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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 당시.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 당시.
ⓒ 해양경찰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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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명지통(喪明之痛)

아마도 이 기사가 올해 마지막 기사가 될 듯하다. 해마다 이맘때면 가장 흔히 쓰는 말은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한 해'라는 말일 게다. 올해만큼 그 말이 적확히 들어맞는 해는 드물 것이다. 전국의 교수들은 올해의 사자성어를 뽑은 바, '군주민수(君舟民水)'라고 한다. 이는 "백성(강물)들이 화가 나면 배(임금)도 뒤집을 수도 있다"라는 말이라고 한다. 무능과 실정에 분노한 백성들이 촛불을 들고 일어나 마침내 대통령을 탄핵에 이르게 한 해였다.

이 세모의 거리에 '세월호 참사'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1000일에 다다른 지금까지도 편히 지내지 못하고 있다. '상명지통(喪明之痛)'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눈이 멀 정도로 슬프다는 뜻으로 곧 자식을 잃은 부모의 아픔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옛날 중국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가 아들을 잃고 슬피 운 끝에 눈이 멀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세월호 침몰로 금쪽같은,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심정은 이와 같을 것이다. 눈을 멀거니 뜬 채 자식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부모의 상명지통을 알 수 없을 것이다.

나는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속보를 화면으로 보면서 비통한 심정과 함께 안도감을 느끼기도 했다. 33년간 중·고교 교단에 섰던, 더욱이 10여 차례 수학여행 및 생활훈련을 기획하고 인솔책임 실무를 맡았던 나로서 그때를 참 잘 넘겼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수학여행을 인솔하다

이대부고 수학여행단 학생들이 비룡폭포로 오르고 있다.
 이대부고 수학여행단 학생들이 비룡폭포로 오르고 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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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3월 이대부속중고등학교에 제6대 정식영 교장 선생님이 부임해 왔다. 정 교장 선생님은 부임 첫 일성은 '공부하는 학교' 만들기였다. 그래서 종래 학교의 모든 행사를 재검토한 뒤 단축하거나 폐지했다. 그러자 불평불만 및 볼멘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하지만 교장선생님의 방침은 요지부동이었다.

이 학교 최대 축제의 하나였던 모의 올림픽대회 행사도 폐지됐다. 그 대신 학교운동장에서 소체육대회를 여는 것으로 갈음했다. 그러자 불만은 교내외뿐 아니라 동창들 사이에까지도 번졌다. 하지만 교장선생님은 그런 비판을 오히려 즐기는 듯했다.

그 이듬해인 1980년 나는 고2의 2반 학년 담임을 맡았는데, 교무부의 수업계 및 학적을 담당하고 있었다. 어느 하루 교육청에 정기 학적보고 공문을 보내고자 교장실에 결재를 받으러 갔다. 결재 후 그 자리에서 나는 건의사항이 있다고 했더니 정 교장선생님은 소파에 앉으라고 권했다.
이대부중고 6대 정식영 교장선생님
 이대부중고 6대 정식영 교장선생님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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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의 숨통을 좀 틔여 주십시오."
"안 됩니다."
"너무 힘들어합니다. 저희 학년 수학여행이라도 허락해 주십시오."
"안 됩니다. 수업 결손이 너무 많아집니다."

나는 그때 문득 '수업 결손'이라는 말을 잠재울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수업결손을 해치지 않고 다녀오겠습니다."
"…."

정 교장선생님은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여름방학 끄트머리에 다녀오겠습니다."
"네에?"

"개학 3~4일 전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때는 성수기도 막 지난 때라 숙소도 교통도 원활할 겁니다."

마침내 정 교장선생님은 입을 열었다.

"그럼 박 선생님이 책임지고 인솔해 다녀오시오."

나는 뛸듯이 기뻤다. 3층 교무실로 돌아와 그 사실을 교감선생님 및 학생부장, 다른 담임선생님에게 알리자 의외의 수확이라고 모두 반겼다. 학생들도 환호했다. 그래서 그 일을 당시 백행철 학생부장과 함께 추진했다.

암초를 만나다

나는 수학여행 장소로 설악산 및 동해안으로 잡았다. 나 자신 경주 수학여행에 대한 좋지 않은 추억과 닳고 닳은 여행업자들의 횡포, 빡빡한 볼거리보다는 학생들에게 푸른 산과 동해바다를 보여주는 게 더 교육적일 것 같은 판단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암초가 솟아올랐다. 그 무렵 학교에서 단체로 수학여행을 가려면 반드시 서울시교육청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전세버스 이용은 일체 허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 몇 해 전 1970년 서울 경서중학교 학생들을 태운 수학여행단 버스운전기사가 모산 건널목을 건널 때 앞차와 거리 유지에 신경을 쓰느라 옆 경계를 소홀히 해 특급열차와 충돌하여 45명이 사망하고, 29명이 중상을 입는 대형 사고가 일어난 여파 때문이었다. 그 이후 서울시교육청에서는 전세버스 수학여행은 일체 불허하던 중이었다.

여러 날 고심 끝에 짜낸 묘안은 일단 청량리에서 열차를 타고 원주로 간 다음 거기서 버스로 설악산으로 가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교육청의 지시사항을 교묘히 빠져나간 묘안으로 결국 열차삯은 필요 없는 이중 지출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장거리 열차 여행을 해보지 못한 숱한 서울내기 학생들에게는 또 하나의 추억이기도 했다.

나와 백 학생부장은 전 코스를 사전 답사했고, 설악산의 한 숙소를 예약하면서 제발 인솔교사와 학생의 밥을 똑같이 달라고 통사정했고, 결국 그렇게 하기로 언약을 받았다. 나는 학창시절 수학여행지에서 교사와 학생밥상의 차별이 교육 목적상 대단히 나쁘다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나는 모처럼 귀한 수학여행을 위해 학생들의 여행코스를 다양하게 잡았다. 그래서 설악산으로 가는 길은 장수대 한계령을 넘어 낙산사를 거치는 여정을 잡았고, 돌아오는 길은 대관령을 넘어 오대산 월정사, 상원사를 경유케 했다.

'에벤에셀' 축제

에벤에셀 한 장면
 에벤에셀 한 장면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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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8월 여름방학 끝날 무렵 우리 이대부고 수학여행단은 청량리역에서 중앙선 열차를 타고 원주로 갔다. 학생들은 터널을 지날 때마다 교사들에게 밀가루를 뿌리는 등, 감히 교내에서는 엄두도 하지 못할 장난들을 하며 저희들끼리 낄낄거리며 좋아했다. 어느 선생님도 화내지 않고 학생들의 놀이 대상으로 함께 즐기면서 원주역에 내려 역 광장에 대기 중인 전세 버스에 올랐다. 그때 우리 학교는 모두 4개 학급으로 버스는 모두 6대였다.

우리 수학여행단은 한계령을 오르기 전 옥녀탕에서 싸온 도시락을 먹었다. 식후 다시 출발하여 한계령 정상에서 설악산 일대를 조망한 뒤 동해로 갔다. 학생들은 낙산 바다 모래톱에서 뛰놀다가 의상대를 거쳐 설악산 숙소로 향했다. 사실 우리 학교 학생들은 수학여행이나 생활훈련 때는 고적이나 자연경관 관람 못지않게 기대하고 즐기는 것은 밤 자체 프로그램이었다.

대체로 자체 프로그램은 조별 촌극대회 및 장기대회로 그 메뉴가 매우 다채롭다. 학생들은 이 행사를 위해 저희끼리 수차례 기획하고 연습해왔음은 불문가지였다. 이런 행사를 통해 연예인이 된 친구도 적지 않다. 방송인 남궁연군의 재치 있는 입담도 학창시절에 닦은 솜씨였다.

그해 첫날 밤 프로그램은 '에벤에셀'이라는 축제로 설악의 밤 찬양과 조별 촌극대회 및 장기대회였다. 그 행사는 밤 11시 무렵에 끝났다. 남학생은 숙소 아래층 여학생은 2층을 쓰게 했다. 설악산에서는 8월 15일 이후는 손님이 거의 없기에 방 인심이 후했다. 그래서 성수기 때 다른 학교의 수학여행과는 달리 쾌적하게 지낼 수 있었다.

자정부터 취침하라고 전달하지만 그 시간에 취침하는 방은 거의 없었다. 인솔 선생님들은 방마다 돌아다니면서 잠을 재우려 하지만 "우리 잠자고자 수학여행을 왔느냐?"는 그들의 항변에 지치기 마련이었다.

미스유니버스 출전자들(왼쪽부터 일본여인으로 분장한 박상빈, 인도여인으로 분장한 김홍걸, 아랍여인으로 분장한 명철규)
 미스유니버스 출전자들(왼쪽부터 일본여인으로 분장한 박상빈, 인도여인으로 분장한 김홍걸, 아랍여인으로 분장한 명철규)
ⓒ 박상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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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유니버스 선발대회

이튿날 아침부터 날씨가 흐렸다. 다행히 하루종일 비가 내린 게 아니고 잠깐 잠깐 해를 보였다. 오전에는 가까운 비룡폭포에 올랐다. 한 학생이 친구에게 장난으로 던진 돌멩이가 안경을 깨트려 긴급히 병원으로 가는 사태가 발생했다. 응급치료를 받고 온 학생은 다행히 중상이 아니었다. 학생부장은 돌을 던진 학생을 잡았지만 돌을 맞은 학생이 간곡히 용서해 달라고 해 아름답게 마무리됐다.

오후 산행은 신흥사를 거쳐 울산바위로 오르는 등산이었다. 등산 도중에 갑자기 비가 심하게 쏟아져 애초 울산바위 등반은 취소하고 도중 계조암에서 비를 피하다가 하산했다. 그때 한 여학생이 오한을 일으켜 걸을 수 없게 되었다. 우리 반 학생은 아니었지만 "박 선생님이 책임지고 인솔하여 다녀오라"는 교장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라 그 학생의 담임(김동훈 선생님)과 번갈아 업고 소공원까지 내려왔다.

[관련 기사] 수학여행 때 업어준 제자, 36년 만에 찾아왔습니다

그날 밤 프로그램은 각국 민속제로 미스 유니버스 선발대회였다. 이 대회에는 여학생이 출전하는 게 아니라 남학생이 출전하는데 선수 분장은 여학생들이 맡았다. 그해 미스 유니버스의 최우수상은 일본 여인으로 분장한 박상빈군이었고, 우수상은 인도 대표로 출전한 김홍걸군이었다.

또 하룻밤을 학생들과 숨바꼭질을 한 뒤 이튿날 대관령을 넘어 오대산 월정사 상원사를 둘러보고 그날 오후 4시 무렵 학교로 돌아왔다. 꽤 많은 학부모들이 운동장에서 버스가 도착할 때마다 박수를 치고 있었다.

6대의 버스가 모두 도착한 뒤 운동장에서 해단식을 가졌다. 해단식이 끝나자 여러 남학생들이 내게 달려와 헹가래를 쳤다. 그 헹가래 때문인지 그 이후에도 여러 번 수학여행을 인솔했지만 그해 수학여행이 아직도 가장 깊게 남아있다.

해단식 후 회계를 맡았던 고용우 선생님이 결산을 하자 약간의 돈이 남았다. 나는 그 돈을 학생들에게 모두 반납 조치한 뒤 그 영수증을 첨부하여 결재를 올렸다. 정 교장 선생님은 최종 도장을 찍으면서 말했다.

"내가 숱한 결재 도장을 찍었지만 학생들에게 남은 돈을 돌려줬다는 서류에 도장을 찍기는 처음이오."

비룡폭포 아래서 이대부고 2-2반 학생들의 기념촬영(1980. 8.)
 비룡폭포 아래서 이대부고 2-2반 학생들의 기념촬영(1980. 8.)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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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건의 근본 원인

나는 2004년, 2005년, 그리고 2007년 세 차례에 걸쳐 70여 일 동안 미국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의 한 숙소에 머물면서 날마다 그곳에서 가까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출근해 한국전쟁 사진자료를 수집했다. 매일 오전 8시 10분에는 나를 도와주는 재미 동포(박유종 선생)와 함께 숙소를 출발했는데, 그 시각은 미국 초등학교 등교시간과 일치하여 NARA로 가는 도중에 이따금 스쿨버스의 뒤를 따랐다.

노란색 초등학교 스쿨버스는 드문드문 길가에 서서 어린이를 태웠는데, 그 스쿨버스가 도로에 설 때는 이편 차선의 차들뿐 아니라 상대편 차선의 차들도 모두 정지한 채, 아이가 승차하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여러 번 그 장면을 지켜보면서 미국을 비롯한 서구사회는 어린이를 비롯한 여성,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전 사회 밑바닥에 짙게 깔려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대부고 재임 중 한번은 정식영 교장 선생님을 인솔책임자로 해 수학여행을 가게 되었다. 그분은 여행 도중 무료했음인지 초등학교장 재임시절을 말씀하셨다. 그 사립초등학교는 그 무렵 대한민국 최상위 층 자녀들로 대기업체 회장이나 청와대 경호실장 자녀 등 실세 자녀들의 집합소였던 모양이다.

당신 교장 재임시절 학생들과 현장 견학이나 수련회를 가노라면 부탁치도 않았는데도 경유지 및 목적지 시계나 도계에 이르면 경찰 사이드카가 앞뒤로 호위해 준다고 했다. 또 현장에 가면 최고의 대우로, 오히려 이쪽에서 민망할 정도였다는 얘기를 들려줬다.

나는 지난 세월호 사고는 우리 사회가 어른 중심의 사회요, 가진 자와 목소리 큰 강자 중심의 사회였다는데 그 근본 원인이 있었다고 진단한다. 만일 그때 세월호에 청와대 비서실장의 손자라도 승선했다면 그런 대형 사고가 났을까, 그리고 관계기관이 그렇게 안이하게 대처했을까 의문스럽다.

아직도 찬 바다 속에서 헤매는 어린 영혼들에게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깊이 고개 숙여 그들의 명복은 빈다.

"그대들이 사는 다음 세상은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부자도 가난한 이도 똑같은 사람으로 대접받기를…. 아울러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세상도 앞으로 그렇게 변해지기를 세모의 한밤중에 빕니다."

(*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태그:#세월호, #수학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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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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