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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의 파란 트럭이 낡아갈수록 나는 자랐다. 엄마의 어깨에 석회가루가 쌓여 내 대학 등록금이 됐다. 이제 두 분의 삶에서 낡은 트럭과 석회가루 대신, 하모니카와 여행이 많아졌으면
"맛보기를 주면 손님이 거절하기 어려워해"

아빠는 10년째 하모니카를 불었다. 매일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많게는 네 시간, 짧게는 한두 시간, 거실에서 하모니카를 불었다. 열두 시를 넘겨 새벽까지 연습하기 일쑤였다. 토요일에는 하모니카 학원에 갔다. 몇 년 동안 도레미파솔라시도를 연습하던 아빠는 이제 서툴지만 노래 '서쪽하늘'을 연주할 수 있다.

1993년, 내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아빠는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동에서 과일 장사를 했다. 장사를 마치고 집에 올 때면 나를 가진 엄마는 치킨이 자주 먹고 싶었다 했다. 아빠가 치킨 한 마리를 싸 오면 엄마는 혼자 닭 한 마리를 해치웠다. 아빠는 엄마에게 온전히 양보했다. 다음날부터 아빠는 두 마리를 튀겨왔다.

내가 조금 자라 유치원에 다닐 때 아빠는 횟집에서 일했다. 이천시 부발면 와석횟집이었다. 사장은 아니었고 주방에서 회를 떴다. 아빠는 아침부터 밤까지 일했다. 와석횟집은 1997년도 IMF 때 주변 회사들과 함께 문을 닫았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아빠는 횟집을 차렸다.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 물불횟집이었다. 아빠가 회를 떴고 엄마가 도왔다. 고모도 함께 일했다. 엄마, 아빠는 한 달에 이틀을 쉬기도 어려웠다. 엄마, 아빠는 동네 장사라 자주 쉬면 안 된다고 했다.

아침에 나가서 밤늦게 가게를 닫았다. 나는 학교를 마치면 빈집이 싫어 가게에 종일 있었다. 아빠는 손님 있을 때는 가게 돌아다니지 말고 얌전히 있으라고 했다. 횟집은 오래가지 못해 문을 닫았다. 나는 회를 싫어했다.

내가 중학생이 됐을 때 우리집은 경기도 광주로 이사했다. 아빠는 트럭 뒤에 군밤 기계를 지고 다니며 밤을 구웠다. 아빠는 절에서 군밤을 팔았다. 용인시 와우정사였다. 뿐만 아니라 사람 많은 곳은 어디든지 찾아다녔다.

외향적이지 않은 아빠는 처음 장사를 할 때 힘들어했다. "맛보기를 주면 손님이 거절하기 어려워해" 곧 아빠는 손님에게 말 붙이는 법을 배웠다. 아빠는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군밤을 싸 왔다. 밤은 막 구운 듯 따듯했다. 나는 밤을 싫어했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자 아빠는 화물용달일을 시작했다. 아빠는 아침에 나가서 저녁 늦게 들어왔다. 온종일 운전했다. 집에 오다가도 괜찮은 일이 잡히면 하고, 또 하고, 그러다 집에 늦게 왔다. "아빠는 왼쪽 귀가 안 들려." 얼마 전 거실에서 하모니카 연습을 하던 아빠가 말했다. 아빠는 3, 4년 전부터 그랬다고 했다. 나는 몰랐다.

아빠의 하모니카와 엄마의 여행

3주일 전, 엄마는 일하다 어깨가 아파 병원에 갔다. 의사는 엄마의 어깨에 석회가루가 많다고 했다. 엄마가 하는 일은 어깨에 무리가 가는 일이었다. 상자를 들고, 옮기는 일이었다. 엄마는 오른쪽 팔을 들기조차 힘들어할 때가 많았다. 엄마는 한 달간 일을 쉬기로 했다.

엄마는 일을 마치면 매일같이 '걸어서 세계속으로'와 같은 여행 방송을 봤다. TV 속에서 여행 전문가들은 아시아, 유럽, 아메리카를 자유롭게 누볐다. 엄마가 잠들고서도 TV 속 여행가들의 여행은 계속됐다. "어렸을 때 이렇게 공부했으면 세계지도 다 외웠을 텐데…." 엄마는 종종 말했다. 엄마는 지난 1월 4일부터 4박 5일간 대만과 홍콩을 여행했다. 5일 동안 엄마의 카카오톡 상태메시지는 '10년 만의 휴식'이었다.

고등학생일 때 나는 아빠의 하모니카 소리가 싫었다. 밤늦게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에 오면 삑삑거리는 아빠의 하모니카는 내 귀를 찔렀다. 공부가 안 되거나 잠이 잘 안 오거나 시험을 못 보면 마음속으로 아빠의 하모니카를 탓했다. 그래도 티는 내지 않았다. 아빠는 술이나 담배를 안 하니 취미라고 할 것은 하모니카밖에 없었다.

그런 아빠가 요즘 하모니카를 불지 않는다. 바빠서 연습할 시간이 없다고 한다. 아빠는 저녁 늦게 퇴근하면 TV를 조금 보다가 잠에 든다. 주말마다 갔던 학원도 가지 않는다. 이제 아빠의 하모니카 소리도 음악처럼 들리기 시작했는데, 아빠는 하모니카를 부를 시간이 없어졌다. 이제 나도 아빠의 하모니카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컸는데, 아빠는 하모니카를 부르지 않는다.

1993년 아빠와 엄마와 나
 1993년 아빠와 엄마와 나
ⓒ 김정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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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사진첩을 뒤적이다 어린 나의 사진을 찾았다. 사진에는 나를 닮은 사람이 어린 나를 안고 있었다. 아빠와 엄마였다. 아빠는 서른, 엄마는 스물둘에 나를 낳았다. 지금 내 나이는 딱 나를 낳았을 때 두 분의 중간이다. 30살의 아빠와 26살의 나는 많이 닮았다.

아빠의 파란 트럭이 낡아갈수록 나는 자랐다. 엄마의 어깨에 석회가루가 쌓여 내 대학 등록금이 됐다. 이제 두 분의 삶에서 낡은 트럭과 석회가루 대신, 하모니카와 여행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언젠가 두 분이 함께 여행하고 그곳에서 아빠가 엄마에게 하모니카를 불어주는 상상을 한다.


태그:#가족사진, #가족, #하모니카, #엄마,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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