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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부가 남긴 유산을 만 스물한 살에 물려받은 보들레르는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탕진하고, 거리의 여인 잔느 뒤발을 만나 평생의 연인이 된다. 아들의 생활을 보다 못한 어머니는 법원으
파리, 몽파르나스 묘지
 파리, 몽파르나스 묘지
ⓒ 김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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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파르나스 묘지(Cimetiére du Montparnasse)를 찾은 때는 고요하고 아늑한 일요일 오전이었다. 가을 냄새가 완연한 묘지 길을 산책하며 이파리가 하나둘 떨어져내려 쓸쓸함이 묻어나는 나무들 사이로, 이름난 이와 이름 모를 이들의 묘를 하나씩 하나씩 살펴보며 걷는다. 느린 걸음의 나 같은 방문객들과 간혹 눈을 맞추기도 한다.

이 사람들은 어떤 연유로 죽은 이들의 무덤을 애써 찾은 것일까. 이 좋은 휴일 아침, 오래 전 죽은 이들의 무덤 사이를 걷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차가운 비석에 새겨진 이름 몇 자 위로 무심한 눈길을 던지곤 주섬주섬 주워 담아 떠나는 일이, 누워 있는 그네들에게, 여기 서 있는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누군가의 묘비 앞에서, 심약해 보이는 하얀 얼굴의 청년이 같은 얼굴의 여인에게 낮은 목소리로 시를 읽어 주고 있었다. 시인지 편지인지 모를 일이다. 노란 편지지 위에 손으로 쓴 글자들이 얼핏 시처럼 보였고, 그의 목소리의 떨림이 시처럼 들렸다. 이들이 시작하는 사랑이 어쩐지 불안해 보인다.  

파리, 몽파르나스 묘지
 파리, 몽파르나스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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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걷다 보니 여행객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빙 둘러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꽤나 유명인사의 묘지인가 보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1908-1986)와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다.

둘의 이름과 생몰 연도 외에 아무것도 쓰여져 있지 않은 묘비 앞에서 가이드는 빠른 설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어떻게 만났고, 대학을 졸업할 때 어땠고, 계약 결혼이 어떻고, 누구와 교류했고, 무엇을 썼고, 죽어서 어땠고... 무심한 표정의 가이드는, 죽은 이들의 삶을 조각조각 다시 맞춰 흥미로운 이야기로 쏟아내느라 바빠 보였다. 사람들은 그 옆에서 사진을 찍느라 분주했다. 살아서 세상의 중심에 있었던 이들은 죽어서도 사람들을 끌어 모으나 보다.

파리, 몽파르나스 묘지
 파리, 몽파르나스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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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반해 샤를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 1821-1867)의 묘는 제대로 찾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한적했다.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확신 못하는 사람들이 낡은 지도를 들고 이리저리 기웃거리거나, 묘비 사이를 까치발로 옮겨 다니며 안내 책자와 묘비명을 번갈아 확인하다가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이 보들레르 묘 주변의 유일한 풍경이었다. 그나마도 엄마와 아빠와 아들로 보이는 백인 가족 하나와 젊은 흑인 부부 한 쌍이 전부였다.

사실 몽파르나스 묘지에서 보들레르의 묘비를 찾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가족묘라서 우리가 아는 시인의 이름이 전면에 크게 부각되어 있지 않은 것이 우선 큰 이유다. 몽파르나스 묘지는 워낙 면적이 넓어 안내판에 번호표까지 붙여 유명한 작가와 예술가와 철학가의 이름을 표기해 놓았고, 묘비명을 찾기 쉽도록 위치까지 일일이 표시해 두었지만, 계부의 이름 아래에 작게 표기된 보들레르의 이름은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파리, 몽파르나스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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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보들레르는 1821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프랑수아 보들레르(François Baudelaire, 1759-1827)는 환속한 사제 출신의 아마추어 화가였다. 환갑의 나이에 서른넷이나 어린 여자와 결혼을 하였고, 보들레르가 여섯 살이 되었을 때 세상을 뜬다. 어머니 카롤린느 드파이(Caroline Defayes, 1793-1871)는 2년 후 오픽(Jacques Aupik, 1789-1857) 장군과 재혼을 한다.

생부가 남긴 유산을 만 스물한 살에 물려받은 보들레르는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탕진하고, 거리의 여인 잔느 뒤발을 만나 평생의 연인이 된다. 아들의 생활을 보다 못한 어머니는 법원으로부터 '금치산선고'를 받아낸다. 매독과 실어증과 마비로 마흔여섯의 나이에 죽을 때까지 매달 일정액의 생활비를 받아 써야 했으며, 스물 몇 차례나 이사를 하며 도시의 셋집을 전전하는 고단하고 우울한 삶을 살아야 했다.

당시 파리는 제2제정기 나폴레옹 3세 통치하에 있었으며, 오스만(Baron Georges-Eugène Haussmann, 1809-1891)의 도시 개조 사업으로 나날이 새롭게 변모해 가고 있었다. 보들레르는 파리의 화려한 외면과 그 뒤에 가려진 음울한 풍경을 구석구석 '산보자(flâneur)'의 눈으로 탐색하며 강렬한 이미지와 상징적인 시어들을 쏟아낸다. 도시의 향락과 타락, 인간의 천박한 욕망에 대한 환멸을 끊임없이 독설로 쏟아 부으면서도 그곳을 떠나지 않고 평생을 그 안에서 신음한다. '파리의 시인'이라 불리는 이유다.

첫 시집이자 생전의 유일한 시집 <악의 꽃>이 출간된 것은 1857년 6월이다. 같은 해에 동갑내기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 1821-1880)의 <보바리 부인>도 출간된다. 그리고 이 두 작품은 재판에 붙여지는 초유의 사건을 겪는다. 무죄 판결을 받은 <보바리 부인>과 달리 <악의 꽃>은 유죄 선고를 받는다. "추잡하고 부도덕한 구절과 표현"을 담고 있고, "공중의 도덕과 미풍양속을 침해"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파리, 몽파르나스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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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미테이션 게임(The Imitation Game)>(2014)에서, 영국 드라마 <셜록(Sherlock)> 시리즈로 유명한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암호를 풀어내는 영국의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Alan Mathison Turing, 1912-1954)으로 분해 열연을 펼친다. 암호학 개론서를 읽으며 첫 친구와 암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있다.

"비밀이 아니란 게 엄청난 매력이지. 누구나 볼 수 있는 메시지인데 그 뜻을 알 순 없어. 단서를 찾아 풀어야 해."

암호학의 매력에 푹 빠진 친구가 이렇게 말하자, 사회 부적응자의 전형인 것 같은 얼굴과 표정과 몸짓으로 천재 수학자는 시큰둥하게 답한다.

"그게 말하기랑 뭐가 달라. 사람들은 말할 때 말 속에 다른 의도를 숨기곤 그걸 알아듣길 바래. 나는 전혀 안 그러거든. 나한텐 다를 바 없어."

파리, 몽파르나스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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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수없이 많은 암호로 코드화 된 언어가 떠다닌다. 타인의 언어를 이해하는 일만큼 어려운 일도 없다. 연인과 친구, 가족 등 가장 가까운 이의 언어를 이해하는 데에도 깊은 주의가 필요하고, 특별한 연대로 묶여진 일정한 그룹 내 공유되는 언어도 그것이 함유하는 의미를 찾아내려면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모두가 자신의 의도를 그대로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동네 아줌마와 아저씨들이 나누는 매일 매일의 잡담만 해도, 직장 동료들 간의 대화는 물론, 오래된 동기동창 사이 오고가는 대화만 해도 얼마나 많은 은유와 상징과 질투와 자긍심과 비아냥거림이 그럴듯한 조사와 어미들로 연결되고 포장되어 소모되는가. 보통 사람의 일상의 언어조차 이리도 피곤한데 시인의 언어에서야!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이 유죄 선고를 받은 것은, 자신의 생각을 그가 그리도 경멸했던 도시의 군중이 해독하기 어려운 암호로 코드화한 탓일까, 아니면 사회의 통념이 수용할 수 있을만한 수준으로 적절히 감추고 암호화했어야 했던 걸 하지 않은 탓일까.

몽파르나스 공동묘지 샤를 보들레르의 묘비. 계부의 이름 아래 새겨져 있는 그의 이름이 갑갑하다. '오픽'과 '보들레르'라는 두 이름의 이질감이 영 편치 않다. 죽어서도 자유롭지 못하니 그는 정말 그의 말대로 태생부터 저주 받은 시인인가.


태그:#파리 여행, #몽파르나스 묘지, #보들레르, #악의꽃, #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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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넘나드는 여행을 통해 시대를 넘나드는 기호와 이야기 찾아내기를 즐기며,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인문학자입니다. 이중언어와 외국어습득, 다문화교육과 국내외 한국어교육 문제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대학교수입니다. <헤밍웨이를 따라 파리를 걷다>, <다문화 배경 학생을 위한 KSL 한국어교육의 이해와 원리> 등의 책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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