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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벌한 경쟁은 10엔에 살인 의뢰가 낙찰되는 건수도 나오게 한다. 그래도 이 직업이 갖는 장점은 대부분 프리랜서라 출퇴근 걱정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어떤 책을 읽다보면 데자뷔처럼 떠오르는 또 다른 책이나 영화가 있기 마련이다. 일본호러소설대상, 에도가와 란포상, 일본추리작가협회상. 문학상 3관왕을 차지한 소네 게이스네의 도발적 미스터리 <암살자닷컴>을 읽으며 왜 장 르노와 나탈리 포트만 주연 영화 <레옹>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한 손에 화초, 다른 한 손에 우유를 들고 무표정하게 걷는 '레옹'. 은밀하게 살인을 의뢰받고 일한 대가를 지급받는 전문 킬러 레옹은 검은 세계로부터 시시콜콜 간섭받고 복종을 강요받는다. 한편, 나탈리 포트만이 열연한 마틸다는 4살짜리 어린 동생이 살인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레옹에게 자신을 의탁하면서도 결코 주눅들지 않는 12살짜리 아이다.

소네 게이스케 저, 권일영 역, 예담출판
▲ 암살자닷컴 소네 게이스케 저, 권일영 역, 예담출판
ⓒ 예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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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둘을 보면서 <암살자닷컴>의 주요 인물들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이 되바라진 의뢰인을 만난다는 점에서 그랬고, 주인공을 포함한 등장 인물들이 안정된 느낌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흔들리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그랬다. 또한, 레옹이 살인의 대가로 받은 돈을 관리하는 토니에게 이용당하는 것과 배반하거나 실패한 킬러를 응징하는 조직의 사악함이 닮았다.

<암살자닷컴>은 누구라도 익명으로 살인을 의뢰할 수 있고, 누구라도 입찰에 성공하면 살인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곳인 청부살인전문회사다. '성공률 100퍼센트, 마감 기한 보장, 맞춤형 살인 제공'이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암살자닷컴>에 접속하는 킬러들은 면면이 다양하다. 킬러계의 레전드부터, 이혼당한 현역 형사,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가정주부, 대를 이어 킬러의 길로 들어선 어린 킬러까지 실체를 알 수 없는 조직이 내놓는 살인 의뢰에 입찰한다.

살인에 입찰과 낙찰이라니, 생각만 해도 소름 돋는다. 소설이기 망정이지, 현실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말세'라고 하겠지.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한 일이 일어나는 세상이고 보면, <암살자닷컴>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또 다른 세상의 실체인지 모른다.

소설은 옴니버스 형식으로 따로 구성된 네 편의 이야기다. 이 독립된 이야기들이 모여 엄청난 반전이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어 작가의 역량이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생계형 밥벌이라니…악의 평범성이 떠오른 이유

살인도 노동이 되는 세상, 전문킬러들에게 살인은 경쟁 입찰로부터 시작한다. 살인이 노동인 그들에게도 애환이 있다. 고급스런 노동도 있고, 고된 노동도 있다. 동종 업자들끼리 갈등은 제살 깎아먹기 식의 출혈 경쟁으로 이어지기도 있다. 살벌한 경쟁은 10엔에 살인 의뢰가 낙찰되는 건수도 나오게 한다. 그래도 이 직업이 갖는 장점은 대부분 프리랜서라 출퇴근 걱정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청부살인은 할리우드 영화의 단골 소재라 익숙하지만, <암살자닷컴>에 나오는 킬러들은 어딘가 모르게 어리숙해서 낯설다. 설령 레전드급 킬러라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누군가를 죽이지 못할 뿐 아니라 속을 게워내야 할 정도로 냉혈한과는 거리가 멀다. 어디 그뿐인가? 첫 이야기부터 킬러의 도덕률을 거들먹거리니 살인으로 벌어먹긴 그른 얼치기 킬러라는 느낌을 받기에 충분하다.

"청부살인업자에게도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 표적은 오마타 신이치로처럼 뒤가 구린 악당만. 이게 고로가 입찰에 참가하는 기준이다." -p.15

세상에 입찰 참가 기준을 둘만큼 도덕적인 킬러가 있을까? 자신이 하는 일을 합리화하며, 마치 세상을 정화하는 사람인 것처럼 포장하는 킬러라니, 참 도덕적이다. 레옹도 자신을 '클리너Cleaner'라고 했지만, 그는 아직도 우유, 엄마 젖을 필요로 하는 정신적 유아다.

작가가 '도덕적 킬러'를 첫 이야기에 배치한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어쩌면 세상에 도덕적인 킬러가 어디 있냐고 반문하는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사실상 작가는 킬러들이 암살자닷컴에 입찰하게 된 배경을 친절하게 알려준다.

'생계형', 밥 빌어먹으려고 하는 짓이라고. 그러나 그 친절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다. 작가는 '당신도 킬러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것이다. 이 정도 되면 세상이 참 쓰레기장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오빠를 죽인 범인을 찾아달라는 당돌한 소녀의 100엔짜리 사건 의뢰에 휘말려 금기의 문을 열어버린 탐정은 쓰레기장 같은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는 킬러는 아니다. 그러나 킬러들의 세계를 잘못 건드렸고, 벗어나는데 성공하는 듯했다.

그러나 숱한 영화가 그 결말을 말해 주듯이, 소설 속 탐정 역시 은둔에 실패하는 점은 너무 빤했다. 다만, 그 단순함이 엄청난 반전을 이루는 계기가 된다는 점은 작가의 역량인 셈이다.

"하지만 과거를 완전히 차단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과거는 그림자를 닮았다. 어두운 곳에 나오면 모습을 드러내 떨어지지 않는다." -p.301

<암살자닷컴>은 이 시대는 누군가의 관심을 끌어보려고 거짓으로 아프다고 하고, 자해를 일삼는 가장성 장애, 즉 뮌하우젠 증후군을 앓고 있다고 고발하고 있다. 관심과 위로를 필요로 하는 세상은 일그러진 심리가 활개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류의 소설이 인기를 끌고, '치유(힐링)'이라는 말이 난데없이 인기를 끄는 것이다.

이 책은 결말을 알고 나면 소름이 돋는다. 읽을수록 도덕적 킬러는 애초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숨겨진 인간 내면의 죄악성을 고발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누가 살인자이고 누가 희생자인지 가늠할 수 없는 혼돈 속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작가는 첫 이야기부터 마지막 이야기까지 킬러들과 살인 의뢰자의 면면을 통해서, '악의 평범성'을 부각시킨다. 그래서 청부살인이 가능하다고 말이다.


암살자닷컴

소네 케이스케 지음, 권일영 옮김, 예담(2016)


태그:#암살자닷컴, #소네 게이스케, #악의 평범성, #예담, #청부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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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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