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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 시대의 그림은 바라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으로 시작된 일종의 주술적 행위었다. 지금은 비록 2017년이지만, 세월호 참사 1000일에 우리에게 반드시 일어나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바닷속에 가라앉은 세월호의 진실이 우리 눈 앞에 떠오르는 것이다.
▲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구석기 시대의 그림은 바라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으로 시작된 일종의 주술적 행위었다. 지금은 비록 2017년이지만, 세월호 참사 1000일에 우리에게 반드시 일어나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바닷속에 가라앉은 세월호의 진실이 우리 눈 앞에 떠오르는 것이다.
ⓒ 권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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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한가운데서 바다를 바라보다가

'아, 더 이상 나는 바다를 좋아할 수 없구나. 바다를 보고 떳떳할 수가 없구나.'
 
그때 깨달았다. 독일에 온 후, 타지에서의 삶이 피로하여 오랜만에 바다를 보았을 때, 그렇게 내가 좋아하던 바다를 보면 후련하고 시원해질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넘실거리는 푸른 바다를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마음이 점점 가라앉았다.

왜 그런가 싶어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발트해의 바다는 세월호가 가라앉아있는 그곳과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바다는 하나이니까, 바다는 늘 이곳과 저곳에서 움직이고 있으니까, 바다는 경계 없이 모두 연결되어 있으니까.
 
이곳과 그곳이 아무리 멀다 해도, 출렁거리는 바다를 보면 2014년 4월 16일이 생각난다. 그래 봤자 그날(4월 16일)의 나의 기억이란 베를린에서 독일 뉴스로 접한 팽목항의 모습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세월호가 바다에 잠겨있는 한, 그곳이 세계 어디든, 바다를 보면 세월호가 떠오를 것이다.
 
베를린의 어느 지하철에서 딱 봐도 여행객인 한국인이 나를 쳐다본다. 보나 마나 내가 한국 사람인지 아닌지 살펴보는 것이다. 나의 가방에 달려있는 노란리본을 본다. 순간 그는 흠칫 놀란 눈치다. 그리곤 다시 내 얼굴을 쳐다본다. 그 시선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수 없다.
 
1000일 동안, 한국이 아니라도, 그곳이 어디든, 내가 어디에 있든, 가방에 노란리본을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세월호를 기억하는 베를린 행동에서는 1000일 동안 진상규명을 위한 싸움을 이어온 유가족들을 위해 영상편지를 제작했다.
 

세월호 이후, 그곳이 어디든 변하지 않은 자, 모두 유죄

한국으로부터 무려 8500km가 떨어져 있는 독일이지만 베를린, 뮌헨, 프랑크푸르트에서 1000일이 넘는 시간 동안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을 끊임없이 이어가는 사람들과 '세월호 참사 이후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하나] 세월호를 추모하기 위해 6시간 걸려 추모집회에 참석했다
- 이수빈, 학생, 하이델베르크 거주, 하이델베르크 대학 의학과 재학 중
"2014년 4월 16일, 그날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학교 수업 때문에 강의실에 앉아 있었어요. 우연히 휴대전화로 뉴스 기사 제목만 보고 '아이고, 그런 사고가 일어났구나…' 정도로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날 수업이 끝나고 집에 들어가서 남편과 같이 저녁 먹을 준비하며 하루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중에, 그 세월호에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못 나왔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때부터였어요.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배는 물속에 들어가 버렸는데 그 안에 사람이 아직도 살아있을지도 모르는데, 지금 시간이 가고 있는데, 하면서 독일에서 구조소식을 실시간으로 계속 쫓아가며 확인하기 시작했을 때가요. 그다음 날, 하루 이틀 그리고 일주일 동안은 수업을 들어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독일 친구들이 평소처럼 떠들고 웃고 잡담을 나누는데 같이 할 수 없었어요.
 
같은 학과 독일 친구들이 세월호 참사는, 왜 참사 원인규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지, 왜 구조 활동이 최선을 다해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서로 질문을 던지면 대화가 진행되지 않아요. 저도 제 친구들도 이해를 못 하니까요.
 
이번 7일 토요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진행했던 세월호 1000일 집회 때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고 몇 번을 불렀어요."
 
[둘] 베를린에서 사진으로 세월호 참사의 1000일을 기록한다
- 박기춘, 베를린 거주, 포토그래퍼

"세월호 참사 이후, 2014년 5월 18일 침묵 행진 시위는 베를린에서 있었던 첫 시위였는데요. 사고 이후 정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많은 분들이 참여했습니다. 그날 모임 이후로 세월 베를린행동은 단체로 이루어지지 않고, 자유로운 형태의 모임으로 발전되어 많은 문화행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독일에서 접하는 한국 소식은 거리와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독일에 있지만 한국인이니까요. 세월호 참사는 그동안 썩어 있던 대한민국의 상황에서 비롯된 참사입니다. 가만히 정부의 탓만 한다고 해서 변화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변화돼야 하고,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찾아야 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참사 이후 온갖 부정부패, 박근혜 탄핵, 국정농단 사건으로 혼란한 시국입니다. 세월호의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도 그중 하나에 있겠죠. 1000일이 지난 지금 아직도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세월호 사건은 우리 사회에 가장 큰 경종을 울린 사건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진상규명을 위해 힘써 오고 있는 모든 분들께 감사와 격려의 말씀을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세월호의 진상규명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깨어나고, 더 나은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합니다."

세월호 참사 1000일이 지났어도, 독일에서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좌측부터 이수빈, 박기춘, 신승희, 임혜지 교민
 세월호 참사 1000일이 지났어도, 독일에서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좌측부터 이수빈, 박기춘, 신승희, 임혜지 교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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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 한 아이의 엄마로서 독일에서도 세월호 참사를 끊임없이 알릴 것
- 신승희, 베를린 거주, 훔볼트 대학 정치학 박사 과정

"2014년 부활절 방학에 잠시 한국에 방문했을 때, 아침에 세월호 참사를 TV 자막으로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저희는 그날 일본으로 휴가를 떠날 예정이었기 때문에 바쁘게 준비했고, 중간에 '전원 구조'라는 뉴스를 접하면서 안심하면서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를 탑승했습니다. 하지만 도착해서 너무나도 말도 안 되는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계속 눈물이 나오고,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싶어 계속 우니까, 저희 남편이 '왜 이러냐'고 그랬습니다. '우리 아이라고 생각해봐라, 이게 말이 되는 일이냐'고 하자, 애 아빠가 왜 멀쩡한 애를 세월호에 갇힌 아이들과 비교하냐며 언쟁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부모들이 그랬을 것 같습니다.

내 아이는 무사해서 다행이다, 내 아이는 지금 내 옆에 안전하게 있는지 확인하고서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안타깝게 세월호를 바라보았습니다. 지금은 그들이지만 나중에는 내 아이가 바로 그 자리에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기엔 무서웠던 것 같아요.
 
세월호를 생각하거나, 세월호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쿵쿵 뛰면서 마음이 아리도록 아픕니다. 저희들이 매달 셋째 주 토요일에 브란덴부르크문에서 하던 세월호 행사를 보고서 한국에서 오신 한 관광객은 우리들에게 세월호 유가족들에 대한 비난의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을 보며 지금 한국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나 하고 공포심을 느끼기까지 했습니다.
 
자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다 알 텐데, 한국 사회에서는 유가족들이 자식을 내세워서 돈을 벌려고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의도적으로 유가족들의 의도를 곡해해서 보도하는 언론들을 보고서 '한국의 미래는 없구나'라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넷] 세월호는 철저한 개인주의자인 나를 거리로 나서게 했다
- 임혜지, 뮌헨 거주, 건축사학자, 유치원 교사

"세월호 참사가 저를 거리에 나서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한국에서 수모받고 계시는 유가족들에게 '우리도 여기 함께 있어요'라는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방식만 고집하며 살기엔 세월호 참사가 너무도 무거웠고, 유가족분들께 도움이 되는 거라면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생전 처음으로 집회라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거의 매달 빠지지 않고 하는 세월호 집회는 제게 연대의 기쁨과 힐링을 주고 있어요.

하루는 뙤약볕이 무섭게 내리쬐는 어느 여름날 길가에 서서 세월호 진상규명 포스터를 들고 침묵집회를 벌일 때였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저희가 안 되어 보였는지 저기 그늘에 가서 하라고 일러줬습니다. 그때 저는 행인들 눈에 가장 잘 띌 수 있는 장소에 서 있는 거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집회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설명은 다 듣고 난 독일 사람들은 저에게 자기들이 도와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 정부가 세계 시민의 주목과 감시를 받고 있다는 걸을 알려주기 위해 투명한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국제 서명을 부탁했고, 그들은 기꺼이 서명해주었습니다. 가면서 그들은 우리에게 불의를 외면하지 않는 성숙한 시민의식을 가져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더군요.
 
또 한 번은 거리 집회에서 서명운동을 벌일 때의 일입니다. 어떤 독일인이 와서 포스터를 유심히 보더니 큰 소리로 화를 냈습니다. 세상에는 부조리와 부정부패가 판을 치는데 여기서 당신들이 이러고 서 있다고 한국에서 뭐 하나 변할 줄 아느냐고.
 
저는 뭔가 노력이라도 해야 변화를 기대할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억울하게 자식을 잃고 진실을 알기 위해 외롭게 투쟁하고 있는 유가족들에게, 그리고 한국 정부와 정치계에게 독일에서라도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여기 서 있는 것이니 당신은 서명하기 싫으면 그냥 가시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갑자기 서명용지를 빼앗듯이 잡아당겨 서명을 하고는 행운을 빈다고 퉁명스럽게 인사하고 가버렸습니다. 독일이기에 겪는 에피소드입니다."

베를린에서 진행되었던 세월호 진상규명 집회들
 베를린에서 진행되었던 세월호 진상규명 집회들
ⓒ sewolber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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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1000일, #세월호, #영상편지, #독일, #베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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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시각예술가로 활동하다, 독일 베를린에서 대안적이고 확장된 공공미술의 모습을 모색하며 연구하였다. 주요관심분야는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사회 공동체안에서의 커뮤니티적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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