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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을 말하고 있는 김기호 작가
 시절을 말하고 있는 김기호 작가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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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김기호 작가를 만났습니다.

"오랜만입니다."

한 마을에 살면서도 만남이 뜸했던 터였습니다. 이유없이 만나고, 그 만남을 통해 다시 만날 이유가 생기는 것이 이웃인데 불쑥 김 작가님을 대면하자 이웃이 아닌 시간을 산 듯싶어 죄스러운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습니다.

그동안 무슨 일로 이렇게 대면할 겨를조차 없었는지 자문하듯 물었습니다. 그는 대답 대신 손에 들고 있던 종이 한 장을 내밀었습니다.

"이 일로 그동안 짬이 없었습니다."

전시 리플릿이었습니다.

"빛과 선으로 시절을 그리다_김기호_권홍 전"

'시절'이란 제호가 화살처럼 가슴에 박혔습니다. 그 단어가 주는 뉘앙스만으로도 서러워졌습니다. 중앙권력이 옳지 않게 쓰이고, 그것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민중의 목소리가 촛불정국으로 치달았습니다. 이 소용돌이 속의 가장 큰 희생자는 사실 탄핵 대상자와 탄핵의 빌미를 제공했던 권력자와 그 권력의 기생자가 아니라 점점 더 팍팍해지는 일상을 견뎌야 하는 민중들입니다.

김 작가님은 헤이리에서 '크레타'라는 양식당을 운영하면서 시간의 틈새에 작업을 하는 화가입니다. 매일 새벽 식재료를 사기 위해 새벽시장을 오가고 식당에서 손님을 맞는 만큼, 시절의 파고를 가장 앞에서 맞서고 있는 사람에 속합니다. 그에게 그림과 시절을 물었습니다.

- 이인전이군요?
"한 사람은 사진이고 저는 드로잉입니다."

- 권홍 사진가는 어떤 분인가요?
"이분도 생업을 꾸리면서 매주 카메라를 들고 광화문으로 나가는 분입니다."

- 이분의 사진은 광화문 집회의 현장에서 감상자가 마치 군중의 일원으로 함께 걷는 것처럼 느껴지는 표현이군요.
"다중노출기법을 사용해 찍었다는군요."

권홍_잉크젯 프린트_18.8x29.7cm_2016
 권홍_잉크젯 프린트_18.8x29.7cm_2016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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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 함성의 파장이 귓전에 맴도는 것 같고 제 머리 위에서 깃발이 나부끼는 것처럼 가슴에 파문을 남깁니다.
"흔들림에서 역동성이 느껴져요."

- 김 작가님은 어떤 생각을 중심에 두고 작업을 한 겁니까?
"그날의 잔상들을 드로잉 해서 매일 한 점씩 페이스북에 찍어 올렸었습니다. 그 결과물들에서 추렸습니다."

- 그렇다면 작품의 사이즈는 중요치 않았겠군요?
"A4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일하는 바쁜 중에 떠오른 생각들은 손에 쥔 계산서 뒷면에 그리기도 했고요."

김기호_안거_종이에 연필_21x29.7cm_2016
 김기호_안거_종이에 연필_21x29.7cm_2016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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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일과 그림이 분리되지 않은 생활을 하셨군요?
"2015년 봄부터 2016년 말까지 그린 것들입니다. 물론 이 작업은 2017년에도 계속되고 있고요."

- 생활인들에게 예술이 결코 우아한 장식이 될 수 없듯이 김 작가님의 이번 드로잉들은 작가의 창작욕구와 삶 현장의 치열함이 그대로 반영된 셈이군요?
"어쨌든 저와의 약속이었기 때문에..."

- 그 약속이란?
"예전에는 유화가 주류였었지요. 그때 화실에서의 제 원칙이 "팔레트의 물감을 말리지 마라"였는데 지금의 제 조건은 그것이 전혀 불가능한 형편인 거죠. 그럼 새벽부터 밤까지 생활전선을 지켜야 하는 이 조건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의 결과로 새로 세운 기준이 '손에서 연필을 놓지 마라'였습니다."

- 붓 대신 연필, 유화 대신 드로잉, 적절한 타협이군요.
"저의 이 약속도 지켜내기 위해서는 중단하고픈 변명을 나무랄 수 있는 누군가의 감독이 필요하다 여겼고 그 감독관으로 페이스북을 택한 거지요."

- 감독관이 무서워서도 건너뛸 수 없는 배수진을 친 셈이군요.
"심지어는 화장실 앉아서 그린 것도 있습니다. 틈새 시간을 활용해야 하니까요."

- 그렇게 짬이 없을 만큼 매일이 치열합니까?
"오늘을 예로 든다면, 5시에 기상해서 씻고 6시에 새벽시장으로 갑니다. 서울 강서구의 농산물도매시장과 또 다른 지역의 농협 하나로마트도 들려야 하고요. 돌아온 뒤 식재료를 정리하고 아침 먹고 나면 이어서 식당 오픈 준비를 해야 하고 저녁까지는 식당 일로 풀타임 근무를 해야지요.

서울에 계시는 장모님이 치매예요. 반찬을 준비해서 밤에 다녀와야 합니다. 적어도 이틀에 한 번은요. 또한 병원 진료가 잡힌 날은 병원에 모시고 가야 해요. 선생님과 대화 중인 이 시간에도 저의 처가 문자로 지시를 내리고 있습니다. 오는 길에 어디에 들려서 업무를 보고 오라는... 그러니 사실 손에서 연필을 놓지 않기도 힘든 상황인 거지요."

- 정말 짬 없는 일상이군요. 지금은 겨울이라 식재료비도 여름과는 많이 다를 것 같습니다?
"오이는 한 박스에 시중가가 8만 원에서 10만 원까지 합니다. 지금은 돈을 가지고도 계란을 사용량만큼 살 수가 없습니다. 식당 운영자들에게도 10판 이상 주질 않아요. 식용유 또한 문제입니다. 저희 같은 돈가스집이나 치킨집, 튀김집, 전집 등 대량으로 식용유가 필요한 가게는 사재기해 놓지 않으면 영업을 할 수가 없어요. 남미의 홍수가 제 식당의 운영에 직접적으로 타격을 입히는 시절을 살고 있는 겁니다."

- 세월호 사건이 소비 자체를 위축케한 셈인가요?
"경기를 휘청하게 만든 분기점이지요. 그리고 작년의 메르스(MERS, 중동호흡기증후군), 개성공단 전면 폐쇄, 사드 배치가 쟁점이 되면서 중국 관광객 감소 등에 영향을 받았지요. 현재 소상공인들의 상황은 절박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절명의 소리 없는 비명을 정치인 누가 듣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김기호_권홍 展
 김기호_권홍 展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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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에도 눈이 오지 않고 춥지 않는 온난화를 염려하고 있는 상황에도 경기는 엄동설한이군요. 전시장을 지킬 수는 있습니까?
"지난 오픈 일에도 낮에 밥장사하고 저녁에 들러서 지인들과 소주 한 잔했을 뿐입니다."

- 그럼 작품 디스플레이는 누가 했나요?
"낮 장사하고 잠시 짬을 내어서 달려가 걸었고 미처 못다 한 것은 배치만 알려주고 지인에게 도움을 구했습니다."

김기호 작가는 대화중에도 부인의 심부름 지령을 계속 받고 있었습니다.
 김기호 작가는 대화중에도 부인의 심부름 지령을 계속 받고 있었습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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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호 작가는 작품을 디스플레이할 짬조차 없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손에서 연필을 놓지 않겠다'라는 화가로서의 약속을 저버릴 수 없어서 매일 그린 600여 점의 드로잉 중에서 43점을 골라 시절을 반영한 5개의 주제로 묶어서 이번 전시에 작품을 걸었습니다.

마이클 하워드 영국 보수당 당수가 밝힌 16개 항의 보수주의 강령 중에 "국민은 커야 하며 정부는 작아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김 작가님과 헤어지고 나서 이런 생각이 한참을 맴돌았습니다.

"우리에게 정부가 국민보다 작았던 때는 언제였는가?"

■ 빛과 선으로 시절을 그리다
김기호_권홍 展

기간 | 2017년 1월 5일 ~ 1월 14일
장소 | 갤러리 브레송
주소 | 서울 중구 퇴계로 163 B1
전화 | 02_2269_2613

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



태그:#김기호_권홍 展, #김기호, #권홍, #빛과 선으로 시절을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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