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격언이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는 게 부정할 수 없는 한국의 현실이다. 그러나, 인류가 역사와 경험을 통해 축적해온 지식과 지혜가 고스란히 담긴 책 이외의 어떤 것들에서 세상을 배울 수 있을까? 책이 인간이 만든 최고의 '보물'이라면, 도서관은 '보물창고'다. 기자는 프랑스 파리와 서울시 관악구의 선진적인 도서관문화를 소개함으로써 향후 한국의 도서관이 그려나갈 청사진에 작은 도움이나마 주고자 한다. - 기자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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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용자를 위한 인프라가 잘 갖춰진 프랑스 파리 미테랑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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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이자 도서출판 리젬의 대표인 안성호(48) 씨는 가끔 황당한 전화를 받는다고 토로했다. 다소 길지만 한국 도서관의 현실을 알려주는 말이니 아래 그대로 인용한다.

"잊을만하면 도서관협회 등에서 연락이 온다. 책을 기부하라는 것이다. 물론 책을 도서관에 기부하는 게 나쁜 일은 아니다. 그런데, 그런 전화를 받을 때면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다. 도서관에 책을 기부하면 세금 관련 혜택을 일부 받기도 하지만, 도서관을 짓는 데는 수십 억 혹은, 수백 억 원을 사용하면서 1~2만원짜리 책을 공짜로 얻으려는 태도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서울이건 지방이건 도서관에 강연을 가보면 '책을 배제한 행사'가 태반이다. 심지어 초청한 저자의 책이 없는 도서관도 있다. 부산은 세계적으로도 영화와 영화제의 도시로 이름이 높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자. 부산에 영화전문 도서관이 있나? 부천도 마찬가지다. 해마다 판타지 영화제를 열면서 판타지문학 도서관은 없다. 책을 공짜로 얻으려는 도서관측의 인식에 변화가 없다면, 이 문제는 앞으로도 해결이 요원하다."

240억 들여 지은 도서관... 도서 구입예산은 3억5천

안성호 대표의 말이 터무니없이 과장된 것처럼 들리는가? 그렇지 않다. 한국에서 도서관 운영시스템이 가장 선진화됐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서울시 관악구의 1년 도서구입 예산은 5억2천만 원 남짓. 240억 원을 들여 멋들어지게 건축된 경북 포항시 포은중앙도서관의 도서 구입예산은 3억5천만 원 정도다.

'억원'이란 단위만으로 보면 적지 않은 금액처럼 보인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포은중앙도서관의 도서구입비는 건물가의 70분의 1이다. 또한, 포항 인구를 50만으로 보면 시민 1인에게 배정된 연간 도서 구입예산은 700원에 불과하다. 과자 한 봉지도 사먹을 수 없는 돈. 이런 현실은 비단 서울시 관악구와 포항만이 아니다. 한국 대부분의 도시가 이와 유사할 것으로 추정된다.

책 중에서 가장 저렴한 편에 속하는 시집 1권의 평균 가격은 8천원. 단순하게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11년을 모아야 시민 한 명의 손에 시집 1권이 들려지는 것이다. 물론 국민의 세금인 예산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책에 투자되는 금액이 이 정도라면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단순하게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프랑수아 미테랑 도서관이 보유한 책은 3500만 권이다. 한국 지방자치단체 수준으로 도서 구입예산을 책정한다면, 대체 얼마의 세월이 흘러야 미테랑 도서관만한 장서를 구비하게 될까? 계산도 되지 않는다.

안 대표는 이런 말도 들려줬다.

"책이 인간에게 길을 열어주던 시대가 끝났다고 많은 이들이 말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사람이 책 외에 무엇에게서 세상을 배운단 말인가.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고 해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전화번호부처럼 취급해선 안 된다. 만약 그런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엔 미래도 없다."

'책이 없는 도서관'이란 황당한 문제점 외에도 한국의 지방도시 도서관이 해결해야 할 숙제는 또 있다.

취재를 위해 프랑스 파리를 찾았을 때 퐁피두센터 내에 위치한 퐁피두도서관을 방문했다. 책은 물론, 영화와 그림을 만날 수 있고, 상설·특별 전시회와 다종다양한 문화공연까지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퐁피두센터에 입장하려고 10대 소년·소녀 수백 명이 족히 100m는 넘어 보이는 긴 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찾아가고 싶은 도서관, 뭔가 얻어낼 게 있는 도서관, 예술과 문화를 마음껏 향유할 수 있는 도서관은 지금 이 시대가 요구하는 트렌드다. 예산 부족과 여의치 않은 현실을 이유로 이러한 트렌드를 백안시 하는 건 우매한 짓이다. 앞서 안 대표의 언급처럼 '국가의 미래를 망치는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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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퐁피두센터 앞을 지나는 파리 시민들. 퐁피두센터 내엔 퐁피두 도서관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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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은 겉모양이 아닌 콘텐츠로 승부해야"

문학평론가인 박철화(52) 씨는 1990년대의 대부분을 파리에서 공부하며 보냈다. 그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을 "고문서의 빛나는 보물창고"라고 정의한다. 불문학을 전공한 박 평론가는 유학 시절 프랑스 국립도서관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그가 말한다.

"도서관은 건물의 하드웨어도 중요하지만, 그 안을 채우는 콘텐츠로 승부해야 한다. 외형이 아닌 책과 정보를 어떻게 활용하는지가 중요하다. 한국의 경우처럼 도서관 건물 자체에만 집착하는 태도는 19세기식 낡은 사고방식이다. 이제 도서관에 관한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고 있다. 21세기는 정보의 소통과 네트워크의 효율적 구축이 중요한 시대 아닌가."

도서관의 핵심 콘텐츠가 '책'이라는 것은 재삼 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책을 중심으로 채워져야 할 도서관이 외피에 더 신경을 쓰고 있는 '한국적 현상'은 어디에서 발원한 것일까? 이 문제에 관해 박철화 씨는 아래와 같이 이야기했다.

"다소의 과장이 섞인 이야기겠지만, 퐁피두센터를 건립한 프랑스 대통령 조르주 퐁피두는 시 3천 편을 외우는 문학애호가였다. 그에게 문화예술센터의 건립은 단순히 치적을 위한 것이 아닌, 개인적으로 절박한 숙원사업이었다. 파리 시민들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과 갤러리, 공연장과 휴식공간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퐁피두센터는 대중을 위한 최고의 '공적 서비스'가 무엇인지를 긴 설명 없이도 간명하게 보여준다."

책을 중심으로 책과 관련된 각종 문화이벤트와 예술전시회가 펼쳐지는 도서관, 책을 매개로 미래를 설계하는 청년들이 북적거리는 도서관, 문화적 감각을 가지고 선진적 예술정책을 펼치는 대통령이 존경받는 나라, 책을 '죽은 지식의 감옥'이 아닌 '살아 숨 쉬는 오랜 친구'로 인식하는 도서관장이 있는 도시. 이는 많은 이들이 꿈꾸는 희망사항이다. 그러나, 아직은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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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포항시에 자리한 포은중앙도서관.
ⓒ 경북매일 자료사진	관련사진보기

문화와 예술을 향유하는 네트워크 거점을 꿈꾸며


경제적 발전과 솟아오르는 고층건물의 높이만으로 한 국가의 발전 정도를 측량하던 시대는 저물고 있다. 바야흐로 문화의 시대가 오고 있다. 아니 이미 도래했다. 한국의 도서관들은 이 시대를 어떤 자세로 맞아야할까?

아르헨티나의 소설가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는 말했다. "만약에 천국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도서관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선언적 문장에 가까운 보르헤스의 진술에 박철화 평론가는 이런 실질적인 조언을 보탠다.

"도서관은 시민이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네트워크 거점이 돼야 한다. 개별적으로 운영돼온 인접 지역 공공도서관들이 하나의 그물망처럼 이어지는 것을 상상해본다. 책을 통해 꿈꾸는 내일, 결국 그게 우리가 지향해야 할 아름다운 미래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