 시뻘겋게 붉어진 걸로 보아 예사로운 회의가 아님을 눈치 챘다. 직원회의가 시작되자 교감 선생님 역시 상기된 얼굴로 그날 임시 교직원회의를 열게 된 까닭을 말했다.

그날 오전 교장선생님은 당시 정의숙 이화학당 재단이사장에게 불려간 모양이었다. 정 이사장은 어느 학부모가 보낸 진정서를 교장선생님에게 건넸다. 그 진정서는 부속 중고 협동조합 이익금 잘못 사용에 대한 시정을 요구했다. 그 진정서를 전해 받은 교장선생님은 자기반성은커녕 학교에 내려오자마자 곧장 임시 긴급 교직원회의를 열어 그 진정서의 전문을 교감에게 낭독케 했다. 

"… 이 진정서를 청와대, 검찰청, 언론기관으로 보내려다가, 내 자식이 다니는 학교 선생님들이 관계기관에 불려가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어 먼저 재단이사장님에게 보내오니 시정바랍니다. 만일 이를 시정치 않으면 관계당국에 고발조치할 것입니다. …."

그 진정서를 보낸 이는 어느 학부모라고 말하면서, 지난 학년도 고등학교에서 교직원들이 협동조합 이익금으로 교직원연수회라는 이름으로 해외여행을 간 이야기와 함께 다가올 여름방학 때에 중학교 교사들도 해외연수를 가는 데 대한 그 부당성을 지적했다.

그 무렵 이아무개 교장선생님은 중고 두 학교 교장을 겸임하고 있었다. 지난 학년도 고교 교직원 해외 연수 후, 중학교 교직원들의 항의에 형평성을 기하고자 아마도 다가오는 여름방학 중에 중학교 교직원 해외연수를 준비했던 모양이었다. 사실 협동조합 이용은 어쩌면 중학생들이 더 많이 이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학기 도중에 해외연수를 가자니 경비가 모자라 일부 경비를 육성회 임원들을 통한 모금으로 충당하려는 과정에서 불거진 모양이었다. 어느 학부모가 그 전후 사정을 잘 알고 차마 그대로 지켜볼 수 없어 먼저 재단이사장에게 진정서를 썼다고 한다. 그 진정서 말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래도 해외연수의 잘못을 지적하고 동참치 않은 선생님들이 있었다는데 대한민국 교육의 앞날을 낙관케 한다…."

그 진정서 낭독이 끝나자 교장선생님은 격앙된 소리로 교사들에게 다그쳤다. 

"이 진정서 제보자는 학부모의 이름을 빌렸지만, 이는 내부 고발자의 소행이다. 아니면 우리 선생님 가운데 누군가 그 학부모에게 고자질한 결과다. 학부모가 어떻게 학교 내부 사정을 이렇게 잘 알 수 있나? 그 편지 문장력은 매우 뛰어나다…."

그날 임시 긴급 교직원회의에서 내 이름은 나오지 않았지만, 교장선생님과 교감선생님은 내 뒤통수에다 대고 내부 고발자의 소행이라고 격앙된 목소리로 윽박질렀다. 아무튼 내가 지난 학년말 교직원 해외연수 때 정면으로 문제제기를 했기 때문이다.

교장과 교감의 타깃은 나를 향하고 있음을 직감했지만, 내가 일어나 "나는 내부 고발자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게 오히려 이상할 것 같아 꾹 참았다. 나는 그때도, 지금도, 재단이사장에게 그 진정서를 보낸 이가 누군지 모르고 있다.

이는 마치 서당 훈장이 습자 시간에 먹물을 묻힌 아이는 제쳐두고, 깨끗한 옷을 입은 아이에게 "남들은 다 먹물을 묻히는데, 너는 왜 옷을 더럽히지 않았느냐"고 서당에서 쫓아내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퇴직 직전 마지막 수업장면(2003. 12.)
 퇴직 직전 마지막 수업장면(2003. 12.)
ⓒ 윤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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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산골로 내려오다

그날 임시 긴급 교직원회의는 아주 싱겁게 끝났다. 결과적으로 교장선생님은 자기 얼굴에 스스로 침을 뱉는 블랙 코미디를 연출했다. 그때에 추진하던 중학교 해외연수를 즉각 중단하고 슬그머니 넘어갔으면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 교장선생님은 앞뒤 생각 없이 재단이사장에게 당한 모욕을 참지 못하고 내부 고발자를 잡아내겠다고 진정서를 까발렸기 때문에 전 교직원이 그 개요를 다 알게 된 것이다. 그러자 일부 교사들은 이런 일의 본질에 대해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내부 고발자를 성토하면서 은연 중 나를 지목한 듯했고, 지금까지도 그렇게 믿고 있는 듯하다.

그런 사실이 제삼자를 통해 내 귀에까지 들렸다. 하지만 나는 그때도, 그 뒤로도 동료들에게 '내가 아니다'라고 스스로 말하는 게 웃기는 일이라 여태껏 침묵으로 일관했다. 

나는 그제나 이제나 글을 쓰도 전 현직 대통령, 국무총리, 최소한 장관급 이상 고위직의 부정이나 비리, 그들의 독재를 지적하거나 비판하지 그 이하는 건드리지 않고 있다. 그것은 나의 자존심이요, 스스로 내 글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나는 상사나 동료교사들에게 별별 수모를 다 겪으면서도 끝내 입을 닫고 살았다. 그때 나는 큰 아이가 대학교에, 둘째가 고교에 재학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부 교사는 그 일 이후 수시로 내 앞에서 노골적으로 빈정거리거나, 내 뒤통수에다 야유하는 말들을 불쑥불쑥 내뱉으며, 실실 비웃었다. 아주 새파란 후배 교사마저도 빈 교실로 나를 부른 뒤 "당신 혼자 잘난 체하지 말라"고 윽박질렀다.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그 누구도 그때 그 교직원 해외연수가 잘못되었다고, 스스로 부끄러워 하거나 사죄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그래서 누구나 잘못도 하고 실수도 할 수 있다. 뒤늦게나마 그 잘못과 실수를 깨닫고, 반성하며 고쳐나갈 때 그 사회는 발전할 것이고, 저 높은 곳에 계시는 분으로부터 용서가 뒤따를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사건 본질을 은폐하려거나 다수의 힘을 빌어 잘못을 정당화를 시도하려고 하며, 그 목격자를 집단에서 내몰려는 수법을 쓰고 있다.

나는 그날 이후 지금까지도 그때 상사나 동료 후배들에게 당한 모욕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잠을 자다가도 그때 일이 문득문득 떠오르면 잠을 설치기 일쑤다. 내 양심과 상식으로서는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나는 그때의 일들을 통해 비로소 우리 사회에 다수결이 경우에 따라 옳지 않는 것도, 아무리 좋은 사회제도라도 그 제도를 운영하는 주체가 부정부패나 비리를 저지르면 말짱 허사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왜 이 나라가 그동안 여러 번 정권이 바뀌면서 사정의 칼날을 휘둘러도 부정부패 비리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그 까닭도. 

나는 묵묵히 몇 해를 버텼다. 아내가 그즈음 말없이 표정이 굳어진 남편의 낌새를 눈치 채고 먼저 용단을 내렸다. 아내는 강원도 횡성군 안흥면 말무더미 마을에 있는 폐가 직전의 한 화가 집을 10년 기한으로 거저 빌려 손수 고치면서 새로운 둥지를 틀었다. 

"이제 그만 후배를 위하여 물러나세요."

아내는 에둘러 나에게 조기 퇴직을 종용했다. 아내는 나에게 더 이상 가족을 위해 굴욕적으로 살지 말고 앞으로 인생 이모작으로 당신 쓰고 싶은 글이나 마음대로 쓰면서 살라고 충고했다. 나는 2003년 1학기를 마치고 조기 퇴직하려다가, 그래도 초심대로 정년퇴직을 하겠다고 한 학기를 더 버텼다. 하지만 툭툭 내뱉는 후배교사들의 빈정거림과 비웃음에 나는 더 이상의 자존심을 구기며 근무할 수 없어 마침내 사표를 냈다. 

나는 "버려야 새 것을 얻는다"는 말처럼 그동안 40여 년간 서울생활의 인연을 떨치고, 담담한 마음으로 교단을 떠난 즉시 2004년 3월, 강원도 산골마을로 내려왔다. 그때 안흥 전재고개를 넘는데 나도 모르게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관련기사 : 33년 정든 학교를 떠나며… 안녕! 제자들이여]

퇴직 후 6년여 살았던 안흥산골 마을 내 집
 퇴직 후 6년여 살았던 안흥산골 마을 내 집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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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내가 2004년 3월 이대강당에서 퇴임식 때 남긴 말이다.

나무꾼이 되고자 함

1952년 전쟁 중 이른 봄, 여덟 살 먹은 까까머리 소년이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을 17년 다닌 후, 2년 4개월의 군복무를 마치자마자 다시 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여 오늘까지 32년 8개월에 이르렀습니다.

내 집필실 군불용 장작을 패다(2004. 12.)
 내 집필실 군불용 장작을 패다(2004. 12.)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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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지난 생애는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저는 이제 온실과 같은 학교라는 사회를 떠납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이지만, 저는 곧 서울을 떠나 강원도 산골에서 텃밭을 가꾸고, 뒷산에 가서 나무를 해서 군불을 지피는 나무꾼이 되려고 합니다.

사실 저는 저를 위한 이런 퇴임예배 없이 조용히 이 학교를 떠나고자 했습니다. … 하지만 한편으로는 학교에서 베풀어주는 이런 자리를 굳이 피하는 것도 예의가 아닐 것 같아 뒤늦게 오늘 이 자리에 섰습니다.

… 한 퇴직 교사가 학교를 떠나면서 마지막 남기는 말입니다. 제 말이 앞으로 여러 분 삶에 도움이 된다면 오늘 이 자리가 조금은 의의가 있을 듯합니다.

여러분! 고교시절은 인생의 가장 황금기입니다. 지금 학생 여러분이 생각한 대로 앞날은 대체로 결정됩니다. 물론 그에 다른 끊임없는, 피나는 노력이 뒤따라야 합니다.

저는 고교시절 교사, 기자, 작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교사가 되었고, 33년 간 교사로 살았습니다. 저는 고교 시절 선생님들이나 친구들로부터 '작가', '시인'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작가의 길은 험난해서 아주 늦깎이로 문단에 얼굴을 내밀고 지금까지 10권의 책을 펴냈습니다. 죽기 전에 여러 독자를 감동시키는 명작을 남기고 싶었습니다.

저는 고교시절, 학생기자로 활동하기도 했고 집안이 기울어서 신문배달도 하였습니다. 그때 나는 지금은 신문배달을 하지만 언젠가는 신문기자나 사장이 되겠다는 당찬 꿈도 꾸었습니다.

그 꿈 탓인 양, 정말 천만 뜻밖에도 시민기자가 되어 지난 1월 31일부터 3월 17일까지 미국 워싱턴DC로 간 뒤 경비가 매우 삼엄한 백악관 앞에서 "미국이여, 이제 두 동강난 내 조국 한반도를 통일시켜 달라"는 기사도 썼습니다. 이 모두가 고교 시절에 품었던 꿈의 결과였습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서고에서 한국 현대사 관련 문서를 찾다(2004. 2. 5. 왼쪽 고 권중희 선생, 오른쪽 기자).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서고에서 한국 현대사 관련 문서를 찾다(2004. 2. 5. 왼쪽 고 권중희 선생, 오른쪽 기자).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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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지낸 인생은 아름답다

학생 여러분! 꿈을 지낸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제가 정년을 5년 남긴 채 이 교단을 떠나는 것은 여러 이유도 있지만, 내 마지막 꿈을 이루고자 함입니다. 시골생활을 하면서 많은 사람에게 감동과 용기, 그리고 새로운 길을 찾게 하는 작품을 쓰고자 앞으로 저는 밤낮을 가리지 않을 겁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진흙 밭에서 개들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나라 이 겨레를 잘 이끌어가겠다는 입씨름이 아니라, 서로 누가 상대 얼굴이 검냐고 싸우고 있습니다.

사실은 두 편이 다 검은 데도 말입니다. 저도 한때는 내 얼굴이 검은지도 모른 채 그들을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 얼굴도 그들 못지않게 검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대부분 많이 배우고, 이른 바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우리 교육자들이 가르친 학생이었습니다. 정말 부정부패로 얼룩진 이 나라는 우리 모두가 참회하고 나부터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는 한 구제 불능입니다.

제가 이 학교에 처음 왔을 때는 한 학년이 네 학급으로 작고도 아담한 한 가족과 같은 학교였습니다. 그래서 선생님들은 학생들을 모두 알았고 학생 역시 선생님을 다 알았습니다.

지난해 가을 중간고사 때 어느 교실에 시험 감독 교사로 들어가자 한 학생이 "선생님도 이 학교에 계시느냐?"고 물었습니다. 네 학급이었던 학교가 학교 통합 등으로 그새 20개 가까운 학급으로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학생을 공장에서 제품이 쏟아지듯 길러내는 학교에서는 참다운 사람의 교육을 할 수 없습니다. 참다운 교육은 교사와 학생의 눈빛을 통해 이루어지고, 교사의 인격에 감화된 교육이어야 합니다.

이제 교단을 떠나면서 이 학교가 더 작아지고, 학생들의 인격을 더 존중하고, 그들의 개성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진정으로 사람을 키워주는 민주적인 학교가 되기를 바랍니다.

학교가 민주화되어야 사회도 나라도 민주화가 됩니다.

열심히 사는 사람은 다시 만나면
이대강당에서 퇴임사를 낭독하다(2004. 3.)
 이대강당에서 퇴임사를 낭독하다(2004. 3.)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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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 학교에 올 때 20년만 버티자고 결심했는데, 27년을 지내고 떠납니다. 이 점에서는 이화학당에 매우 감사합니다.

그리고 "교사는 학생을 보고 사는 거다"라고 끝까지 교단에 남기를 바랐던,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돌아가신 아버님과 무능한 남편을 묵묵히 지켜준 아내에게 감사드립니다.

이대부고에 재직하는 27년 동안 저 개인적으로 변한 것은 거의 없습니다. 살던 집도 그대로고 제 재산은 한 푼도 불어나지 않았습니다.

엊그제 퇴직금이 입금되어 아내가 결혼한 후 처음으로 통장에 많은 돈이 들어왔다고 웃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졸업생과 학생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죄합니다. 저의 무능과 게으름으로 잘못 가르치고, 용렬함으로 때로는 화내고 회초리를 들어 여러분의 마음을 상하게 한 점 두고두고 반성하겠습니다.

학생 여러분은 이 나라 이 겨레의 희망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자라 이 나라의 큰 일꾼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열심히 사십시오. 열심히 사는 사람은 다시 만나면 반갑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04. 3. 20. 박도 올림

마지막 꿈

퇴임식 후 곧장 서울을 떠나 안흥 산골로 내려왔다. 세 집만 사는 두메였다. 앞집 노씨 부인은 당신이 인천에서 시집을 오니까 앞도 산이요, 옆도 산, 뒤도 산이었다는 말을 우스개 얘기로 했는데 정말 그랬다.

나는 날마다 뒷산 새소리를 들으면서 아픈 마음을 달래다가 그것이 싫어지면 책을 펴거나 자판을 두드렸다. 이곳으로 내려온 이후 해마다 한두 권의 책을 펴냈다. 그리고 시민기자로서 그동안 1천여 꼭지의 기사를 썼다.

이즈음에는 잦은 병원 출입으로 안흥을 떠나 아주 머리까지 삭발한 채 원주 치악산 밑 자그마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많은 병에 얻고자 하는 것은 약뿐이니(多病所須唯藥物)
미천한 이몸 이밖에 무엇을 구하리오?(微軀此外更何求)  

두옹(杜翁, 두보)의 '강촌(江村)' 일구처럼 살아가면서 아직도 소년시절의 마지막 꿈을 이루기 위하여 부지런히 자판을 두들기고 있다.

32년 8개월의 교단생활은 그때마다 참 힘들었지만 그래도 내 지난 생애에서 가장 잘한 일로 여겨진다. 그때 교단에서 만났던 제자들 덕분에 나의 노년생활은 외롭지 않다. 그들은 날이 추워졌다고, 더워졌다고 안부를 묻고, 내가 토해 내는 글들을 읽어주는 애독자들이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교단에서 만난 제자들이여!"

최근 원주 치악산 밑 '박도글방'에서(2016. 11.)
 최근 원주 치악산 밑 '박도글방'에서(2016. 11.)
ⓒ 장병국 작가(성우애드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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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교단일기를 끝내면서  

2016년 8월 15일 애초 이 연재를 시작할 때 '제Ⅰ부 초록색 견장'(전방 소총소대장으로서 28개월의 푸른 제복시절 이야기)로 시작하여 '제Ⅱ부 교단일기' (32년 8개월의 교사시절 이야기), 그리고 제Ⅲ부 작가 및 시민기자 생활을 쓰고자 기획했다.

이번 호 기사 송고 날짜는 2017년 1월 19일로, 그새 6개월이 지났다. 그리고 제1부에서 제2부 끝 기사까지 45회 연재했다. 나는 여기서 일단 중단하고 '제Ⅲ부 작가 및 시민기자 생활' 이야기는 후일에 이어가고자 한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올 상반기에 출판할 작품의 원고 집필 때문이다. 솔직히 이즈음은 체력이 딸려 두 가지 다른 내용의 글을 병행해서 쓸 자신이 없다. 특히 이 <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연재는 나를 그대로 노출시키는 글이기에 매우 부담이 가는 글로 그동안 매우 힘들었다.

'제Ⅱ부 교단일기'를 끝내면서 교육계에 바라는 말을 쓰려다가 그동안 써온 글 행간 행간에 그런 말들을 이미 다 말했기에 군더더기 같아 생략한다. 군말이나 잔소리는 내 딸, 아들도 싫어하는데 하물며 독자들이야 더욱 그럴 것이다.

이 연재를 시작할 때 얼마나 제대로 순항할지 매우 염려스러웠다. 그런데 그동안 여러 독자들의 뜨거운 성원으로 이 연재기사들은 나에게 '2016 오마이뉴스 특별상'을 수상케 하는 영예를 안겨줬다. 독자 여러분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후일 제3부 연재에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면서….

덧붙이는 글 | 박도 지음 실록소설 <허형식 장군>(눈빛출판사 / 1만3000원) 시중 서점에서 판매 중입니다.



태그:#교직원회의, #조기 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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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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