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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가 이슬람화한다면?

어느 한 소설이 논란을 불러오는 건 그 소설이 갖추고 있는 핍진성(Verisimilitude, 그럴듯함) 때문이겠지요. 거짓을 진실처럼 보이게 하는 핍진성은 허구 속에 '믿을 만한 무엇'인가가 들어 있다고 믿게 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믿게 될 때는 그 무언가에 삶의 세밀한 면면이 세공되어 있을 때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은데 그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 삶에도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겠다' 싶어지는 것이죠.

 책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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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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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프랑스에 이슬람 정권이 들어선다.' 이 문장에는 가능성만 내포돼 있을 뿐 개연성도 희박합니다. 하지만 프랑스 소설가 미셸 우엘벡은 2015년 출간한 <복종>에서 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핍진성을 획득해 냅니다. 이야기를 읽은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논란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맙니다.

말도 안 되는 거짓이라고 밀쳐내고 싶지만, 생각해 보면 이 세상은 이미 거짓 같은 일들로 가득 차 있어 난감할 뿐입니다.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된다.' 이 문장이 진실이 될 줄 누가 예상이나 할 수 있었겠어요.

이 책이 인기와 논란을 함께 불러온 건 무슬림을 향한 유럽 사람들의 공포 때문입니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당 선언>의 첫 문장이죠. 어쩌면 이제 유럽인들에게 유령은 이슬람주의가 됐는지도 모릅니다. 일상 속으로 공포를 밀고 들어온 잔인한 테러 때문에 이제 유럽 어디에서도 평화는 당연한 것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테러 때문만은 아닙니다. 2015년 영국 통계청 결과에 따르면 그해 태어난 남아 이름 중 1위는 '무함마드', 여아 이름 1위는 '아멜리아'라고 합니다. '무함마드'는 이슬람 예언자의 이름이고, '아멜리아'는 아랍어로 '믿을 만한, 아름다운'이란 뜻이라고 해요.

무슬림의 이와 같은 높은 출산율은 그 자체로 유럽 사람들에게 공포로 다가갑니다. 난민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단순히 인도적인 차원에서만 해석하면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들에게 이 문제는, 미래의 역사와 관련 있거든요.

<복종>이 밀고 나간 두려움이 바로 이겁니다. 프랑스에 이슬람 정권이 들어선다면?이라는 도발적인 물음이 하고자 하는 말은 프랑스가 이슬람화한다면?이라는 것이죠. 프랑스 문화가 사라지고, 이어 유럽 문화가 사라지고, 그 위에 이슬람 문화가 온 유럽을 장악하게 되는 상황. 책에서 정권을 장악한 이슬람박애당이 하는 일이 바로 이런 거예요. 책은 말합니다.

"이슬람박애당은, 특히 경제를 모든 것의 중심에 두지 않죠. 그들에게 중요한 건 인구, 그리고 교육입니다. 인구를 구성하는 하위 집단은 출산율을 최대한 높여 자기들의 가치를 계승하는 게 승리하는 거예요. 그들의 눈에는 이보다 더 간단한 이치가 없죠, 경제니 지정학이니 하는 것들은 신기루일 뿐이에요. 아이들을 장악하는 자가 미래를 장악한다, 그것으로 얘기 끝이죠." - 본문 중에서 

그래서 이 책은 유럽에서 디스토피아 책으로 불립니다. 그들의 억눌린 두려움이 이 책에서 적나라하게 재현되고 있거든요. 차라리 전쟁에 의해 정복됐다는 설정이라면 흥미롭게 읽힐 소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많은 군비로 강력한 군사를 조직하면 예방할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이라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이슬람박애당은 결코 극단적인 이슬람주의를 표방하지 않습니다. 대통령은 꽤 똑똑하고 배포 있는 온건주의자입니다. 무엇보다 이 정권은 착실히 민주적인 절차를 거쳐 당선되었습니다.

유럽인들이 이 책을 더 디스토피아적으로 보는 이유입니다. 이슬람박애당은 결코 억지로, 우연히 당선된 것이 아니라 프랑스라는 토대 위에서, 프랑스라는 기질 위에서 탄생되었다는 사실. 자본주의가 창출한 개인주의와 허무주의가 프랑스인들 삶으로 파고든 지 오래입니다.

사람들은 뚜렷한 이유 없이 이미 무기력하고, 우울하며, 쉽게 좌절합니다. 딱히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 채 내일을 기다리지요. 혁명을 외치던 프랑스는 더는 없습니다. 대신, 침묵하는 언론, 정치와 타인에 무관심한 국민, 눈앞의 이익에 함몰된 기득권층과 지식인, 무력감, 자기 환멸, 자살충동 그로 인한 복종만 있을 뿐입니다.

프랑스에서 사라진 건...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프랑수아는 이런 프랑스의 은유와도 같습니다. 이제 고작 마흔네 살인 소르본 대학 교수 프랑수아는 마치 모든 것을 잃은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자기 안의 고독에 갇혀 주로 하는 일이라곤 여자와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겁니다. 가장 좋았던 시절은 지나갔습니다. 젊은 날 시간과 열정을 바쳐 써낸 논문 하나의 후광으로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이제 프랑수아에게는 열정을 바칠 그 무엇이 없습니다.

공허한 삶은 아주 좁은 시야만을 프랑수아에게 제공합니다. 그런 프랑수아의 눈에도 희미한 변화가 감지되긴 해요. 저 멀리서 테러가 발생하고, 티브이를 켜니 대선 토론이 진행 중이며, 들리는 소문으로는 이 나라에 이슬람 정권이 들어선다고 합니다. 정교분리는 막을 내리고, 남녀공학이 사라지고, 초등학교에서는 코란을 배우고, 모든 교사는 개종을 해야 하며, 여자들은 바지를 입는 세상. 이제 티브이에서 에로영화도 볼 수 없습니다.

이슬람 정권은 저항 없이 프랑스에 서서히 안착해 갑니다. 국민들은 권력을 잡은 이들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언론은 침묵을 통해 국민들 눈에 눈가리개를 씌우며, 지식인들은 혼란 속에서 자기 위치를 찾는데 주력합니다.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듯 하지만 아무도 나서서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니 세상은 모호하게 평화롭고 모호하게 불안하지요.

프랑수아는 "재앙이 임박했다는 직감"을 받으며 이제야 "피상적이고 단편적인 관심 외에는 정치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만 잠시뿐입니다. 세상을 향한 관심은 마치 요의처럼 화장실에 다녀오면 금방 사라지곤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프랑수아 주위엔 늘 프랑수아 본인의 실존적인 물음이 있을 뿐입니다. 나는 살아야 하는가, 죽어야 하는가.
프랑수아의 좁은 시야는 아마 의도적인 설정일 겁니다. 자기 자신에게 침잠한 한 개인이 세상을 보는 태도를 보여주기 위해서였겠지요. 그리고 바로 이러한 모습이 저자가 보는 프랑스인일 겁니다. 자기 안의 목소리가 너무 큰 탓에 절대 타인과 세상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 책을 읽는 내내 프랑수아는 타인이나 나라를 걱정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보이지 않습니다. 전 여자 친구를 잠깐씩 생각할 뿐이지요.

하지만 아무리 관심 없는 세상일지라도 그 세상은 프랑수아의 삶을 뒤흔들어 놓고, 뒤늦게야 깜짝 놀란 프랑수아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구원을 찾으러 잠시 떠났던 여행 뒤에 오열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경미한 각성도 없이 다시 소설이 시작한 이래 죽 견지하던 그 태도를 이어가지요. 개인주의자이자 허무주의자이면서 죽음을 늘 생각하는 고뇌하는 현대인. 그리고 그 현대인은 일말의 생의 의지를 따라 복종의 길로 들어섭니다.

책에서 프랑스는 언뜻 괜찮아 보입니다. 이슬람 정권은 결코 강경한 태도를 보이지 않으며 맛있는 당근으로 국민을 안심시키고, 은근한 채찍으로 국민을 단련합니다. 지식인들의 삶에도 큰 변화는 없습니다. 지위는 유지되거나 올라가고, 연봉은 높아지며, 달콤한 일부다처제도 마음에 듭니다.

디스토피아라고 하기에는 너무 평화로운 사회 같습니다. 그런데, 소설밖에 있는 우리에게는 이 평화가 참 끔찍합니다. 소설 속 그 누구도 그들이 잃은 게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있거든요. 프랑스에서 자유가 사라졌다는 것을요.

이슬람 혐오로 고소까지 당했던 미셸 우엘벡이 이런 내용을 소설화한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나를 공포로 몰아넣을 어떤 결과가, 나의 기질이나 성향, 또는 나의 좌절과 절망에서 비롯될 수도 있다는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였을까요. 그렇다기보다 저자는 프랑스인으로 대변되는 '나'의 실패를 말해보려 했던 게 아닐까 합니다.

근대 이후 줄곧 자기 자신을 추구해 왔던 '나'. 구원을 위한 한 조각 희망을 내 안에서 찾아 헤매던 '나'. 그런데 자기 자신을 깊이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오히려 무기력해지고 공허해질 뿐이라는 겁니다. 살아갈 이유가 사라지고 생의 의지마저 꺾일 정도로요.

나라는 존재는 내가 열렬히 추구할 대상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저 옆에 두고 가끔은 이야기도 하고 가끔은 멀어지기도 하면서 친구처럼 지내야 할 존재인 것이죠. 나에게서 멀어진 시간 동안에는 더 넓은 지향을 향해 눈을 돌리는 겁니다.

시간이 흘러 다시 나에게 돌아왔을 때에는, 그간 세상에서 얻은 색색깔 수확을 내 안에 선물로 채워 넣어주면 되고요. 이런 식으로 나와 세계가 공명하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게 삶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의 우리들은 자꾸 자기 안으로만 파고 들어가고 있는 거지요. 그 안에서 행복하지도 못할 거면서요.

덧붙이는 글 | <복종>(미셸 우엘벡 / 문학동네/2015년 07월 17일/14,500원)
개인 블로그에 중복게재합니다.



복종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문학동네(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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