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다니엘 블레이크 / 감독 켄 로치 /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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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들고 늙은 노동자가 자신보다 어려운 처지의 이웃을 돕는 장면에서 뭉클했다. 그가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저항을 하자 가슴이 두근댔다. "나는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그의 권리선언문을 들었을 때 먹먹했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이야기다.

국가는 다니엘 블레이크에게 질병수당도 구직수당도 주지 않았다. 심장이 좋지 않아 일할 수 없는 그를 국가는 옥죄었다. "사지는 멀쩡하지 않느냐, 당신은 일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는 구직수당을 받기 위해 사방팔방 이력서를 돌렸지만 국가는 그에게 '노오력'을 요구하며 구직수당마저 끊어버렸다.

빼앗긴 권리 

국가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기업에 맡긴 탓이다. 다니엘 블레이크의 질병수당 자격을 심사한 곳은 영국 정부가 아니라 미국의 민간업체다. 이 업체에 고용된, 이름 모를, 의사도 간호사도 아닌 자칭 의료전문가는 다니엘 블레이크의 심장질환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매뉴얼에 나온 질문을 읊기 바쁘다.

다니엘 블레이크는 자신이 요구할 수 있다고 믿은 권리를 단 한발자국도 전개하지 못한다. 시민의 권리를 기업의 돈벌이로 만든 국가에서는 이익이 권리를 침식한다. 아픈 노동자에게 수당을 내줄수록 의료전문가의 월급과 기업의 수익은 줄어든다. 기업과 노동자들이 시민의 권리와 자존감을 갉아먹는다.

영화 속 디스토피아는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묘사했다. 우리 정부는 국민연금, 건강보험, 코레일, 지하철의 말단 직원들에게까지 성과연봉제를 강요하고 있다. 사용자가 취업규칙을 일방적으로 바꾸고 직원들을 자의적인 성과 평가로 해고할 수 있는 '노동개악'은 노동조합이 없는 곳부터 작동 중이다.

기업은 적극적으로 외주화와 성과주의를 활용한다. 원청은 노동자가 자신을 혹사하고 고객을 기만해야만 하는 시스템을 만들고, 하청은 노동자를 쥐어짜면서 중간착취를 감행한다. 예를 들어 인터넷 기사들과 콜센터 노동자들은 대부분 하도급업체 소속 비정규직인데, 이들의 월급은 작업건수에 비례한다.

국가는 거대한 기업으로 변신 중이고 자본은 예전보다 철저하게 움직이고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국가와 자본의 관계가 얼마나 끈끈한지 확인됐지만 '주식회사 대한민국'과 이재용의 삼성, 정몽구의 현대차, 최태원의 SK, 구본무의 LG, 신동빈의 롯데가 노동자와 시민을 갉아먹는 구조는 그대로다.

국가와 자본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다니엘 블레이크의 고향인 영국의 노동운동가인 스튜어트 하워드(국제운수노련 사무부총장)는 한국 공공부문이 파업하던 지난 9월 방한해 "기본권에 대한 전방위적 공격이 이루어질 때 저항하지 않으면 정치를 혐오하고 현실을 냉소하고 일상이 무기력해진다"고 경고했다.

스튜어트 하워드는 "일할 시간도 고용안정도 보장되지 않는 상황이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에 퍼져 있다"고 전했다. 민영화와 노동개악은 노동조합의 역할을 축소시켰고 이제 영국에는 '0시간 계약직'마저 생겨났다고 한다. 기업은 자신이 필요할 때만 노동자를 골라 쓴다. 사회 전체가 거대한 인력사무소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국가와 자본이 시민과 노동자의 권리를 팔아치우는 곳, 노동조합마저 무력화된 곳에서 발생한 흔한 사건에 관한 영화다. 개, 돼지로 등급이 정해진 우리가 할 일은 이것뿐이다. 노조에서, 광장에서 끊임없이 뭉치고 말하고 싸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니엘 블레이크처럼 버려진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성과연봉제 쉬운 해고 노동개악 희망연대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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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 조직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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