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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은 사회의 목탁이요, 거울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E. H. 카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하였다. 영국인들은 역사를 매우 사랑하며 존중한다. 그들은 개인의 역사까지도 매우 사랑한다. "체험은 최상의 스승이다"(Experience is the best teacher)고 하여, 기성세대의 체험담을 대단히 귀중한 자산으로 여기며, 여기에서 교훈을 배운다.

지식인의 사회비판은 자동차의 제동장치(브레이크)와 같다. 브레이크가 없는 자동차는 곧 추락하고 만다. 신문은 사회의 목탁이요, 거울이다. 비판이 없는 일방의 충성과 맹종처럼 무서운 게 없다. 과거 나치즘이나 파시즘, 우리나라 유신시대가 그 단적인 예다.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최근 우리나라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 심판대에 오르는 근본 원인은 언저리에 쓴 소리를 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연재는 체험에서 우러난 기록들이다. 한 개인의 기록이지만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지난 시대를 이해하고, 앞날을 살아가는데 지혜를 얻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하기 때문이다. - 기자의 말

공정, 투명, 공개

내가 교무주임(현 부장)이 된 1984학년도 그 무렵 교내 사정은 몹시 어려웠다. 특히 그 몇 해 전부터 보충수업이 시행됐는데, 그 무렵에는 보충수업비가 제대로 걷히지 않아 지불조차 할 수 없는 형편에 이르렀고, 보충수업에 참여하는 학생도 들쭉날쭉 곤경에 처하고 있었다. 당시 이아무개 교감선생님은 교사들을 서너 등급으로 나눠 수당 지급에 차등을 둔다는 말에 교사들이 '잘 해보시오'라고 방관한 게 가장 큰 원인이었다.

게다가 교감 선생님은 제자를 교사로 채용한 뒤 정규교과도 없는 고3 학년에 담임을 배정하는 등 편애가 몹시 심했다.

이대부고 교사 신분증
 이대부고 교사 신분증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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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유를 알게 된 교장 선생님이 그 타개책으로 나를 발탁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 해결책은 말로서는 되지 않고, 오직 공정성과 투명성이라는 판단으로 모든 것을 공개적이며 투명하게 처리하고자 노력했다.

심지어 보충수업 수당 지급 결재 서류를 그대로 복사해 게시판에 올렸다.

내가 그 결재서류를 작성해 교감선생님에게 올릴 때 교감은 나에게 "수고가 많다"며 내 수업시간을 서너 시간 더 올리라고 넌지시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은 '쥐약'이라는 것을 알고 미동치 않았다.

나의 공정성과 투명성은 곧 효과가 나타났다. 서무실 납부창구가 붐빌 만큼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교장 선생님은 신학기 첫 주부터 주례 중·고 교감·교장 회의를 중·고 교무부장·교장 회의로 바꿨다. 그러자 이는 하극상으로 학교의 중요 일에 교감은 교무부장을 통해 교장에게 전달하고, 교장은 지시사항을 교무부장 회의를 통해 교감에게 전달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는 교감 선생님에 대한 불신임이었다. 그런 불신임을 당하면서도 교감은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고(그분은 1998년 2월 28일 정년퇴임 때까지 22년 동안 그 자리를 고수했다), 교장선생님은 더 이상 칼을 뽑지 못한 채 스스로 물러나기만을 기다리는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아마도 내가 잘 모르는 뭔가 배경이 있는 듯했다.

나는 그렇게 1년을 보낸 뒤 학년말 교장선생님에게 보직 사의를 표했다.

"저를 포함하여 간부진을 개편하십시오."

그 이튿날 교장선생님은 바람이나 같이 쐬자고 해 동행했더니, "그만둘 사람은 그만두지 않고, 함께 일 하고픈 사람은 그만두겠다고 하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하소연이었다.

나는 그 말에 다시 1년간 보직을 더 맡았다. 그해 학년말에도 보직 사표를 냈지만 '한 번 맡았으면 3년은 해야 한다'는 말에 끝내 내 뜻을 관철치 못했다. 그런 가운데 3년째 되던 그해 가을 교장 선생님은 나에게 학교 일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입원했다. 처음에는 곧 퇴원할 줄 알고 시내 다른 대학병원에 아무도 몰래 입원했는데 병세가 악화되자 하는 수 없이 학교법인 산하 이대동대문병원으로 옮긴 뒤 이듬 해 2월 말에 승천하셨다.

세심하고 치밀했던 교장선생님

그분은 평소 지병이 있는 데다가 학교일로 스트레스를 엄청 받으셨을 것이다. 층층시하 여인왕국에서 기관장으로 지내는 고통이 무척 컸었나 보다. 교장선생님은 유언무언 중 그런 애로사항을 내게 토로했다. 그분은 나의 건의를 받아들이거나 당신의 복안을 지시할 때도 매우 세심하고 치밀했다.

고 정식영 교장선생님
 고 정식영 교장선생님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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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한두 예로 내가 10% 성적우수학생명단 게시를 철폐하려고 건의했을 때다.

"그것은 대다수 학생들과 학부모의 건의 때문에 시행치 않는 거라고 선생님들을 설득시킨 뒤 시행하시오."

그 무렵 교내에는 구내매점이 없었다. 학생들이 아침을 먹지 못하고 등교해도 빵이나 우유를 사서 마실 수도 없었다.

내가 그 점을 건의하자 행정실장을 시켜 학교 앞 두 빵집 '이화당'과 '그린하우스' 주인을 부른 뒤 한 달씩 교대로 교내에서 영업케 했다. 아마도 학교 언저리의 입방아와 투서에 진절머리가 난 전력 때문인지 절대로 자신은 나서지 않고, 공정하게 처리하려는 기색이 매우 역력했다.

어느 하루는 나에게 한 빵집 주인을 불러 오라고 했다. 그 까닭은 그 집 주인이 빵을 담은 봉지를 3층 교무실로 자주 보낸다는 데에 대한 경고였다.

"교장선생님, 이 일은 제 소관이 아닙니다. 행정실 직원을 시키십시오."

그러자 교장선생님은 내 말이 옳다고 말한 뒤 곧 인터폰으로 행정실장을 불렀다. 그날 불려간 빵집 주인은 교장에게 혼이 났다. 곧 그 불똥은 내게도 튀었다. 하지만 곧 빵집 주인을 불러온 이는 행정실 직원으로 알려져 나는 그 소용돌이를 피해갈 수 있었다.

정식영 교장 선생님이 혼수상태로 더 이상 집무를 볼 수 없자 이화학당 재단에서는 최윤애 사범대학 사회과 교수를 7대 교장선생님으로 내려 보냈다.

아래 글은 기자가 쓴 <샘물 같은 사람들> 163쪽에서 170쪽까지 실린 꼭지에서 뽑은 글이다.

검소한 교장 집무실

고 최윤애 교장선생님
 고 최윤애 교장선생님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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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애 선생님!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된 때가 1988년 이른 봄, 꽃샘추위가 한창이었던 2월 하순 봄방학 때였습니다.

전임 교장선생님이 지병으로 입원해 혼수상태로 더 이상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됐을 때, 선생님이 후임으로 오셨습니다.

그날 선생님이 교정을 둘러보시다 교무실에 오셨을 때, 아담한 체구에 고운 얼굴을 가지신 분이 힘들고 어려운 교장 직무를 어떻게 수행해 내실 수 있을까 조금은 염려스러웠습니다.

학교 안팎의 여건도 어려운 때였습니다. 오랫동안 군사정권에 억눌려 왔던 민중들의 민주화 요구 열풍이 거셀 때였습니다. 학교 역시 무풍지대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려운 시기를 선생님은 정직과 사랑, 성실과 대화로써 모든 문제와 갈등들을 해소시켰습니다.

선생님에게 받은 감명은 수없이 많아 이 글에 다 담을 수 없을 듯합니다. 그 무렵 저는 직책상 교장실 출입을 자주 했지요. 부임하신 후 처음 교장실에 들어갔을 때, 집무용 책상과 의자가 작고 검소함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책상은 교사들의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고, 의자도 딱딱한 나무 의자로 학생들의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제가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서울 시내 교장실 중, 가장 좁고 검소했을 겁니다.

선생님은 제가 결재를 받으러 교장실에 들어서면 꼭 일어서서 인사를 받으시고, 계속 서서 말씀을 들으시고 결재란에 날인하셨습니다. 한두 번 그러신 게 아니라 제 편에서 "교장 선생님, 앉으세요" 하면 저를 먼저 앉게 한 후 그제야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어떤 지위에 오르면 집무실을 호화롭게 꾸미고 값비싼 집기로 치장하고 책상 위에는 자개 무늬의 명패를 놓고 회전의자에 푹 파묻혀 있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직책에 걸맞은 권위로 여기고 있습니다.

어떤 교육학자가 스위스의 한 초등학교를 방문해 교장선생님을 찾았더니, 수업 중이라고 해서 기다렸답니다. 잠시 후 교장선생님은 여느 교사와 다름없이 수업을 끝내고 자리로 돌아오는데 교무실 한 모퉁이가 바로 교장의 자리였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도 대학 강의만 없었다면 능히 그러실 분으로 생각됩니다.

이대부고 학생회간부 수련회(1985. 6. 현충사, 뒷열 왼쪽 두번째가 기자.)
 이대부고 학생회간부 수련회(1985. 6. 현충사, 뒷열 왼쪽 두번째가 기자.)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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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몫의 수당을 거부하다

부임하신 후, 첫 3월분 보충수업 수당 지급 결재판을 들고 갔을 때 일입니다. 교장선생님도 매월 관리 수당이 지급된다는 제 설명을 듣고서는 "보충수업 수당은 어디까지나 보충수업에 수고하신 분만이 받아야 된다"라고 하시면서 끝내 당신 몫을 거부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또 한 번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연히 받을 수 있는 자신의 수당도 거부하신 분이 이 나라교육계에 몇 분이나 계실지?

보충수업이 처음 실시될 때는 그랬습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교장회의 결의 사항이라며 슬그머니 관리 수당이라는 명목이 생겨나(사실은 그 이전부터 일부 학교에서는 이미 지급되고 있었음) 어떤 학교에서는 실제 수업을 담당하는 교사보다 관리를 하는 분이 더 많이 챙기는 부조리가 횡행하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은 임기 만료 때까지 보충수업 관리 수당을 단 한 푼도 받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운동장 조회 때나 각종 기념식에서 선생님의 훈화 말씀은 우렁찼고 내용도 매우 충실했습니다. "물의 지혜를 배우라" "각자 자기의 자리를 지켜라" "매사에 성실 하라"…. 어느 하루도 허튼 말씀이 없이 완벽한 준비로 듣는 이를 감동시켰습니다. 당신이 몸소 실천하는 바이기에 그 말씀에는 힘이 따랐습니다. 평소 선생님의 말씀은 언제나 부드러웠습니다.

저희 교사들의 나태와 실수에도 선생님은 언제나 관용으로 감쌌습니다. 한 번은 제가 업무상 실수를 저질렀는데도 아무 말씀이 없기에 따끔한 꾸중을 달라고 말씀드리자 "우리 선생님들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 고생하시는데 격려는 못할지언정, 무슨 꾸중이냐? 박 선생님이 이미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는데 무슨 말씀이 필요합니까?" 라고 오히려 저를 다독거렸습니다.

이대부고 2-5반 수학여행(1988. 9. 설악산소공원)
 이대부고 2-5반 수학여행(1988. 9. 설악산소공원)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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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는 그윽한 향기가 있다

지금도 선생님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모습은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른 겨울 아침, 오버코트에 머플러로 단단히 감싸고 후문 계단을 내려오던 모습입니다. 어느 누구보다  먼저 출근하셔서 가위와 스카치테이프, 휴지를 들고 복도에 전시된 학생들의 작품 중 떨어진 부분을 붙여 주시고, 복도 바닥이나 계단에 뱉어진 가래침이나 오물들을 손수 닦으셨습니다.

저도 그런 오물을 때때로 보지만 그냥 지나치기 일쑤였고 비위가 상해 손이 가지 않는데 선생님은 재임 중 그런 오물만 닦으셨습니다. 오직 교육에만 당신을 바치기 위해 평생을 독신으로 사셨습니다. 선생님은 하느님이 이 땅의 교육을 위해 선택해 내려 보낸 사도였나 봅니다.

선생님에게 드리는 첫 번째 글, 아쉽지만 이제 마무리하렵니다. 언제 봬도 한 올 흐트러짐이 없으시고, 주름 하나 없으신 완벽한 용모와 옷차림을 하신 정갈한 선생님이셨습니다. 선생님은 당신 임기 만료일인 1993년 2월 27일(토) 12:00 정각까지 정확하게 자리를 지키다가 교장실을 떠나셨습니다. 선생님이 떠나셨지만 유독 "정성을 다하라" "자기 자리를 지켜라"라는 말씀이 메아리처럼 들려옵니다.

최윤애 선생님! 당신에게는 그윽한 향기가 있습니다.
(최윤애 선생님은 2016. 9. 소천하셨습니다.).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 [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제2부 '교단일기'는 22회로 끝날 예정입니다.



태그:#정식영, #이대부고 , #최윤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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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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