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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쪽으로 들어가시죠. 원래 사진 촬영은 금지입니다만 한국에서 오신 기자를 위해 특별히 허용합니다. 하지만 유리문 밖에서 보셔야합니다."

5일 찾은 관세음신앙의 명소인 연화원 홍명사 (蓮華院弘明寺, 렌게인구묘지)의 미마츠간다이(美宋寬大) 부주지 스님은 기자를 본당(대웅전) 안쪽 깊숙이에 모셔져 있는 11면관세음보살상(줄여서 관세음상) 앞으로 안내했다.

높은 천정의 조명은 흐리지만 관세음상 앞에 켜둔 여러 개의 촛불이 서로 관세음상을 비추려는 듯 흔들거리며 밝기를 조절해주는 듯했다. 아! 이 불상이 1300여 년 전 백제계 행기스님이 직접 만든 불상이라니 기자는 합장하여 예배했다.

백제계 행기스님이 손수 깎아 만든 관세음상으로 기자에게 최초로 공개했다. 유리관 안에 있어서 모습이 선명치 않다
▲ 관세음상 백제계 행기스님이 손수 깎아 만든 관세음상으로 기자에게 최초로 공개했다. 유리관 안에 있어서 모습이 선명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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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관 속의 관세음상이 선명치 않아 절에서 만든 홍보자료에서 관세음상을 따로 갈무리 한 사진
▲ 관세음상 유리관 속의 관세음상이 선명치 않아 절에서 만든 홍보자료에서 관세음상을 따로 갈무리 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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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서 만든 행기스님 작품이라고 쓴 '국보십일면관음' 판
▲ '국보십일면관음' 판 국가에서 만든 행기스님 작품이라고 쓴 '국보십일면관음'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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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촬영 금지 구역에서 부주지 스님이 관세음상 앞에선 기자를 찍어 주었다
▲ 사진촬영 사진촬영 금지 구역에서 부주지 스님이 관세음상 앞에선 기자를 찍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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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계 행기스님이 손수 깎아 만든 관세음상으로 기자에게 최초로 공개했다. 유리관 안에 있어서 모습이 선명치 않다.

"행기스님이 만든 이 불상은 1도삼례(一刀三禮)로 만든 것입니다. 곧 칼집 한 번 내고 세 번 절하고, 칼집 한 번 내고 세 번 절하는 방식이지요. 그만큼 정성이 많이 들어 간 것으로 보시면 됩니다. 홍명사의 관음상은 관동지역에서도 그 형식이 아름답기로 으뜸입니다."

부주지 스님은 관음상을 우러러 보고 있는 기자에게 그렇게 말했다. 이 역시 한국 최초 공개 불상이다(기자는 군마현의 미즈사와절에 있는 고구려 혜관스님 상을 최초로 공개한 바 있다).

"천천히 구경하시고 관세음상을 비롯한 모든 것을 맘대로 사진 찍으셔도 됩니다" 라는 말을 남긴 채 종무소로 돌아가려는 부주지 스님에게 기자는 카메라를 건네며 관세음상을 배경으로 기자를 넣어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흔쾌히 사진을 찍어준 부주지 스님은 황급히 종무소로 나가버렸다.

정초 일본의 절은 우리의 석가탄신일 못지않게 바쁜 철이다. 한해의 복을 빌고 나쁜 액운을 털어내는 시기이기에 절손님이 아닌 외부 사람을 독대해서 시간을 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부주지 스님이 나가버리고 좁은 법당 안에는 기자와 11면관세음상만이 덜렁 남았다. 어두침침한 공간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정막을 깨고 기자는 이내 관세음상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관세음상은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왜 이제야 왔냐?"는 듯 입도 다문 채 1300여년의 시간을 달려온 관세음상의 왼손에는 연꽃 한 송이가 들려 있었다. 꽃병을 움켜쥐고 가슴 쪽으로 치켜 든 모습이 마치 금방이라도 기자에게 주려는 모습 같아 유리관이 있다는 것을 깜박 잊고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보았다.


11면관세음상 옆, 작은 유리관 안의 전시품 가운데는 창건 당시의 기왓장도 있다
▲ 기왓장 11면관세음상 옆, 작은 유리관 안의 전시품 가운데는 창건 당시의 기왓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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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실 안에는 11면관세음상을 부위별로 찍어 놓은 사진이 있다
▲ 11면관세음상 전시실 안에는 11면관세음상을 부위별로 찍어 놓은 사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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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기스님의 작품이라고 전해지는 관세음상은 나타보리(鉈彫り)형식이다. 나타보리란 쉽게 말해 통나무에 약간 거친 듯한 끌 자국을 그대로 두어 만든 조각형식으로 투박하지만 매끄러운 불상보다 정감이 가는 느낌이다. 이러한 양식은 헤이안시대 이후 관동지역에서 유행하던 양식으로 관동에 몇 안남은 아름답기로 유명한 불상이다. 키 180센티의 관음상은 훼손 방지를 위해 커다란 유리 상자 안에 넣어 좌대까지 만들어 안치하다 보니 참배객들은 관음상을 우러러보게 되어 있다.

<홍명사 사전(弘明寺 寺傳>에는 다움과 같은 내용이 있다.

"홍명사는 천평 9년(天平 9年, 737), 천하에 악성 전염병이 돌자 조정에서 행기스님에게 칙명을 내려 천하태평기원을 위한 절을 짓게 해서 창건한 절이다. 행기스님은 이곳에서 1도삼례(一刀三禮, 한 번 칼을 쓰고 세 번 절을 하는 방식)로 혼신의 힘을 다해 현재의 본존불인 11면관세음보살상을 만들어 모셨다. 가마쿠라시대까지는 구명사(求明寺, 구묘지)로 불리다가 관세음경의 '홍서심여해(弘誓深如海)'에서 '홍(弘)'자를 따다가 '홍명사(弘明寺, 구묘지)가 되었다."

오호라. 그런 사연이 있었구나 싶었다. 사실 일본어를 전공한 기자의 상식으로 홍명사(弘明寺)는 코우묘지(こうみょうじ)로 발음이 나야하는데 구묘지(ぐみょうじ)라고 해서 의아했었다. 실제로 요코하마에서 케이큐선(京急線)을 타고 홍명사역(弘明寺驛)에서 내릴 요량으로 열차안의 방송에 귀를 기울였으나 구묘지(그것도 우묘지로 들림)라는 말만 나와서 이상하다 싶었는데 홍명사 절 이름의 변천을 듣고 이해가 갔다. 한자가 '구(求)'에서 '홍(弘)'으로 바뀌면 발음도 그렇게 바뀌어야 하는데 발음을 그대로 두는 것은 일본 스타일이다.

판동33소관음순례(坂東33所觀音巡禮) 제14번 도량인 홍명사도 명치때 법란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바로 명치정부의 폐불훼석(廢佛毁釋, 하이부츠키샤쿠)의 광풍이 몰아쳤기 때문이다.


관세음성지 관동 제 14번째 절 홍명사 본당
▲ 홍명사 관세음성지 관동 제 14번째 절 홍명사 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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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사 산문(일주문) 입구는 조촐하다
▲ 산문 홍명사 산문(일주문) 입구는 조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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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부정권이 끝나고 명치정부가 들어서면서 홍명사도 위기를 맞았습니다. 주인(朱印, 절의 공식적인 도장으로 국가의 옥새 같은 것)의 몰수와 함께 절의 재산 등을 모두 몰수 당해 명치 중반기에는 무주지의 절이 되어버렸지요. 그 무렵 절에서 내려오던 사보(寺寶)와 주지의 계보(系譜) 등 중요한 것들을 모두 잃었습니다."

부주지 스님은 홍명사가 명치때 심한 타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래도 용케 행기스님이 만든 11면관세음보살상 만은 살아남았다. 소화4년(1929)에 들어서서 마을 사람들이 홍명사 주변 상권 부흥을 위해 힘을 모은 덕택에 홍명사도 간신히 살아났다. 마침 철도들이 새롭게 들어서는 시기여서 홍명사역이 생기는 바람에 절 부흥에 더욱 힘을 받게 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나라시대의 고승(高僧)이자 명승(名僧)인 행기스님(行基, 교기, 668~749)을 부르는 호칭은 다양하다.

<속일본기, 續日本紀, 쇼쿠니혼기)>에 나오는 행기스님에 관한 호칭을 살펴보면,
요로원년(養老 元年)(717) 4월조 : 소승교행기(小僧行基)
덴표(天平) 3 (731) 8월조 : 행기법사(行基法師)
덴표(天平) 17(745) 정월조 : 대승정(大僧正)
덴표쇼호원년(天平勝寶元年) (749) 2월조 :행기보살(行基菩薩) 등이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 사이에서는 교기상(ぎょうぎさん) 곧 '행기님' 이라는 친근한 이름으로 통용되고 있다. 우리가 '부처님'이라고 부르듯 말이다. 행기스님은 호칭의 변천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으나 일평생 이타행(利他行, 남에게 공덕과 이익을 베풀어주며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실천한 분으로 유명하다.

그것은 그가 남긴 뚜렷한 족적만 봐도 익히 알 수 있다. 일본 전역에 49곳의 사원을 짓고 제방 15곳, 항구 2곳, 다리 6곳, 빈곤자를 위한 숙박시설 9개 등을 설립한 것이 행기스님의 공적이다. 그 옛날 나라시대(奈良時代, 710~794)에 말이다.

행기스님에 관한 전승 가운데 비교적 이른 시기의 것으로 일본최초의 불교설화집인 9세기에 나온『일본영이기, (日本靈異記, 니혼료이키)』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때 행기라는 사미승이 있었다. 속성은 고시(越史 또는 高志)로 에치고지방(越後國, 현, 니가타현) 비키군(頸城郡)사람이었다. 어머니는 이즈미지방(和泉國, 현 오사카) 오도리군(大鳥郡)사람으로 하치다구스시(蜂田藥師)였다. 행기는 속세를 떠나 욕망을 멀리하고 불도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며 미혹되어 헤매는 자들을 교화시켰다. 사람됨이 총명하고 태어나면서부터 세상 이치에 대해 잘 알았다. 행기의 높은 깨달음은 보살의 경지에 달하였으나 그것은 안에 감추고 겉으로는 수행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쇼무천황은 특히 그의 위엄 있는 덕에 감화되어 그를 존중하고 공경하였다. 당시 사람들도 그를 공경하여 보살이라 칭송하였다. <時有沙彌行基。俗姓越史也。越後國頸城郡人也。母-和泉國大鳥郡人、蜂田藥師也。捨俗離欲、弘法化迷。器宇聰敏、自然生知。內密菩薩儀、外現聲聞形。聖武天皇、感於威德故、重信之。時人欽貴美稱菩薩。> (《일본영이기(日本靈異記)》중권 7화)"

행기스님이 고시씨족 출신이라고 했는데 고시씨족은 백제국왕의 후손(釋行基世姓高志氏。泉大鳥郡人。百濟國王之胤也)을 말한다. 워낙 나라시대의 고승이기에 행기스님에 관한 자료는 일본 내에 풍부하다.

문제는 행기스님의 아버지가 백제출신이라는 점이고 어머니 또한 백제에서 건너온 도래인계의 약사 (渡来人系 蜂田薬師, 일본세계대백과사전(世界大百科事典)) 집안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분명 행기스님은 '백제인 행기' 스님이 맞다. 하지만 기자는 백제계라고 이 글에서는 쓰겠다.

"어머나. 행기님(행기스님)이 백제인이었어요? 세상에 세상에. 저는 일본인인줄 알았어요.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거든요."

홍명사 신도인 올해 78살의 도미오카 사치코(富岡幸子)씨는 기자에게 그렇게 말했다. 도미오카 씨는 올해도 신년 참배를 위해 절에 왔으며 마침 법당 안에는 곧 있을 신년 법회를 위한 50석 규모의 법회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왔다는 기자의 말에 흥미를 보인 도미오카 씨와 이야기를 나누느라 기자도 2시부터 진행된 2017년 신년 법회에 참석했다. 1시간 동안 진행된 신년법회에는 반야심경을 비롯한 숱한 경전 독송을 거쳐 절정은 코마다키(こま焚き)였다. 주지스님이 법당 안에 불을 피우고 나쁜 액을 몰아내는 의식을 거행 한 뒤 신도들이 연기를 쪼이는 의식이었다.


한국절과 달리 법당안에서 불을 피우는 의식(코마다키)을 하는데 그 뒷편에 관음상이 있다. 현재는 유리관에 모셔져 있는데 이렇게 법당안에서 불을 피우다 보니 법당안이 그을음이 심하다.
▲ 코마다키 한국절과 달리 법당안에서 불을 피우는 의식(코마다키)을 하는데 그 뒷편에 관음상이 있다. 현재는 유리관에 모셔져 있는데 이렇게 법당안에서 불을 피우다 보니 법당안이 그을음이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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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경내에 있는 에마상(소원을 적는 판)을 걸어둔 곳
▲ 에마상 절 경내에 있는 에마상(소원을 적는 판)을 걸어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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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합격등 소원을 적은 에마(繪馬)가 걸려있다
▲ 에마 대학원 합격등 소원을 적은 에마(繪馬)가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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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사에 30년째 다닌다는 도미오카(78살)씨와 본당 앞에선 기자
▲ 도미오카 홍명사에 30년째 다닌다는 도미오카(78살)씨와 본당 앞에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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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오카 씨는 20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병이 났을 때부터 이 절에 다니기 시작하여 30년째 다니고 있다고 했다. 마음의 위안을 위해 매달 8일, 18일, 28일에 가능하면 법회에 참석한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78살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어 보이는 도미오카 씨는 과거 한국어도 배우고 좌선 공부도 하는 등 아이들을 다 키워 결혼시키고 난 뒤부터 끊임없이 수양과 교양 공부를 해왔다고 했다. 물론 한국에도 여러 번 다녀왔다고 했다.

예정에 없던 법회까지 참석하고 홍명사 뜰에 나오니 어느새 3시를 훌쩍 넘긴 시각인데도 절을 찾는 이들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관세음보살은 이 세상의 모든 것 곧 희노애락애오욕의 소리를 다 들어준다고 했던가?

도미오카를 씨를 비롯한 평범한 시민들은 정유년 새해를 맞아 백제계 행기스님이 만든 11면관세음보살 앞에서 합장하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관동의 고찰 홍명사 법당에서 기자도 그 틈에 끼여 1300여 년 전  행기스님의 일도삼례( 一刀三禮, 한 번 칼을 쓰고 세 번 절을 하는 방식)로 혼신의 힘을 쏟아  만든 행기스님의 원력(願力)을 떠올리며 두 손을 모았다. 오래도록!

★ 백제계 행기스님의 유서깊은 절 홍명사(弘明寺, 구묘지)

   *주소: 横浜市南区弘明寺町267
   *전화: 045-711-1231
   *가는 길: 신주쿠(新宿)에서 JR쇼난신주쿠라인 카이소쿠(湘南新宿ライン快速)를 타고 32분 간 뒤, 요코하마에서 케이큐혼선 큐코우(京急本線急行)를 타고 9분 정도 가서 홍명사역(구묘지에키)에서 내리면 1분 거리에 있다.

*일본한자는 약자체이나 시스템상 구자체로 표기함

덧붙이는 글 | 신한국문화신문에도 보냈습니다



태그:#행기스님, #홍명사, #관세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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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 시인.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한국외대 외국어연수평가원 교수, 일본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 국립국어원 국어순화위원,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냄 저서 《사쿠라 훈민정음》, 《오염된국어사전》,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집《서간도에 들꽃 피다 》전 10권, 《인물로 보는 여성독립운동사》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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