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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 하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20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한국 특파원들과 기자회견 하고 있다.

반 총장은 대권 도전 여부를 묻는 질문에 명쾌하게 답변하지는 않았지만 "대한민국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제 한 몸 불살라서라도 노력할 용의가 있다"는 등의 말을 되풀이해 사실상 대권 출사표를 던진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지난 12월 20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한국 특파원들과 기자회견 하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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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 보니 유명해져 있었다."


영국 시인 바이런의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은 오히려 한국의 반기문에게 더 잘 어울린다. 2007년 유엔 사무총장으로 선출되면서 하루아침에 이름과 존경을 얻었기 때문이다.

반기문은 유엔 사무총장이 되기 전까지 40년 가까운 시절을 외교 공무원으로 살았다. 관운도 꽤 좋은 편이어서, 일찌기 청와대 외교안보수석비서관 자리까지 올랐다. 그게 1996년이었으니, 유엔의 수장이 되기 10여년 전의 일이다. 하지만 그 시절의 반기문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2006년 초, 외교부 장관이던 반기문이 유엔 사무총장 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할 즈음,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은 "외교적 무능"을 이유로 몇 번이나 그의 해임을 요구했었다.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었던 전여옥은 "반기문의 사무총장 출마 선언은 국제사회의 조롱거리"라며 비난하기도 했다.

반기문이 유독 보수세력에게만 인기가 없던 것은 아니다. 그는 외교 수장으로 2004년 김선일 피살사건뿐 아니라, 2006년에 잇따라 발생한 소말리아 동원호 피랍사건과 대포동2호 미사일 발사 등의 사태에 조속하고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실제로 김선일씨가 납치되었을 때, 반기문이 한 일은 구출을 위한 작전이나 교섭 방안 마련이 아니라 "테러리스트의 만행을 규탄하는 성명을 채택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이후에도 그가 한 일은 알자지라 방송에 나와 석방을 '호소'하는 것뿐이었다. 이후 김씨가 살해되었고, 책임론이 대두되자 반기문은 이렇게 반박했다.

"미국은 국민 두 명이 참수됐는데도 국무부에 항의전화 한 통 없었다. 위험 지역에 가면 국민 스스로 안전에 책임져야 한다."

반기문의 특기, '우려'와 '호소,' 그리고 '원만한 인간관계'

"이 문제는 여기와 시차가 많이 있어서 인근 국가들의 협조받아 조속한 시일내 석방되도록 노력하겠다."

2006년 4월 5일, 동원호가 납치된 다음 날 반기문이 한 말이다. 하지만 이후 외교부가 일관되게 보인 태도는 "테러범과는 협상 없다"였다. 이런 말은 정부가 군사적 대응이나 보복을 무기로 상대를 압박할 때 주로 쓰는 말이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비밀 구출 작전 같은 것은 염두에 두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외교부는 아무런 성과 없이 석달을 흘려보냈다. 문화방송의 <피디수첩>은 "피랍 100일, 소말리아에 갇힌 동원호 선원들의 절규-조국은 왜 우리를 내버려 두는가"편을 방송했다. 외교부는 이에 대해 '협상을 어렵게 한다'며 방송사를 맹렬히 비난했다. 이후 정부는 현지 취재를 했던 김영미 피디를 출국 금지 시켰고, 외교부는 방송사에 민사소송을 걸었다.

다섯 달이 지나도 선원들은 풀려나지 못했다. <조선일보>는 "152일째, 소말리아 피랍 선원 4인은 지금…"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을 비판했다. 외교부가 선주에게 "테러단체와는 협상을 할 수가 없고, 외교통상부 예산이 부족해서 협상금도 낼 수 없다"고 선주 안현수씨에게 통보를 해왔다는 것이다.

그는 "내가 갖고 있는 돈 10만 달러는 이미 1차 협상 때 다 내놓았다"며, "140일이 넘게 협상을 끌어오던 정부가 이제 와서 뒤로 빠지면 납치된 선원들은 누가 구해내느냐"고 항의했다.

2006년 7월 북한이 대포동 미사일을 발사하자, 반기문은 장차 유엔에서 '유일한 특기'로 알려지게 될 조처를 취했다. 그것은 '우려' 성명을 발표하는 것이다. 그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징후와 관련해 한미 양국이 깊이 우려하고 있다"면서 "북한이 그와 같은 상황 악화조치를 취하면 안된다는 데 인식을 같이 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정희, 전두환부터 이명박, 박근혜까지 모두 '마음에 쏙 들어한' 반기문

 지난 22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글로벌 반기문 국민협의체 발기인 대회가 열리고 있는 모습.
 지난 12월 22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글로벌 반기문 국민협의체 발기인 대회가 열리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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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은 이후  끈질기게 쏟아지는 '경질' 요구로부터 반기문을 지켜냈고, 결국 그를 유엔으로 보내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반기문을 '노무현 사람'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물론 그 자리에 앉게 된 데에는 참여정부의 전폭적 후원의 힘이 컸지만, 그에게 초고속 승진의 행운을 안긴 이는 김영삼이었다.

반기문은 1995년 2월에 외교정책기획실장에 임명되고, 같은 해 12월 말에 외무부 제1차관보로 자리를 옮겨 외무부 실세로 부상한다. 그런 뒤 채 두 달도 안 된 1996년 2월에 반기문은 청와대 의전수석이 되었고, 그해 11월에는 외교안부수석 자리에 올라 김대통령을 최측근에서 보좌하게 되었다. 당시 <부산일보>는 그의 영전 소식을 전하며 이렇게 평가했다.

"치밀한 일처리와 세련된 매너를 겸비한 직업외교관…한, 미, 일 차관보급 고위협의회 당시 외무부 1차관보로서 대북정책 조율 작업을 깔끔히 처리, 곧바로 청와대 의전수석에 발탁되는등 김영삼 대통령의 눈에 쏙 들었다는 후문. 50대 초반에 일국의 외교안보정책을 사실상 총괄하는 외교안보수석으로 발탁된데에는 김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과 함께 빈틈없는 실무능력이 고려됐다는 것."

하지만 반기문을 '눈에 쏙 들어한' 대통령은 김영삼만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박정희 시절인 1974년에 인도대사관 2등 서기관이 되었다. 1980년 전두환 밑에서는 외무부 국제조직조약국 과장으로 승진했으며, 1992년 노태우 때 주미공사가 되었다. 민주화 이후 김영삼 때에는 청와대에 입성했고, 김대중 대통령 때에는 외교통상부 유엔본부 대사가 되었다가, 노무현 대통령때 평생 꿈꾸어 온 바로 그 자리에 올랐다.

반기문을 평가하는 모든 언론이 공통적으로 쓰는 말이 있다. "원만한 인간관계", "세련된 매너", "적이 없다"는 세 가지 표현이다. 이 평가는 옳은 것으로 보인다. 김대중 대통령 때 잠시 주춤하기는 했으나, 반기문은 혹독한 군사독재시절부터 민주화 정부를 거쳐 '신권위주의 정부'라 할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출세가도를 달렸기 때문이다.

반기문의 그 놀라운 '인간관계'의 비결이 뭘까?

모두가 알듯, 이명박 대통령은 열심히 페이스북을 한다. 지난해 1월 초, 그는 페이스북에 반기문 총장이 "새해 인사차 전화를 해 왔다"는 글을 올렸다. 전직 대통령에게 문안인사를 한 반 총장이었으니, 현직 대통령을 건너뛸 리 없었다.

역시, 청와대는 반기문 총장이 박대통에게 전화로 문안 인사를 했다고 밝혔다. 특히 한일 위안부 협상에 대해 "축하한다"면서, "박근혜 대통령께서 비전을 갖고 올바른 용단을 내린 데 대해 역사가 높게 평가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전해 왔다는 것이다.

2016년만이 아니었다. 박 대통령은 2015년에도, 2014년에도 그로부터 새해 전화 인사를 받았다. 하지만 올해만은 유독 전화를 받지 못했다. 대신 그의 안부전화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인 이희호 여사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인인 권양숙 여사에게 갔다.

반기문의 귀국이 코 앞에 다가온 현재, '반사모'는 그를 맞을 준비로 분주하다. 이 모임의 회장 임덕규는 촛불시위가 뜨겁던 12월 초, "인연을 따지면 반 총장이 박 대통령보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더 까깝다"고 말했다.

반기문이 불과 몇 달 전까지 '박근혜의 남자'로 불렸던 사실을 생각하면 놀라운 변화다. 그는 지난해 9월 15일 미국을 방문한 여야 의원들을 만나, "박근혜 대통령은 한반도 주변 4강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정상들과 소통하고 정상 간의 외교도 잘하고 있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었다.

2015년 9월 미국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을 처음 만난 이도 반기문이었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 다음 연설자로 나선 자리에서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에서 산불처럼 새마을 운동이 번지고 있다"고 분위기를 띄웠다. 그는 같은 연설에서 "맨해튼 중심에서 새마을운동이 진행되고 있다"는 다소 민망한 발언까지 했는데, 박근혜 대통령은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이후 두 사람은 20분간 비공개 면담을 가졌다.

우리는 여기서 반기문의 '대인관계 철학'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그것의 권력자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환경의 변화에 따라 끝없이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

대선주자로 돌아온 반기문

이번 주 목요일(12일), 반기문은 유력 대선주자로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반기문은 귀국한 뒤 세월호 참사 현장인 진도 팽목항을 찾고,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에도 참배할 계획이다. 그 전에 이승만·박정희·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 묘역을 차례로 참배할 예정이고, 전두환도 예방해 귀국 보고를 할 의향도 있다고 한다.

반기문은 이를 '국민 대통합'의 상징적 제스처로 생각하겠지만, 그보다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요약해서 보여주는 행위에 가깝다. 그가 누려 온 지위를 그렇게 해서 얻었듯, 대통령 자리도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미국에서 10년 넘게 지낸 그이니, 이럴 때 쓰는 영어 속담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모두의 친구는 누구의 친구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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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통신원입니다.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언론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 기...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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