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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아침에

"세월은 나는 화살과 같다"는 속담처럼 다사다난했던 2016 병신년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2017 정유년 새해가 밝았다. 이 나라 백성들의 대부분 소망은 올해는 반듯한 새 대통령에 맞는 새로운 희망의 부푼 꿈에 젖었을 것이리라. 늙은 훈장 역시 그런 희망으로 새해를 맞았다.

제 버릇 남 주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그 말처럼 새해 첫날, 지난날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쳤던 김종길 선생님의 <설날 아침에>라는 시 한 구절이 저절로 흥얼거려진다.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또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 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2017년 새해 꼭두새벽부터 손전화가 계속 이어졌다. 여러 지인들이 보낸 문자로 그 가운데는 제자들 것이 가장 많았다. 나는 그 한 메시지에 보약을 먹은 듯이 힘이 솟고, 잦아지려는 꿈과 용기들이 되살아났다. 마냥 느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 인생에 가장 잘한 일

제주에서 만난 제자 박현선 모녀(1992. 2.)
 제주에서 만난 제자 박현선 모녀(1992. 2.)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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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면 많은 이들과 이런저런 인연을 맺는다. 그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순수한 인연은 사제(師弟)간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인류의 문화와 역사는 이 사제 간의 전수로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공자나 예수, 석가님도 제자들 없이는 인류의 길을 밝혀주신 그분들의 대덕이 오늘날까지 이어지지 못 했을 것이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곰곰 생각해 보니 내 지난 삶 가운데 가장 잘한 일은 대부분 학교라는 울타리 속에 살았다는 점이다.

나는 학교에서 많은 스승님에게 세상의 이치를 배웠고, 그 배운 바를 학교에서 더 많은 제자들에게 정직하게 성심성의를 다해 가르쳐 왔다.

그동안 내가 살아온 것도, 그리고 지난 11월 22일 눈빛출판사에서 펴낸 <허형식 장군>까지 모두 39권의 책을 펴낼 수 있었던 원동력도, 국내뿐 아니라 세계 방방곡곡에 흩어져 살고 있는 제자들 덕분이었다.

오늘 설날 아침 내 삶의 보람이요, 정성인 그들 일부의 모습을 그려보면서 새해 안부를 전한다.

지금은 로스앤젤레스 한 병원의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박현선 제자는 그가 1980년도 고2-2반 때 담임한 학생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여의고 간호사였던 어머니 슬하에 자랐다. 그는 인하대 항공운항과로 진학해 졸업 후 곧장 대한항공 여승무원이 됐다.

1990년대 초반 어느 날 전화를 받고 보니까 그였다. 그는 그 무렵 제주에서 1남 1녀의 자녀를 둔 주부로 살고 있었다. 나는 그의 끈질긴 초청으로 생후 처음 비행기를 타고 제주로 가서 당시 집필 중인 장편소설 <사람은 누군가를 그리며 산다>의 클라이맥스 장면 배경을 그때 그가 숙소로 정해 준 서귀포 일대로 잡았다.   

일본 아오모리 현 도와다 호수 겨울 이야기 축제 때 얼음 집에서 김자경(왼쪽) 제자와 함께(2003. 2.).
 일본 아오모리 현 도와다 호수 겨울 이야기 축제 때 얼음 집에서 김자경(왼쪽) 제자와 함께(2003. 2.).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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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기행

1984학년도 고1-1반을 담임했을 때다. 담임교사들은 신입생을 배정받으면 입학식이 끝난 다음 출석번호를 정할 때 애를 먹는다. 그때는 키 순서대로 번호를 정했는데, 특히 여학생인 경우는 1번이 되지 않으려고 모두들 뒷걸음을 치기 마련이었다. 그해 나는 여학생 번호를 정할 때 뒷걸음치는 한 여학생을 붙잡고 말했다.

"선생님은 1번을 아무 학생이나 정하지 않는다. 나는 네가 눈이 예쁘고 공부를 잘할 것 같아 너를 우리 반 1번으로 하고 싶다."

그 말 때문인지 그가 선선히 따라줬다. 그 얼마 후 그의 면담 때였다.

"선생님, 구미 낙산의원을 아십니까?"
"뭐! 네가 그 의원을 어떻게 아니?"
"저희 고모 시집이에요."

낙산 의원은 내 고향 집에서 200m 떨어진 구미우체국 옆에 있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어머니는 초산에다가 난산으로 매우 힘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낙산의원 박상대 의사가 우리 집으로 오셔서 집게로 내 머리를 집어서 빼냈다는 말을 할머니로부터 여러 번 들었다. 그래서 나는 구미초등학교와 구미중학교를 다닐 때마다 그 병원을 지나치면서 늘 그 의원 대머리 원장님에게 감사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저런 인연 탓인지 그 김자경 학생은 재학 중에도, 졸업 후에도 해마다 설날이면 우리 집을 찾아왔고, 나에게 카드나 편지를 가장 많이 보낸 학생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서울 주재 일본국제관광진흥회에서 근무했다. 그는 2003년 2월 6일부터 2월 12일까지 6박 7일 동안 한국방송공사를 비롯한 국내방송 취재 팀에 나를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자격으로 추천해 매스컴 팀과 동행케 됐다.

그래서 나는 그때 일본의 기타도호쿠(北東北) 지방인 아카타(秋田), 이와테(岩手), 아오모리(靑森) 등 세 개의 현(縣)을 눈길 따라 둘러봤다. 그가 답사 도중 나에게 계속 "선생님!" 하고 부르자 일본의 각 현 관광관련 공무원들이 우리의 관계를 묻고는 고교시절 사제 간이라고 대답하자 그들은 "과연 한국은 동방예의지국입니다"라며 감탄했다.

내가 작품 취재 차 그동안 세계 여러 나라를 두루 기행했지만, 그때가 가장 아름다웠던 여행으로 인상 깊게 남아 있다. 그때 여행기를 <오마이뉴스>에 '박도 <눈의 나라 기타도호쿠>'라는 제목으로 연재도 했고, <일본기행>이라는 책도 '새로운사람들'이라는 출판사에서 펴냈다.

허드슨 강변의 제자 집에서(오른쪽부터 김창현, 신민철, 기자. 그리고 신민철 부인 이지수 씨와 과 두 아들 동민, 동준군, 2004. 2.)
 허드슨 강변의 제자 집에서(오른쪽부터 김창현, 신민철, 기자. 그리고 신민철 부인 이지수 씨와 과 두 아들 동민, 동준군, 2004. 2.)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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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드슨 강변의 그림 같은 집

1990년대 중반, 1982년에 졸업한 신민철이라는 제자가 졸업 후 10여 년 만에 모교로 찾아왔다. 그는 그새 미국으로 전 가족이 이민을 가서 그곳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뉴욕 세인트존스 병원 마취과 의사로 재직하고 있다고 했다.

"선생님, 미국에 오시면 꼭 저희 집에 오세요. 그러면 제가 뉴욕 관광을 시켜드릴게요."
"고맙네."

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나는 미국에는 가까운 친척이 살지 않을 뿐더러 학교 다닐 때 영어 성적이 가장 좋지 못했고, 영어로 "화장실이 어디입니까?"라는 말도 할 줄 몰랐다. 그런 내가 굳이 그 먼 미국까지는 갈 리가 없을 것이라고 한 귀로 듣고 흘리려고 했다. 그러자 그가 그런 낌새를 눈치를 챘는지, 굳이 내 교무수첩 방명록에 자기가 손수 집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주면서 다시 다짐했다.

"선생님, 꼭 오셔야 합니다."
"기회가 되면 들리겠네." 

역시 건성으로 대답했다.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게 사람의 인생인가 보다. 미국과 전혀 인연이 없는 내가 천만뜻밖에도 2004년 1월 31일부터 그해 3월 17일까지 47일간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가게 됐다. 그때의 미국 방문은 <오마이뉴스> 1000여 독자들이 마련해 준 4000여만 원의 성금으로 백범 김구 암살배후 규명 차 권중희 선생을 모시고 방미했던 것이다.

[관련 연재 기사] 권중희 선생 미국 가다

우리는 워싱턴 근교 메릴랜드 주 주립대학 부근의 한 숙소에 머물면서 주중에는 NARA로 출근했다. 하지만 주말에는 숙소에서 무료하게 지내기에 그에게 전화를 걸자 대환영이었다. 그래서 그해 2월 15일 재미동포 자원봉사자 박유종(백암 박은식 임정대통령 손자) 선생의 길 안내 및 라이드(Ride)로 뉴욕 허드슨 강변의 그림 같은 그의 집을 찾아갔다.

그는 그의 가족과 동기인 김창현군과 함께 상다리가 휘어질 만큼 산해진미를 차려놓고 고국의 골동품 와룡선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권중희, 박유종 두 분 선생은 이구동성으로 감탄했다.

"박 선생! 당신은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쳤기에 이 바쁜 미국에서 제자들에게 이런 대접을 받소."

나와 권 선생은 그와 김창현군의 안내로 뉴욕의 야경과 이튿날 오전 맨해튼의 구석구석을 둘러봤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5층 사진자료실에서 한국전쟁 사진을 앞에 두고 수집여부를 상의하는 박유종(왼쪽) 선생과 기자(2005. 1.)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5층 사진자료실에서 한국전쟁 사진을 앞에 두고 수집여부를 상의하는 박유종(왼쪽) 선생과 기자(2005. 1.)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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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식 선생의 손자

그 이후에도 나는 개인적으로 미국을 두 차례나 더 방문하여 박유종 선생님의 도움으로 NARA의 사진을 수집하여 한국전쟁 사진집 <지울 수 없는 이미지 1· 2· 3>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등을 펴낼 수 있었다. 3차 방미 때는 메릴랜드 락빌에 사는 1982년 이미진 졸업생이 친정아버지를 맞이하듯이 두 차례나 자기 집으로 초대해 주어 동행한 박유종 선생을 감동케 했다.

그분은 워싱턴 덜레스 공항에서 나에게 작별의 악수를 나누면서 말했다.

"박 선생은 국어 선생에 역사학도라 제 할아버님(박은식 선생)이 가장 좋아할 분인 데다가 이 시대 선생의 제자들이 깍듯이 대접하는 것을 보고 나도 선생을 돕고 싶었기 때문에 도와준 것이었소."

(*백암 박은식 선생은 한 나라가 망해도 그 민족이 고유의 말과 역사만 지니고 있다면 국가는 언제든지 복원할 수 있다고 국어와 역사를 가장 존중하신 역사학자이었음.)

사실 나는 영어에 매우 서툴고 미국 지리에 까막눈이었다. 게다가 운전면허증도 없었다. 그런 내가 미주를 세 차례나 누비며 NARA를 제 집 드나들 듯이 출입해 2000여 컷의 한국전쟁 실상을 알 수 있는 사진을 입수해 온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그 이면에는 박유종 선생의 헌신적인 도움이 있었으며, 그 밑바탕에는 제자들의 눈물겨운 후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 영문을 모르는 사람은 내가 영문학과 출신으로 미국통인 줄로 일고 있는데 나는 국문과 출신으로 영어에는 젬병이다.

1차 방미 때 로스앤젤레스를 경유할 때도 그곳 졸업생들이 그날 하루 병원(전영록)과 가게 문(강영수)을 닫고 정오부터 오찬을 나눈 뒤에도 만찬을 나누고 그래도 아쉬움이 남아 밤늦도록 샌타모니카 해변까지 학창시절의 추억담과 사제의 정을 나눴다. 이런 아름다운 만남은 교사들만이 누릴 수 있는 보람일 것이다.

로스앤젤레스 산타모니카 해변에서 만난 사제의 모임(왼쪽부터 정종옥, 강영수, 기자, 전영록, 김순세 선생님. 2004. 3.)
 로스앤젤레스 산타모니카 해변에서 만난 사제의 모임(왼쪽부터 정종옥, 강영수, 기자, 전영록, 김순세 선생님. 2004. 3.)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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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을 가장 많이 사준 제자

<허형식 장군> 표지
 <허형식 장군> 표지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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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나는 첫 작품 집 <비어 있는 자리>를 '다나출판사'에서 출판했다. 그때 제자들이 이대교수식당에서 출판기념회를 마련해 주었다. 그때 나는 인사말에서 앞으로 10권의 책을 더 내고 싶다는 희망을 얘기했다.

그 후 나는 그 말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할까 내 가벼운 입놀림을 많이 후회했다.

사실 이즈음 우리 출판계에서 자비 출판이 아닌, 초판부터 출판사에서 당당히 인세를 받는 출판은 그리 쉽지 않다. 그만큼 출판시장이 어렵다는 증거다.

요즘 동료나 선후배 문인들의 얘기를 들으면, 애써 작품을 써두고도 묵혀놓는 일이 많다고 한다. 이런 출판계의 대불황에도 나는 거의 해마다 한두 권씩 꾸준히 출판해 왔다. 이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심지어 미국에서도), 내 책을 사주는 특히 여러 제자들 덕분이 매우 컸을 것이다.

지난 11월 22일, 나의 39번째 실록소설 <허형식 장군>을 사진전문 눈빛출판사에서 펴냈다. 1982년 졸업생인 고순영 제자는 자기가 한 권을 사본 뒤 이후 15권을 서점에서 직접 사서 내 집으로 보냈다.

그는 이번 만 아니라 이전에도 출판 때마다 번번이 10~20권씩 책을 사줬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책을 사는 데 습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인문이 메말라버린, 책 한 권 제대로 읽지 않은 강남의 머리 빈 민간인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역사의 첫 장도 모르는 무지몽매한 사람이 대통령이 돼 나라를 막장으로 끌고 가는 오늘의 먹먹한 현실이 아닌가.

지성의 최정상에 있어야 할 대학총장조차도, 돈과 권력에 허수아비로 춤을 춘, 이 참담한 현실에서 옛 훈장의 책을 여러 권 사주는 일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것도 이 시대 주류들과 역행하는 항일 파르티잔의 생애를 그린 책을. 내가 그에게 웬 걸 이렇게 많이 사 보냈느냐고 크게 나무랐다.

"선생님, 제가 그 책을 읽어보니까 주인공 항일 파르티잔 허형식 장군은 너무 잘 생겼고, 그분의 삶이 아주 멋있었어요. 서른세 살 사나이가 나라와 겨레를 위해 가족을 버린 채 항일전선에서 일제 토벌대와 맞서 싸우다가 마지막에는 자기 부하를 살리기 위해 불꽃 같이 스스로 희생하는 장면에서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감동했어요."

"사실은 나도 그분의 생애가 그래서 큰 감동을 받고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아 그 작품을 썼다네."

내 작품 애독자 및 후원자 제자들(왼쪽부터 신유철, 고순영, 신민철 2012. 6. 횡성자작나무숲미술관에서)
 내 작품 애독자 및 후원자 제자들(왼쪽부터 신유철, 고순영, 신민철 2012. 6. 횡성자작나무숲미술관에서)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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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제가 보낸 책은 영화감독에게나 방송국 PD에게 선생님이 사인을 한 뒤 보내주세요. 그 작품이 꼭 영화화나 방송 드라마가 됐으면 좋겠어요. 지금 대한민국 사람들은 진짜 애국자를 모른 채, 그동안 가짜들에게 속아 살아왔기에 정의감에 무척 지쳐있어요. 사람들이 선생님의 작품을 읽거나 영화로 보면 진짜 살맛이 날 거에요."

"고맙네. 내 이 은혜를 어찌 갚을까?"

"선생님, 그런 말씀 마세요. 제가 고교시절 가장 힘들 때 선생님이 들려주신 말씀은 지금까지도 저에게 힘이 되고 있어요. '순영아, 용기 잃지 마! 순영이는 할 수 있어'라 했었지요. 그래서 지금 제 블로그 이름도 선생님의 말씀을 유추해서 붙였어요. 'I can do it, if I believe it'이라고요."

세상은 살 만한 곳

사실 나는 이즈음 나이도 그만하고, 지난 번 작품에 모든 혼을 쏟아 기가 몹시 빠진 상태다. 하지만 제자들이 베풀어주는 그 정성에 크게 감읍하고 있다. 여기까지 쓰고 있는데 염무웅 선생님이 문자를 보내주셨다.

"새해 더욱 건강하시고 노익장의 필력으로 후진들에게 모범을 보이시길 기대합니다. 염무웅 드림"

나는 곧 몸과 영혼을 추스른 다음, 내 머릿속에 맴도는 아직도 남아 있는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지금 <오마이뉴스>에 연재 중인 [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제2부 교단일기'는 애초 예정대로 22회 정도 내외로 일단 끝낼 예정이다. 그리고 제3부는 일시 중단 한 뒤, 가제 '사진으로 보고 이야기로 듣는 한국전쟁 이야기'를 상반기에,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오래 전부터 마음 속에 담아둔 한 유명한 고향 선배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그려 보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 건강이 뒷받침이 돼야 한다. 아무튼 지금까지는 하늘이 허락해 준 건강과 가족, 특히 내 아내의 헌신적 돌봄과 친지와 여러 제자, 특히 이 짧은 글에 다 얘기치 못한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도해 주고 성원해 주신 많은 분들에게 새해 첫 날 아침에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앞으로도 내 건강이 허락하는 한, 여러분에게 들려드릴 나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약속드립니다.

세상은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

- 김종길 <설날 아침에> 중에서


태그:#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설날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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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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