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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할 정(定, ding)은 집 면(?)과 바를 정(正)이 결합된 형태로, 발걸음(止)이 집에 이르러 편안하게 안착되었음을 나타낸다.
▲ 定 정할 정(定, ding)은 집 면(?)과 바를 정(正)이 결합된 형태로, 발걸음(止)이 집에 이르러 편안하게 안착되었음을 나타낸다.
ⓒ 漢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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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는 왜 청바지에 검은색 터틀넥을 고집했을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뇌 과학적 해석이 흥미롭다. 인간의 뇌가 하루에 내릴 수 있는 결정의 양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 무슨 옷을 입을지를 고민하며 몇 개의 결정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회사나 고객을 위해 사용해야 할 좋은 결정의 기회를 미리 사용해버리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정한 패턴의 옷을 입음으로써 뇌가 할 수 있는 좋은 결정의 기회를 아껴 저축해 놓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설명이다. 다소 억지스러운 측면도 없지 않지만, 무언가를 결정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며, 우리 뇌가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는 일임에는 분명하다.

우리가 정해진 것이 없는, 어떤 길 위에 있다고 가정해보자. 지친 발걸음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태가 지속된다면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정할 정(定, dìng)은 집 면(宀)과 바를 정(正)이 결합된 형태로, 발걸음(止)이 집에 이르러 바르고, 안정적으로, 편안하게 안착되었음을 나타낸다. 정처 없이 서성이던 발걸음이 편안한 안식처에 이르러 안정을 찾은 모습이다. 그렇게 한번 정했으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데에서 '반드시' 라는 의미도 파생된 것으로 보인다.

고대 중국에서 왕위를 물려줄 후계자를 정할 때 혈통 관계가 없는, 재야의 능력 있는 사람을 찾아 왕위를 넘겨주는 선양(禪讓)시스템이 있었다. 바로 요(堯)임금이 아들 단주(丹朱) 대신 순(舜)에게, 순이 아들 상균(商均) 대신 우(禹)에게 왕위를 물려준 사례가 대표적이고, 이는 이상적인 왕조 교체의 모델로 여겨져 왔다.

우는 바로 중국 최초의 왕조 하(夏)나라의 시조다. 황하 치수에 성공한 우는 구주(九州)에서 바친 쇠와 금으로 아홉 개의 세발솥을 만드는데 이것이 바로 구정(九鼎)이다. 명당, 옥새와 함께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세 가지 기물로 여겨져 왔다. 구정을 정하다는 말인 정정(定鼎)이 새로 나라를 세워 도읍을 정한다는 의미도 여기서 생겨났다.

그렇다면 우는 죽으며 누구에게 그 옥새와 구정을 물려주었을까? 우도 선양시스템에 따라 아들 계(啓)가 아닌 신하 익(益)에게 왕위를 넘기려 했으나, 신하들이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세습의 권한을 지닌 아들 계에서 찾으며 세습시스템이 새로운 왕위 계승체제로 자리 잡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세습체제는 "고정된 논지는 고치기 힘들다(定論難改)"는 말처럼 수천 년 동안 왕위 계승체제로 정착되었으며, 선양은 왕조가 역성혁명으로 교체될 때 대의명분으로 악용될 뿐이었다.

"산천 도망은 해도 팔자 도망은 못한다"는 속담을 중국어에서는 "정해진 팔자는 피하기 어렵다(定數難逃)"는 말로 표현한다. 스티브 잡스가 뇌가 감당할 수 있는 결정의 수를 고려해 결정의 수를 아낀 것처럼, 작은 에너지라도 아끼며 우리 운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어쩌면 정해진 운명을 개척해가는 시작이지 않을까.


태그:#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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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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