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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저울의 추'
기자가 이 연재의 기사를 쓰면서 가장 고심한 부분은 '내 저울의 추'에 대한 문제다. 오래 전 베이징에서 만난 당시 93세의 독립운동가(이명준 선생)는  "이 세상에 '진선진미'한 사람은 없다. 모든 사람은 선과 악의 요소를 다 지니고 있는데, 그 비율이 7:3이냐, 5:5냐, 3:7이냐가 문제다"라는 '금과옥조'와 같은 말씀을 들려주신 적이 있었다.

이 글을 쓰는 나 자신도 내 마음속에 선과 악의 요소를 다 지녔으며, 아울러 빛과 그림자도 다 지니고 있다는 말씀을 드린다. 이 글에 나오는 인물들은 나와 같은 필부들로 다만 내가 그때 그 장면을 목격했기 때문에 등장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이미 지난 일이라는 것을 새삼 상기하는 바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그들 삶의 궤적이 많이 변했으리라 믿는다. 나는 이 세상을 아름다우며, 정직하고 공정한 사회로 변화시키는 단지 글감으로 지난 그때의 사실을 진솔하게 썼음을 밝힌다. - 기자의 말

부속학교 교사들의 비애

1977학년도 새학기부터 나는 이대부고 교사로 정착하게 되었다. 결국 이대부고는 나의 마지막 근무지였는데 대한민국 내 여느 사학보다 건실한 재단이었다.

이 학교에 오기 전까지 그동안 나는 세 학교를 거쳐 오면서 두 번이 아닌 별나게 세 번이나 사표를 쓰고, 심지어는 모교도 뛰쳐나오고, 거쳐 온 학교를 다시 가서 근무하는 그런 일도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참 힘들었다. 다행히 친구나 스승님이 도와줘서 내 앞에 부딪힌 난관을 헤쳐날 수 있었다.

 나의 연구수업 장면(1980. 5.)
 나의 연구수업 장면(1980. 5.)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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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학교 부임 때 스스로에게 다짐한 바, 최소한 20년 이상은 근속하고자 내 감정을 자제키로 맹세했다. 다행히 학교 분위기도 좋았고, 교장 교감선생님 등 선배 선생님들도 잘 대해 주었다. 그래서 교과지도뿐 아니라, 교무 행정이나 학교 교지 발간 등 중요 업무도 잔뜩 맡겼다.

나는 내심 학급 담임이나 맡는 평범한 교사로 지내고 싶었지만 특히 전병진 교감 선생님은 그 총애가 남달랐다. 하지만 그분은 1977년 여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분이 돌아가신 뒤 그해 새로 오신 교장선생님은 이아무개 선생님을 새 교감으로 지명했다. 나는 그 교감 선생님 아래 근무케 되었는데, 그분에 대한 안티(Anti) 세력들이 만만치 않았다. 부임 1년쯤 지나자 나는 그제야 학교가 돌아가는 걸 어렴풋이 짐작케 되었는데 어느 집단이나 진선진미하기가 매우 드문 것처럼 이 학교의 큰 문제점을 깨닫게 되었다.

이 학교는 개교 당시 사범대학 실험실습의 학교로, 대학교수와 소수 교사들이 만든 학교였기에 가족적인 분위기로 출발했다. 그래서 초창기에는 인사에 대한 큰 갈등이 없었나 보다. 그런데 해를 거듭하고 학생도, 아울러 교사들이 늘어났는데도, 이전과 같이 인사에 대한 매뉴얼도 없는, 어쩌면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도 내용은 대단히 비민주적인 학교였다.

교장은 사범대학의 교수가 내려왔는데 대체로 3년, 또는 6년의 임기였다. 하지만 그 이하 직책은 임기조항도 없는, 경우에 따라서는 정년퇴임 때까지 종신제였다. 그래서 이 학교 교사들은 교장은 도저히 될 수도 없거니와 교감도 종신제였기에 그런 직책을 맡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교직에 발을 들여놓는 사람 대부분이 그런 직책 때문은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연륜을 쌓으면 자연스럽게 그런 직책도 맡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그 학교에서는 원천적으로 그런 제도를 마련치 않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내부 갈등이 증폭되기 마련이었다. 

후일 한 교장 선생님(이종록)은 이 학교에 인사위원회를 마련하여 인사제도를 혁파하고자 하였으나 '예배를 소홀히 한다' '교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신다'는 투서로 학기 도중 재단으로부터 교장직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1980년 수학여행 당시 월정사에서 제자들과(왼쪽부터 박종익, 이병권, 기자, 이희태 군)
 1980년 수학여행 당시 월정사에서 제자들과(왼쪽부터 박종익, 이병권, 기자, 이희태 군)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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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

1980년 그해 여름은 이상기류였다. 한창 더워야할 복중인데도 가을날씨처럼 썰렁한 날씨가 연일 계속되었다. 여름은 더워야 한다. 그래야 여름답다 하지만 1980년 그해 여름은 덥지 않은 이상기류였다.

여름 초입부터 무려 50여 일간의 지루한 장마로 사람들은 온통 물난리를 겪었고, 장마 후 계속된 냉기류는 농작물에 큰 피해를 주었다. 또 동해안 연안도 냉수대 현상으로 고기떼들이 몰려오지 않아 어민들도 한숨만 푹푹 쉬었다.

그러자 호사가들은 오랜 장마는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죽은 원혼들이 구천(九天)을 떠돌며 쏟은 눈물 탓이라 했고, 이상 냉기류는 서슬 퍼런 신군부 숙정의 칼날 때문이라고 했다. 신군부 선무당이 휘두르는 칼날로 온통 나라 안은 복중 한파에 숨을 죽였다.

1979년 10월 26일, "칼로써 일어선 자는 칼로써 망한다"는 역사의 교훈을 실증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동안 철옹성 같았던 유신의 심장이 정보부장의 총탄으로 그 심장이 뚫렸다. 그날 궁정동안가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탄은 유신정권의 조종을 울렸으나 그 추종세력들은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다.

구멍 뚫린 유신 헌법으로 또다시 장충체육관에서 대통령이 선출되고, 신군부의 유신 잔재자들은 그해 12월 12일 '12 ․ 12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몽땅 장악했다. 우매한 백성들은 안개정국의 실체도 모른 채 '서울의 봄'이 왔다고 저마다 들떠 있었다.

껍데기 정권은 개헌을 통한 정치일정을 밝혔지만, 그것은 보이지 않은 실세들의 원격조정으로 백성들을 우롱하는 사탕발림이었다. 그들은 수면 아래에서 세상 밖으로 떠오를 명분을 찾기 위해 교활한 연막전술을 피웠다.

그들은 '이원집정제'니 '신당 창당설'이니 계속 연기만 피우면서 무서운 음모를 꾸몄다. 마침내 그들이 쳐놓은 덫에 우매한 민초들이 걸려들었다. 그들은 연일 학원소요가 계속되자 기다렸다는 듯 5·17 비상 계엄확대조치를 단행했고, 이에 항의하는 학생과 시민들을 향해 무자비하게 총칼을 휘두르면서 정권을 장악한 뒤 마침내 수면 위로 불쑥 떠올랐다.

정권을 잡은 신군부는 자기들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를 신설하여 사회정화란 그럴 듯한 명분을 내걸고 대대적인 숙정(肅正)작업을 단행했다. 청산 되어야 할 구시대 잔재들이 오히려 적반하장 격으로 숙정의 칼날을 휘두르는 희화(戱畵)로, 온 나라를 초긴장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해 7월초부터 일기 시작한 사회정화라는 숙정바람에 5000여 공무원들은 한꺼번에 목이 잘렸고, 이어서 국영기업체, 정부투자기관, 금융계, 교육계, 언론계 등 전 분야에 걸쳐 숙정의 칼날이 번득였다. 그 숙정의 칼날은 삼복의 계절을 혹한으로 바꿔 놓았다.

사회 숙정대상자

 모의올림픽개회식 때(오른쪽부터 김 아무개, 한함윤 선생, 기자. 1978. 10.)
 모의올림픽개회식 때(오른쪽부터 김 아무개, 한함윤 선생, 기자. 1978. 10.)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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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방학 중, 나는 집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어느날 밤에 한 선배 교사가 우리학교의 한함윤 물리선생님이 사회정화 숙정대상으로 학교에서 쫓겨났다는 소식을 전화로 전했다. 그러면서 이에 대한 대책으로 이튿날 긴급 모임이 있다고 전달했다.

모임 장소는 중학교 음악실이었다. 나는 그 소식에 무척이나 놀랐다. 그분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물리학과 출신으로 대단히 실력도 있고, 유능한 바른 교사였다.

그런 분이 사회정화 대상으로 숙정명단에 올라가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날 모임 장소인 중학교 음악실에 도착하자 10여 분의 선생님이 모두 놀란 토끼 눈으로 모여 있었다. 그간의 경위를 비교적 잘 아는 김아무개 선생님이 전했다. 한 선생님은 방학식이 끝난 다음 집에서 쉬고 있다가 학교의 호출을 받고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등교했다. 그날 학교 측에서는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 사상 문제라고 트집삼아 사표를 내게 한 다음, 숙정대상으로 몰아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날 대책 모임에 참석한 선생님들은 '한 선생님은 함경도 태생으로, 공산당이 싫어서 월남한 분인데 이는 말도 되지 않는다'며 분개했다. 신군부들이 자기네 정권의 정당성을 위해 휘두르는 숙정의 칼날에 학교 측이 이 참에 슬그머니 미운 사람을 끼워넣은 것이다. 이는 아주 야비한 짓이었다.

사실 나는 그 무렵 교내 한 자리인 교감 자리를 비롯한 교사들 간 주도권 다툼에는 별 관심도 갖지 않았고, 오직 내가 맡은 일에만 골몰한 채 지냈다. 나는 그 사건 이전 그해 '서울의 봄'으로 사회가 한창 시끄러울 때, 김아무개 교사가 현 교감을 몰아내기 위해 학생을 선동했다는 그런 소문을 들었지만, 더 이상 알려고도 하지 않았거니와 그런 얘기에는 아예 귀를 씻고 외면한 채 지냈다.

하지만 한 선생이 정화대상자로 숙정된 것은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그분은 결코 신군부나 언론에서 말한 부패·무능, 그런 것과는 거리가 한참 먼 분이었다. 그래서 '이건 분명 아니다'라는 생각이 내 마음 속에 또렷이 각인돼 있었다.

부끄러운 고백

그날 모임에서 갑론을박을 한 끝에 서울시 교육위원회(현 서울교육청)와 국보위(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에 한 선생님에 대한 진정서를 내자는 의견이 모아지자, 모임을 주선하고 대책을 주도했던 김아무개 선생은 나에게 진정서 문안 작성을 부탁했다.

순간 나는 아찔했다. 하지만 그 제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첫째는 나는 애초부터 안티 현 교감 배척운동에는 관여치 않았을 뿐더러, 그 당시 나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집안 내 문제로 전전긍긍하면서 지내고 있었다. 나의 아버지가 그해 정초 신군부를 비판하다가 관계기관에 불법연행된 뒤 그 무렵 실형을 받고 대구 화원교도소에 수감됐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그 사실을 상사는 물론 동료 교사 누구에게도 발설치 않고 근무하고 있었다. 혹시나 그 사실이 언저리에 탄로날까봐 결근을 한 채 아버지 재판을 방청도 하지 않았던 불효막심한 자식이었다. 나는 그때 그렇게 하는 길만이 쓰러져가는 집안의 버팀목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관련기사 : 시뻘건 난로를 뒤집어쓰고 싶더라... 애비야, 너도 사느라고 욕본다).

내가 비겁하게도 그 제의를 단호히 거절하자 대신 후배 교사인 중학교 국사 담당 정용수 선생이 그 일을 맡게 되었다. 그 진정서에 서명은 개학 전 직원회 날에 하기로 하고, 그날 모두 헤어졌다.

개학 전 직원회날 무거운 발걸음으로 학교에 갔다. 교무실로 가자 교감선생님이 교장실로 내려가 보라고 했다. 그래서 교장실로 가자 교장 선생님은 새파란 얼굴로 한 선생 진정서에 서명치 말라고 경고 겸 애원했다. 나는 교장실을 나오며 그래도 약속한 신의는 지켜야 한다고 중학교 음악실로 가서 진정서에 서명한 뒤 직원회에 참석했다.

진정서 서명을 주동하던 김 선생님은 '서명을 하기로 한 선생님들 가운데 교장 선생님에게 설득을 당한 이도 있고, 그날 결근을 하는 등 몇몇 선생이 비겁하게 애초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며 분개했다. 이런 좌고우면자들은 언제나 있는 법이었다.

 1980년 2학년 2반 담임 당시 반 여학생들과 교정에서(1980. 6.)
 1980년 2학년 2반 담임 당시 반 여학생들과 교정에서(1980. 6.)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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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말서를 쓰다

개학을 한 뒤 사범대학 황아무개 학장이 내려와 한 선생님 진정서 서명자를 모아놓고 "이건 국가적 비상사태다"라며 서명을 취소할 것을 설득했다. 이어 서명자들은 교장실로 호출을 당했다. 그날 교장 선생님은 자리에 없었고, 본청 장학사 두 사람이 서명자들을 모아놓고 거의 협박에 가까운 말을 쏟았다.

"진정서 서명에 취소하지 않으면, 이는 국가공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인사상 불이익을 받습니다."

그것은 바로 곧 사표를 의미했다. 그 강압에 장학사가 내미는 시말서를 받아 그 자리의 선생님들은 취소 서명을 했다. 나도 취소한다는 시말서를 받아 이름을 쓰고 사인을 했다. 모두 진정서 취소 시말서를 제출하자 한 장학사가 말했다.

"진정서를 작성한 분이 누구지요?"

후배 정용수 선생이 말했다.

"접니다."

그러자 본청 장학사는 정 선생에게 서류 한 장을 더 줬다. 

"선생은 경위서를 한 장 더 쓰시오."

정 선생이 즉석에서 묵묵히 경위서를 다 쓴 뒤에야 진정서에 서명한 8~9명의 선생님들이 교장실에서 모두 풀려났다. 아무튼 나는 그때 진정서 작성 일을 후배에게 미룬 것은 내 생애의 오점으로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뜨겁다.

개학이 되자 학교는 아무 일도 없는 듯 바쁘게 돌아갔다. 한 유능한 괜찮았던 한 선생님은 가장 치욕적인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무능 부패한 사회 정화대상자로 쫓겨난 채. 사실 그것은 한 개인에 대한 인격 살인이었다.

그렇게 1980년 그해 여름은 아주 잔인하게 지나갔다.

잘못된 밑그림

우리 사회는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는 말처럼, 그동안 청산되었어야 할 대상자들이 오히려 공권력을 휘두르며 설치고 있다. 근현대사의 희비극이다.

내 고향마을 낙동강 강가의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지금도 세계의 유랑민이 되거나 생활보호대상자로 살아가고 있다. 한편 그 강마을 철길 건너 금오산 기슭의 위만군 장교 딸은 콩인지 팥인지도 모르는데도 우매한 백성들 덕분에 대통령이 되었다. 그 선무당의 장단에 국정이 비틀거리고 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 어리석은 백성들은 아직도 일제강점기의 혼몽(昏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잘못된 밑그림에 대한 책임은 그 누구를 탓하기 이전에 바로 우리 모두에게  있다.

오호애재라. 슬프고도 가슴 아픈 오늘 대한민국의 자화상이여!

 블라디슬라브, 게오르기, 아이귤라, 알렉산드리아로 세계 유랑민이 된 대한제국 13도창의군 군사장 왕산 허위의 후손들(2007. 3.)
 블라디슬라브, 게오르기, 아이귤라, 알렉산드리아로 세계 유랑민이 된 대한제국 13도창의군 군사장 왕산 허위의 후손들(2007. 3.)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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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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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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