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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군의 통로, 창의문

1.21 청와대습격 사건 때 희생된 최규식 경무관 동상 바로 옆에는 한양도성 4소문 가운데 하나인 창의문(彰義門)이 위치해 있다. 현재의 창의문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문루를 영조 16년(1740)에 복원해놓은 것이다.

물론 1958년에 보수를 하긴 했지만 처음 만들어진 원형에서 큰 틀은 변하지 않은 채 300년 가까이 유지된 문이다. 이 문은 자하문(紫霞門)이라고도 불렀다.

이 일대에서 청운동으로 이어지는 계곡의 골이 깊고, 수석이 밝게 빛나서 그 아름다운 모습에 개성을 오가는 사람들이 마치 개성의 자하동과 같다고 하여 자핫골 또는 자하동(紫霞洞)이라고 칭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창의문 밑을 지나는 터널을 우리는 자하문터널이라 부르는 것이다.

한양도성 북소문에 해당하는 창의문
 한양도성 북소문에 해당하는 창의문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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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란 본래 사람이 드나드는 목적으로 만드는 것이지만 이 창의문은 건립 이후 항상 폐쇄되었다. 태종 13년(1413) 풍수학자 최양선이 창의문과 숙정문 일대는 "경복궁의 좌우 팔에 해당되므로 길을 열지 말아서 지맥(地脈)을 온전하게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임금이 이를 받아들여 북소문인 창의문과 북문인 숙정문은 폐쇄되었다.

단지 세종 때 도성 수축을 위하여 편의상 두 문을 연 적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명에 따른 일시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이 창의문을 어명에 의하지 않은 채 출입한 경우가 딱 한 차례 있다. 마치 1968년 북의 무장조직이 청와대를 습격하러 온 것처럼 약 400년전 조선의 임금 광해군을 축출하기 위한 반정군이 창의문을 통해 도성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반정은 결국 성공하여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을 새 임금(인조)으로 추대하였다. 이를 우리는 인조반정(1623)이라 부른다. 반정군은 광해군이 그의 친형 임해군과 배다른 동생 영창대군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계모인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폐륜을 저질렀다는 명분으로 반정을 일으켰다.

인조반정은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동조하면서 명청 중립외교를 추진했던 광해군과 대북파를 제거하였다. 이로써 이후 조선에는 본격적인 노론 정권이 들어섰고, 이들 세력은 조선은 물론 일제시대,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고 보면 창의문과 관련된 인조반정의 역사는 지금의 21세기 현실에서도 우리사회 기득권층과 밀접히 연결된 듯하다.

이괄, 반정의 일등공신이지만 공신록에서 삭제되다

한편 인조반정이 있던 해로부터 120년 뒤 영조가 인조반정 2주갑(二周甲)을 기념하기 위하여 창의문을 방문하였다. 그때 영조는 인조반정 공신들을 하나하나 회상하면서 그들의 이름을 직접 써내려갔다. 지금도 창의문 문루에는 영조의 어필이 여전히 걸려 있다.

창의문 문루에 걸려 있는 영조 어필의 인조반정의 공신명단,
 창의문 문루에 걸려 있는 영조 어필의 인조반정의 공신명단,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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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창의문 문루에 올라 인조반정의 공신들을 써 놓은 현판을 자세히 보면 반정 당시 군대를 총지휘했던 사람으로 반정의 1등공신이라 할 만한 이괄(李适)의 이름이 빠져 있다. 이괄은 반정 후 이뤄진 논공행상이 불공평하다는 이유로 바로 1년 뒤 난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본래 반정 계획상 군대를 김류가 지휘하기로 하였지만 막상 그는 현장에 나타나지 않아 이괄이 대신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류는 1등공신으로, 자신은 2등공신으로 분류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은 한직으로 밀려나고, 아들마저 무고로 인하여 반란음모 계획자로 몰려 압송될 처지에 이르자 사면초가에 휩싸인 그는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인조반정 1년 뒤 일어난 '이괄의 난'(1624)이다. 이로써 조선은 외세가 아닌 자체 반란군에 의해 한양을 점거 당하는 유일무이한 사건을 맞게 되었다. 이때 급히 피신하기 위해 현재 양재역 사거리를 지나던 인조는 배가 고파 말에서 내리지도 못한 채 급히 팥죽을 먹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을 말죽거리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이후 관군과 반군은 현 서대문구 무악재에서 큰 전투를 벌여 결국 관군의 승리로 난은 수습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괄은 인조반정의 공신에서조차 삭제되고 말아 그의 이름은 지금 창의문 문루에 걸려 있는 현판에서도 빠져 있다. 아마도 조선역사 500년 동안 한양에서 이렇게 큰 전투가 벌어지기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니었나 싶다.

조선 국왕의 묘호 | 조(祖)종(宗)의 무원칙
묘호(廟號)란 우리가 흔히 부르는 국왕의 이름인데, 특히 국왕 사후 붙여지는 이름이다. 국왕이 죽은 뒤 2품 이상의 대신들이 모여 3개의 후보 묘호를 올리면 신임 국왕이 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다. 그런데 여기 창의문과 관련 있는 인조의 경우 그의 사후 묘호를 정하는 데 있어 커다란 논쟁이 있었다. 나는 이 논쟁을 통해 조선 역대 국왕의 묘호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했다.

총 27명에 이르는 조선국왕의 묘호
 총 27명에 이르는 조선국왕의 묘호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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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묘호를 짓는 데 있어서 <예기(禮記)>에 두 가지 원칙이 있다. 그 기본원칙에 따르면 '가계의 시조는 조(祖)가 되고, 그 후예는 종(宗)이 된다'. 이를 종법원리라 하며, 부수적 원리로 '공(功)이 있으면 조(祖)가 되고, 덕(德)이 있으면 종(宗)이 된다'는 조공종덕(祖功宗德)이 있다.

종법은 적장자가 종자(宗子)의 지위를 상속하는 제도다. 따라서 왕조를 건국한 시조는 태조라 칭하고 그를 계승하는 왕은 '종'이라 불러야 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셈이다. 이것이 묘호의 권위요 왕권의 상징이다.

그런데 이 원칙에 따르면 조선도 묘호로 '조'가 쓰이는 사람은 고려의 태조 왕건처럼 한 명 뿐이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조선에서는 종법원리보다 조공종덕이 중시되었던 것이다. 즉 '원칙보다 예외가 중시되었다'고나 할까?

인조 역시 이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인조가 죽고 그의 묘호 문제가 '인종'이 아닌 '인조'로 결정되자 홍문관 심대부가 이보다 앞선 세조, 선조, 중종의 예를 들며 다음과 같은 반대의 상소를 올렸다.

"예로부터 조(祖)와 종(宗)의 칭호에 우열이 있지 않았습니다. 창업군주만이 홀로 '조'로 호칭됐고, 선대의 뒤를 이은 그 밖의 군왕들은 비록 큰 공덕이 있어도 '조'를 칭하지 않았습니다. 세조대왕의 경우도 (형인) 문종의 계통을 이어받았는데 '조'로 호칭한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선조대왕이 '조'를 칭한 것도 의리를 보아 옳지 않은 일입니다. 중종대왕은 연산군의 더러운 혼란을 평정했지만 '조'가 아닌 '종'으로 칭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우리가 본받아야 합니다." - <효종실록> 중에서

하지만 인조의 아들 효종은 이러한 상소를 "망령된 의논"이라며 물리쳤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창업군주만 '조'를 쓰는 원칙을 약화시키고, 공이 있는 군주에게도 '조'를 쓸 수 있는 예외규정을 적용했다면 과연 인조에게 무슨 공이 있었단 말인가? 인조는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배척하고 친명외교를 고수하면서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불러오지 않았던가.

당시 인조라는 묘호를 주는 것이 맞다는 측의 주장은 '반정을 통해 종사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했으며, 윤기(倫紀)를 회복시킨 공이 있으니 조를 칭하는 것이 예법에 합당하다'는 논리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인조 때 굶주린 백성들이 무척 많아 이들의 해골이 길바닥에 나뒹구는 신세가 될 정도였다. 다 쓰러져가는 명나라를 섬기려다 병자호란을 당한 인조는 '차라리 광해군 시대가 낫다'는 저주에 가까운 원성을 사게 되었다. 그러자 인조 역시 사과문까지 발표하게 된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논리이다. 하기야 뭐든지 자신의 세계관에 따라 세상은 달리 보이는 법이다. 인조에 앞선 선조의 경우 임진왜란 때 백성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쳐 나라와 백성을 도탄에 빠뜨렸지만 그에게 '선종'이 아닌 '선조'의 묘호를 주장하는 자들은 오히려 선조가 임진왜란을 다스렸다고 주장했으니 말이다.

이처럼 원칙 없이 정해진 조선국왕의 묘호는 참으로 헷갈릴 수밖에 없다. 내가 처음 도성 기행을 출발할 때 만났던 계유정난의 주인공 수양대군이 다시 떠오른다. 그의 묘호가 '세조'가 된 것은 어쩌면 조선의 후대국왕들에게 이정표가 된 꼴이다.




태그:#창의문, #서촌기행, #인조반정, #이괄의 난, #백운동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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