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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8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피해자를 추모하는 인파가 몰렸다. 시민들은 추모의 글을 적은 메모지를 출구 외벽에 붙이거나 헌화 했다.
 지난 5월 18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피해자를 추모하는 인파가 몰렸다. 시민들은 추모의 글을 적은 메모지를 출구 외벽에 붙이거나 헌화 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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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메갈리아'가 등장한 이후 많은 여성들이 일상 속의 차별과 혐오, 폭력에 대한 고발을 시작했다. 그에 따라 '페미니즘'은 2016년 한 해를 돌아볼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가 되었다.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메갈리아 티셔츠를 입고 인증했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교체된 성우, '모자보건법개정'을 비판하며 "진짜 문제는 낙태죄다"라고 말한 검은 시위, "민주주의와 여성혐오는 함께 갈 수 없다"고 외치며 거리로 나선 '페미존'까지. 그 어떤 해보다 많은 여성들이 주체가 되어 거리로 나와 목소리를 냈던 한 해였다.

"오늘도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

5월 17일,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 공용화장실에서 한 여성이 살해당했다. 가해자는 "여자들이 자기를 무시해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이 가해자는 남성 7명을 그냥 보낸 후 범행 대상인 '여성'을 기다렸다.

이후 여성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살해당할 수 있다'는 점이 분노하며 거리로 나왔다. 그들은 스스로 주체가 되어 강남역 10번 출구에 포스트잇을 붙이기 시작했다. 추모 메시지를 적은 포스트잇이었다. '오늘도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메시지가 강남역을 가득 채우기 시작하였고, 일주일도 채 안되어 전국적으로 3만 5000여 개의 포스트잇이 모였다. 피해자를 추모하는 화환과 피해자인 '너'를 최선을 다해 지켜내겠다며 두고간 인형도 있었다.

강남역 10번 출구에 모인 여성들의 분노는 곧 연대가 되었다. 자유발언대를 조직하여 일상 속의 차별과 폭력을 고발하며 다 함께 울고,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서로에게 알렸다.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이 메갈리아 이후 또 하나의 페미니즘 분기점이 된 것이다.

"여자에겐 왕자가 필요 없다"

지난 7월 19일 게임업체 넥슨은 한 캐릭터의 성우를 교체했다. 성우 교체는 해당 캐릭터의 성우가 '메갈리아 티셔츠'를 입고 인증한 사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해당 티셔츠는 페이스북 페이지 '메갈리아 4'에서 페이스북 코리아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는 데 필요한 후원금을 모으기 위해 제작된 티셔츠였다.

페이스북 코리아는 수많은 삭제요청에도 '김치녀' 등의 페이지에 올라온 여성혐오 게시물에는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고, '메갈리아' 페이지는 두 차례나 삭제하는 편파적인 운영 태도를 보였다.

또한 티셔츠에는 "GIRLS DO NOT NEED A PRINCE(여자에겐 왕자가 필요 없다) - 일상 속 페미니즘"이라는,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상식적인 문구가 적혀있었을 뿐이었다. 메갈리아 티셔츠를 입은 여성성우를 둘러싼 논란이 시작된 지 20시간도 지나지 않아 넥슨은 성우 교체를 발표했다. 이는 여성이 페미니스트임을 드러내는 순간 비난 당하고 낙인이 찍힌다는 걸 보여줬다. 심지어 페미니스트 여성 전반의 생존권과 직결되는 문제가 되었다.

우리는 누구나 자유롭게 페미니스트임을 밝힐 수 있어야 한다. 페미니즘에 동의하고 지지한다는 사실을 드러냈다는 이유로 사회적, 경제적 불이익을 주는 일이 당연시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페미니스트임을 당당히 드러내는 많은 이들이 "우리의 목소리를 지우지 말라"며, 거리로 나와 목소리를 내었다. 페미니스트를 불편해하는 이들이 삭제한 목소리는 우리 모두의 목소리이기도 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페미니스트들이 목소리를 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날, 한 성우 개인의 목소리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목소리라는 것을 외치며, 우리의 목소리를 지우고 감추려고 한 이들에게 너희가 한 행동이 얼마나 부당한 것이며 그럼에도 우리는 목소리 내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돌려주었다.

"내 자궁은 나의 것이다"

우리 사회는 여성들에게 '낙태'가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생명이 얼마나 중요한 지에 대해서 가르쳤다. 우리 사회는 생명에 대해 말하면서, 여성의 몸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임신, 임신중절, 출산은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인데도 국가가 이에 대한 권리를 통제하려고만 하였다. 형법상 낙태죄가 존재하고, 낙태를 한 여성을 처벌 할 수 있다. 낙태는 '죄'인 것이다.

보건복지부에서는 '모자보건법 제 14조 1항을 위반해 임신중절수술을 한 경우'를 '비도덕적 진료행위'로 규정하고 있으며 모자보건법 개정을 통해 적발 시 현행 1개월에서 최대 12개월로 의사 자격을 정지하려고 하였다. 이에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개정안이 수정되지 않는다면 낙태 수술을 전면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당장 많은 산모가 피해를 보더라도 낙태 수술을 중단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이에 대해 많은 여성단체에서 "인공임신중절 처벌을 강화하는 의료법 개정 입법예고안을 철회하고 형법상의 '낙태죄'를 폐지하라"는 요지의 공동성명을 발표하였으며, "진짜 문제는 낙태죄다"라며 낙태죄 폐지를 위한 검은시위를 열었다.

낙태죄를 유지하며 여성의 몸을 국가가 무조건 통제하려는 것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문제이며 여성의 몸을 출산의 도구로 보는 시선이다. 여성이 자신의 몸에 일어나는 변화들, 나의 생명의 일부에 대해 스스로 선택할 권리, 말할 수 있는 권리가 단 한번이라도 있었는지, 임신/출산으로 인해 여성이 삶이 어떻게 파괴될 수 있는지, 어떻게 생존권이 박탈당하는지에 대해 이 사회는 제대로 고민한 적이 없다.

그동안 여성들은 태아만이 생명이고, 여성은 생명이 아닌 사회에서 살아왔다. 여성의 몸은 공공재였으며, 국가 인구조절 정책의 대상으로서 여성의 몸은 다뤄져 온 것이다. '검은 시위'에서는 그동안 자기의 몸으로부터 소외당했던 여성들이 내 몸이 바로 나이며, 내 몸은 공공재가 아니고, 내 몸은 처벌받을 대상이 아니다, 우리의 권리를 요구한다고 외치며 다시 한 번 연대하였다. 낙태가 금기시 되고 '죄'가 되는 사회를 향해 "내 자궁은 나의 것이다"라고 계속 외쳐서 권리를 쟁취해나가는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민주주의는 여성혐오와 함께 갈 수 없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시작으로 정재계의 수많은 기업과 인사들이 얽힌 불법적인 커넥션이 하루가 다르게 새롭게 드러났다. 그러나 이와 함께 박근혜와 최순실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이들이 자연스럽게 여성혐오를 되풀이 하고 있다. 언론에서 '특종'이라며 내놓은 소소한 가십들, 개그코너의 풍자영상, 하다못해 대통령의 변호인까지도 당사자들의 여성성을 비꼬아내어 성적 프레임으로 비난받도록 호도하고 있다.

말만 꺼내면 다 아는 정치인들의 입에서 "근본없는 저잣거리 아녀자"로 비유되며, '탐욕스럽기만 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여성이 감히 정치에 손을 댔다'고 포장되고 있다. 특히나 박근혜 대통령을 '언니' 또는 '공주'로 표현하고 암탉으로 묘사하며 박근혜-최순실을 그들이 가진 죄의 무게가 아닌, 단지 그들이 가진 희화화 되고 왜곡된 '여성성'으로 이 사태를 심판한다.

박근혜 대통령을 퇴진시키기 위해 집회에 나온 시민들 중 일부는 박근혜에게 당연하다는 듯이 '결혼을 안 해서', '병x년', '외로우면 시집을 가라', '닭x' 등 온갖 소수자 혐오를 갖다 붙이며 비하하였다. 그 손길은 집회에 나온 여성들에게도 뻗어나갔다. 집회에 나간 여성들이 성희롱 당하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하고 욕을 먹는 상황들이 계속 발생하였다. 그들의 혐오가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장애인, 성소수자, 청소년 등 모든 사회적 소수자 비하로도 뻗어 나갔다.

이에 대응해 페미니스트들은 "페미존"을 조직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세상을 바꾼다. 페미(니스트)가, 장애인이, 퀴어가, 청소년이, 아르바이트 노동자가 세상을 바꾼다!", "페미가 당당해야 나라가 산다!", "페미가 당당해야 박근혜가 퇴진한다!", "우리는 용기다, 서로의 용기다!"와 같은 구호를 외치며 소수자 혐오발언 · 혐오문구를 지양하고 평등집회를 추구하였다. 혐오에 동참하지 않으려는 노력과, 페미니즘적 가치와 관점의 정치를 하기 위해 망설이지 않고 또 한 번 거리로 나왔다.

민주주의와 여성혐오는 함께 갈 수 없다. 여성들이 대상화되지 않고 당당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그 어떤 소수자도 혐오당하지 않는, '우리'가 주인공이 되는 사회를 만들 때까지 페미니스트들의 행동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페이스북 페이지 '강남역 10번 출구' 운영진입니다. 이 글은 천주교인권위원회 월간 소식지 <교회와 인권>에도 실렸습니다.



태그:#페미니즘, #페미니스트, #여성인권, #민주주의, #여성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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