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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6일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한 고 윤희왕씨의 빈소 전경
 ▲ 지난 6일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한 고 윤희왕씨의 빈소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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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급성심근경색으로 사망한 장애인활동보조인 고(故) 윤희왕 씨. 낮에는 활동보조인, 밤에는 신문배달부로 지독하게 억척스런 삶을 살았던 그의 삶은 타고난 숙명이었다.

농아인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에게 장애인의 굴곡진 삶과 가난은 어쩌면 운명이었다. 어려서부터 익숙했던 신문배달 일은 인생 마지막까지도 가난의 대물림을 끊으려는 수단이 됐다. 장애인의 아들로서 익숙한 아픔은 다시 장애인에 대한 사랑으로, 활동보조인으로 연결됐다.

"수영 강습이 끝나고 샤워를 하는데 한 장애인이 그만 참지 못하고 선 채로 '큰 것'을 보고 말았어요.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다들 놀라서 가만 있는데 그 때 윤씨가 재빠르게 다가갔어요. 그리고 두 손을 벌려 손에 받기 시작했어요."

윤씨와 함께 장애인 활동보조 일을 했던 동료가 고인을 회상하며 꺼낸 일화다. 또 다른 동료는 "분회장 만큼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하던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다른 활동보조인이 꺼려하는 대소변 뒷정리나 관장 같은 일을 자신이 맡은 장애인도 아닌데 직접 나서서 했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송상호 다사리학교장은 "활동보조 업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누구보다 장애인의 아픔을 잘 이해했던 사람이다. 그는 장애인이 자립 할 수 있도록 조언하고 유도하고 힘이 돼주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윤씨는 장애인의 가족이기도 했다. 윤씨는 재단사 일을 했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 모두 농아인이었다. 윤씨의 동생은 "형과 우리 형제는 어려서부터 농아인 만이 겪는 비장애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세계를 보고 자랐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농아인의 자녀로서 농아인과 비농아인의 경계에 살았다. 형이 나중에 장애인과 깊은 유대감을 가질 수 있던 것도 부모님의 영향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가난·가출·신문배달

장애를 가진 재단사의 아들이었던 윤 씨의 가정환경은 넉넉지 않았다. 윤씨의 동생은 "중학교 때 학습 준비물을 마련하지 못한 뒤 형이 가출을 했다"고 말했다. 윤씨의 삶은 이후 가난한 어린 청소년노동자들이 겪는 비슷한 패턴을 걸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어린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음식점 주방보조나 배달, 신문배달 같은 일이었다.

가족들에 따르면 고인의 삶은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듯 하면 새로운 시련에 맞닥뜨리기 일쑤였다. 그의 동생은 "형은 금전적 사기를 당하기도 했다"며 "결정적으로 하던 사업도 잘 안돼 이곳 청주로 이주해 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가장 어려운 환경에서도 윤 분회장은 더 억척스러워졌다.

송상호 다사리학교장은 "고인과 2005~2006년경 처음 만났다. 늘푸른야학 교사로 있었는데 그가 이 학교에 왔다. 1년만에 고등학교 검정고시 과정을 마치고 방송통신대학교에 진학했다"고 말했다.

송 교장은 윤 분회장이 방송통신대학교 교육학교에 입학했다고 말했다. 그는 "고인이 이과를 선택한 것은 장애인과 함께 하기 위해 평생교육사 자격을 취득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고인은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갔지만 자녀의 성장과 가난은 계속해서 질곡으로 다가왔다.

윤씨는 2013년 인터넷 언론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다사리 자원자립센터라는 곳에서 장애인 활동 보조 지원 인력 일을 한다. 한 달 내내 일을 해도 100만 원이 안 된다. 애가 둘인데 둘 다 대학을 다녀서 투잡, 쓰리잡은 기본이다. 항상 피곤하고 지금도 자고 싶다. 오늘도 아홉 시에 자야지 (내일) 한 시에 아르바이트를 나갈 수 있다"고 밝혔다.

가난의 수레바퀴, 장애인활동보조인의 열악한 노동조건

그는 "1급 중증 장애인에게만 활동 보조가 지원되는 거니까 거의 거동을 못 하시는 분들을 돌보는 거다"며 하루 일과를 소개했다. 그는 "아침에 자는 사람 깨워서 휠체어에 태워 밥 챙겨 먹여요. 외출할 때 동행하고요. 가정으로 직접 가니까 부인 빨래, 애들 빨래를 시키기도 하고 고추 따기를 시킨다는 분도 있어요. 못하겠다 그러면 오지 말라 그러고요"라고 말했다.

이어 "일이 힘들지만 그나마도 일거리가 없어 100만 원 정도의 급여도 보장이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윤씨의 억척스런 성격은 그가 말한 대로 투잡, 그리고 쓰리잡으로 이어졌다. 자신이 겪은 가난을 대물림 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그가 가난을 끊기 위해 투잡으로 선택했던 일은 신문배달. 어려서 가난 때문에 시작했던 일이 결국 50대를 지난 현재까지도 이어졌다.

주변사람들은 윤씨의 억척스러움에 대해서 다들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든다. 그의 한 동료는 "억만금을 준대도 분회장처럼 하기 힘들 것이다. 이제 아이들이 대학을 다 졸업해 고생이 끝나는가 싶었는데 이 일을 당해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윤씨의 죽음에 대해 "과로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비정규노동자의 삶.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는 활동보조인의 노동환경. 고인의 죽음에서 한국사회의 잔인함을 발견한다는 것은 과한 비판일까?"라고 질문했다.

그의 마지막을 지키며 떠나보내는 이들은 그에 대해 '착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또 "착한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라고 평한다.

윤씨는 세상을 등지기 직전까지 그 잔인한 한국사회에 대해 호소했다. 서울 국회까지 올라가 장애인활동보조인들의 부당한 처우를 알리는 행동을 했고 이승훈 청주시장에 만남을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호소에 한국 사회는 아직 응답하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충북인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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