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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 학원이 필요해
▲ 나 태권도 잘 하지? 태권도 학원이 필요해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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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학원 다니고 싶어"

출근길이었다. 막 7살 된 산들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고 있는데, 녀석이 뜬금없이 한마디를 툭 던졌다.

"아빠, 나 학원 다니고 싶어."
"응? 학원?"
"응. 학원."

학원? 7살 아이의 입에서 학원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올 줄이야. 설마 이 녀석이 벌써부터 공부를 하고 싶다는 건 아니겠지? 평소에 글씨 공부를 하자고 하면 "뺀둥뺀둥"하는 녀석이 무슨 학원을 가려는 것인지.

"갑자기 왜? 왜 학원을 가고 싶어?"
"응. 다른 친구들은 학원 다니거든. 나도 같이 다니고 싶어."

그러면 그렇지. 역시 녀석이 학원을 가고 싶은 이유는 뭔가를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친구들이 가니까 따라가고 싶을 뿐.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유아 조기교육에 찬성하지 않는 편인 난 우선 산들이에게 겁을 주기로 했다.

"학원 가면 막 공부해야 해. 글씨도 배워야 하고, 누나처럼 숙제도 해야 해. 그래도 다니고 싶어?"
"그래? 그런데 우리 반에는 학원 다니는 친구들이 많아."
"얼마나 되는데? 누구누구 다녀?"
"10명쯤. 수철(가명)이는 태권도 다니고, 영빈(가명)이는 미술학원 다니고... 또..."
"걔네들은 어린이집 끝나고 갈 데가 없어서 그런 거 아냐? 무슨 학원에 다녀. 그냥 놀아. 태권도 배우고 싶으면 아빠가 가르쳐줄게. 아빠 태권도 잘해. 미술은 나중에 고모한테 배워도 돼. 고모 화가잖아."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학원 다니는데 나만 못 다니고. 치. 너무해."

안녕 짜니
▲ 아빠 대신 개 돌보기 안녕 짜니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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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듯 말듯 한글
▲ 공부하고 싶은 둘째 알듯 말듯 한글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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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들이는 더는 대화를 잇지 못했다. 눈치를 보아하니 계속해서 조르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나의 대답이 너무 강고했던 탓에 차마 말을 꺼내지 못 하는 듯했다. 그냥 그러려니 하며 시무룩해지는 산들이.

부모로서 그런 둘째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안쓰러워졌다. 안 그래도 둘째라고 피해의식이 좀 있는 아이인데. 우리가 너무 한 건가? 그러고 보니 나도 저만할 때 태권도도 다니고 웅변학원도 다니지 않았던가. 물론 유치원에 안 가는 대신 간 거긴 하지만 어쨌든 요즘 같은 세상에 아이들을 이렇게 아무 데도 보내지 않는 것이 옳은 걸까?

그러나 고민도 잠시. 이내 마음을 고쳐먹는다. 7살. 아직 학원은 이르다. 더 놀 나이다. 어차피 내년 학교 들어가면 계속 공부 이야기를 들을 텐데 그 전에 신나게 놀아야지. 녀석은 놀이 속에서 스스로 자신의 재능을 발견할 것이며, 더 많은 상상을 하게 될 것이다. 나중에는 그 시간들이 자신의 가장 소중한 부분이 되겠지.

친구? 다행스럽게도 네게는 누나와 동생이 있지 않으냐. 남들처럼 친구가 없다고 굳이 학원 갈 필요도 없단다. 지금 아니면 삼 남매가 이렇게 놀 시간도 없을 테니,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더 싸우고 뒹굴며 우애를 쌓아가기 바란다.

친구 대신 형제
▲ 우리는 삼남매 친구 대신 형제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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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갓집에 즐거운 오후
▲ 외롭지 않아 외갓집에 즐거운 오후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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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어 순위에 오른 '만 5세 사교육'

지난 9일 언론들은 육아정책연구소의 육아정책 브리프 '영유아의 사교육 노출, 이대로 괜찮은가' 보고서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온통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과 관련된 뉴스들이 판을 치는 요즘 '만 5세 사교육'이 검색어 순위에 오른 것을 보면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끈 듯했다.

우리나라 만 5세 아동 10명 중 8명, 만 2세 아동 10명 중 3명 이상이 사교육을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부는 하루 일과의 4분의 1을 사교육으로 보내는 경우도 있어 영유아에게 과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인다. 육아 전문가들은 사회·정서 발달을 방해하고 불안, 우울, 공격성 등을 야기할 수 있는 영유아기의 무분별한 사교육을 규제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9일 육아정책연구소의 육아정책 브리프 '영유아의 사교육 노출, 이대로 괜찮은가'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2세(이하 만 나이) 아동과 5세 아동의 사교육 비율이 각각 35.5%, 83.6%에 달했다.....이 조사에서는 '어린이집과 유치원 이외의 학원, 문화센터, 가정 등의 장소에서 개인 및 그룹 교습으로 시간제 혹은 반 일제로 이뤄지는 예체능 활동과 학습 활동, 학습지와 온라인 학습'을 사교육으로 분류했다. (<연합뉴스> 2017.01.09)

2세아 및 5세아 사교육 프로그램 유형 비율
 2세아 및 5세아 사교육 프로그램 유형 비율
ⓒ 육아정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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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내용인즉 간단했다. 만 2세, 만 5세의 사교육이 너무 과하다는 것. 어떤 언론들은 이 보고서를 인용하며 기사 끝에 영유아 사교육에 대한 전문가들의 부정적인 견해를 실었으며, 또 어느 언론들은 더 나아가 내 아이를 좀 더 잘 키우고 싶다는 부모들의 욕망과 나만 뒤떨어질 수 없다는 죄수 딜레마를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과연 현실이 그럴까? 실제로 많은 부모가 우리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를 바라며 영유아 때부터 사교육을 시키는 걸까? 다른 사람들이 사교육을 시키니 우리 아이만 떨어지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부득불 사교육을 시키는 걸까?

현재 만 2세, 만 5세 아이를 키우고 있는 부모의 입장으로서 그것은 절반의 진실일 가능성이 높다. 이 기사는 커다란 진실을 하나 빠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를 영유아 때부터 사교육에 노출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는 사람들. 보고서는 그와 같은 사람들을 고려하지 않았다.

학원을 다닐 수밖에 없는 아이들

물론 어떤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을 더 잘 키우기 위해 조기교육을 시킨다. 아이가 좀 더 빨리 한글을 뗐으면 하는 바람에 학습지도하고, 영어는 어렸을 때 하는 게 효과적이라고 하여 영어 캠프를 보내기도 한다. 영유아 사교육의 부작용을 안 들어본 것은 아니나, 그 정도의 위험성은 감수한다. 대한민국이라는 무한경쟁의 사회에서 내 아이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직은 놀 나이
▲ 신나게 놀자구 아직은 놀 나이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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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그와 같은 교육관을 가지지 않았는데도 울며 겨자 먹기로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는 부모들이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사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개중에는 오히려 사교육에 부정적인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그들은 아이들을 학원에 보낼 수밖에 없다. 부부가 맞벌이 하면 그 긴 시간 아이들을 돌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가고 있지 않냐고? 안됐지만 그중 아이를 오랫동안 돌보는 곳은 흔치 않다. 국공립 어린이집의 경우 19시까지 아이를 돌봐주는데, 현재 국공립은 태부족한 상태이며, 다른 일반 사립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의 경우 꽤 큰 비용이 들어간다. 아니, 돈을 내겠다고 해도 선생님 눈치 때문에 오랫동안 아이를 둘 수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럼 양가 부모님에게 부탁을? 이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사는 지역이나 시간, 비용 등도 맞아야 하지만 무엇보다 부모님들의 건강에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우리 아버지 어머니 주변에도 손자들을 보다가 관절 관련 건강을 해친 분들이 많다지 않은가.

그러니 어쩌겠는가. 많은 부부가 부득불 아이를 학원에 보내는 수밖에. 사교육에 대해 부정적이라도 어쩔 수 없다. 부부 둘이 벌어야 그나마 가계를 유지하고, 야근을 밥 먹듯이 한다면 학원은 필수다.

이런 세태를 가장 잘 반영하는 것은 영유아들 학원의 진화다. 예컨대 태권도 학원을 보자(아마도 보고서에 등장하는 19%의 체육은 대부분 태권도 학원일 것이다). 태권도장에서는 더는 무도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신 아이 돌봄을 이야기한다.

태권도 사범들은 부모들을 대신해 아이들을 등 하원 시키고 심지어는 졸업식이나 학예회 때도 참여한다. 부모들이 요구하면 태권도장에서 선생님을 따로 두어 국영수 과목을 가르치기도 한다. 말이 태권도장이지 제2의 유치원, 어린이집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지급한 것은 사교육이 아니라 아이 돌봄에 대한 비용이다.

학원 대신 외갓집
▲ 글자 공부 학원 대신 외갓집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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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5세의 84%, 만2세의 36%가 사교육을 받는다는 언론의 문제 제기는 환영한다. 덕분에 많은 이들이 영유아 사교육의 폐해를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되었고, 우리 사회의 비정상적인 교육열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서는 안 된다. 왜 많은 부모가 아이들을 학원으로 내몰 수밖에 없는지, 이 구조를 깨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논의되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네 아이들을 궁극적으로 행복하게 만드는 길이다. 


태그:#육아일기, #영유아 사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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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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