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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생의 업'이라는 말이 있다. 작가로 치자면 일생을 바쳤거나 혹은 혼신을 다해 쓴 작품을 일컫는다. 일본 만화 가운데는 30년 넘게 연재되는 작품들도 적지 않다. 세계를 누비는 냉철한 킬러 이야기 <고르고 13>은 사이토 다카오가 1969년 연재를 시작해 47년째인 현재 단행본만 150권이 출간되었다. 국내 작가 가운데 소설가 조정래는 대하소설 <한강>을 필생의 업으로 삼고 썼다고 한다.

최근 출간된 소설가 박도(朴鍍·71) 선생의 <허형식 장군>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작가가 한 항일투쟁가를 알게 된지 무려 16년 만에 비로소 실록소설로 탄생시킨 작품이다. 1990년대 말부터 작가와 인연을 맺어온 필자는 작가가 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많은 고심을 했는지를 곁에서 지켜보았다.

 소설가 박도 선생이 펴낸 <허형식 장군> 표지
 소설가 박도 선생이 펴낸 <허형식 장군> 표지
ⓒ 정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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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8월 초순, 박 선생은 10여 일 동안 중국 동북3성의 항일유적지를 답사한 후 <민족반역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우리문학사)를 출간했다. 답사에 앞서 그는 서울 동작동과 대전 국립묘지 애국선열들의 묘소를 찾아 "선열들의 발자취를 백분의 일이나마 제대로 보고 바로 쓸 수 있게 해 달라"고 마음속으로 빌었다고 한다. 답사길에는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李相龍) 선생의 증손 이항증(李恒曾) 씨와 일송 김동삼(金東三) 선생의 손자 김중생(金中生) 씨가 동행했다.

답사 당시 박 선생은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 동북열사기념관에 들렀다가 고향(경북 구미) 출신의 한 파르티잔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겸 제3군장을 지낸 허형식(許亨植, 일명 許克, 또는 李熙山) 장군으로, 의병장 왕산 허위(許蔿·1855∼1908) 선생의 종질이다.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박 선생은 이듬해 혼자서 허형식 장군의 희생지인 흑룡강성 경안현 청송령을 찾아 장군의 희생비(碑)에 한 아름의 들꽃을 꺾어 바쳤다. 

박 선생의 조부는 낙동강 건너편 구미 도개면에 살다가 원평동 장터마을로 이사했다. 이유는 단 하나, 금오산에 매료된 때문이었다. 박 선생의 구미 옛집 마당에서 보면 구미의 상징인 금오산이 정남향으로 빤히 바라보였다. 그의 조부는 이따금씩 금오산을 바라보면서 "볼수록 명산이로다!" 하면서 감탄하곤 했다. 박 선생이 초등학교 시절 그의 조부는 그에게 이런 말을 했다.

"예로부터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다. 왜정 때부터 이 어지러운 나라를 구하겠다고 나선 조선 무명베 같은 그런 튼실한 사람이 어딘가 있을 것이다. 네가 한번 찾아보아라!"

평소 조부가 남긴 말을 기억하고 있던 박 선생은 만주 답사길에 만난 동향 출신의 항일영웅 허형식 장군을 우연히 만난 후 그에 대한 책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2000년대 초 박 선생은 필자에게 허형식 장군과 만주군 장교 출신의 박정희 전 대통령을 대비시켜 작품을 쓰겠다고 얘기한 바 있다. 박 전 대통령 역시 경북 구미 출신이다. 박 전 대통령이 태어난 구미 상모동과 허형식의 고향인 임은동은 철길 하나 사이다.

 일본육사 졸업 후 견습사관을 마치고 장교로 부임하기 직전의 박정희 전 대통령
 일본육사 졸업 후 견습사관을 마치고 장교로 부임하기 직전의 박정희 전 대통령
ⓒ 정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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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식은 허위 선생의 사촌 동생인 허필(許苾)의 아들로 1909년 경북 선산(현 구미시)에서 태어났다. 1920년대 초 부친을 따라 만주로 이주한 그는 요령성 개원현에 살다가 1929년 하얼빈으로 이사하였다. 허형식은 스물 한 살 되던 해인 1930년 5월1일 '5·1절 시위행진'을 계기로 항일운동 전면에 등장하였다. 그는 한인청년 40여명을 규합하여 하얼빈 주재 일본영사관을 습격하였다.

이 사건으로 허형식은 '치안교란혐의'로 체포돼 봉천(奉天·현 瀋陽)감옥에 수감되었다. 여기서 그는 당시 북만(北滿) 지역 항일연군의 수령격인 조상지(趙尙志)와 중국 공산당 소속 항일운동가 김책(金策·전 북한 부수상 역임)을 만나면서 동북항일연군과 인연을 맺게 됐다. 김책의 소개로 1935년 1월 동북항일연군 제3군 산하 제2연대장에 부임한 그는 이듬해 부대 재편성으로 제3사(師)를 지휘하면서 일약 조상지 다음가는 지도자로 떠올랐다. 그의 나이 26세 때였다. 

1936년 가을 일본군이 삼강성 일대의 항일세력 토벌에 나서자 그는 선발부대를 이끌고 일본군과 교전, 일본군 80여명을 사살하고 말 30여필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1937년 2월 북만지방의 항일연군회의가 열렸을 때 그는 북만 항일연군 총사령부 및 제3군의 전권대표로 이 회의에 참가했으며 이듬해 4월 제3·6·9·11군을 통합, 제3로군(路軍)이 조직되자 총참모장 겸 제3군 군장에 임명됐다.

1940년 그는 일본군의 군사거점인 풍락진을 습격하여 경찰국장을 사살하고 하얼빈 일대를 점령하여 관동군을 놀라게 하였다. 그가 지휘한 제3로군은 용남·용북 지방에서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300여회의 전투를 벌여 이 일대 27개 도시를 점령하였다. 자료에 의하면 제3로군은 기차역 5곳, 일본의용대훈련소 5곳, 비행장 1곳을 습격하여 만주군과 경찰 1,557명을 사살했으며 기관총 7정, 박격포 4문, 기타 총기류 1,500여점을 노획한 것으로 나와 있다.

1940년대 들어 동북항일연군의 지도자 조상지와 양정우(楊靖宇)가 사망하자 대부분의 대원들은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 소련 영내로 도피했다. 그러나 허형식은 만주에 남아 전구를 지키며 일제와 맞서 싸웠다. 그러던 중 그는 예하부대의 소분대사업을 검사하러 나갔다가 일본군 토벌대의 습격을 받고 최후를 맞았다. 그의 옆에는 동지 진운상도 쓰러져 있었다. 1942년 8월3일 오전 6시 43분이었다. 허형식은 33세로 청봉령 소릉하 계곡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허형식의 최후는 비참했다. 이튿날 그의 동지들은 전투현장에서 1km 떨어진 시냇가에서 아직 핏기가 남아 있는 사람의 다리뼈와 권총 한 자루를 발견했다. 일본군 토벌대는 그와 진운상의 목을 베어간 후 나머지 시신은 그대로 버리고 달아났다. 그의 시신은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밤중에 산짐승들이 몰려와 두 전사의 살점과 내장은 다 뜯어먹고 사라지자 이번에는 까마귀들이 몰려와 발기발기 발겨 먹었다. 동지들은 다리뼈만이라도 그곳에 묻어주고는 돌덩이로 무덤 표시를 해두었다. 허형식의 얼굴을 알지 못했던 일본군 토벌대는 전향한 이화당(제3로군 9군 군장)을 통해 허형식임을 확인하고는 쾌재를 불렀다.

 하얼빈 동북항일연군 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허형식의 권총
 하얼빈 동북항일연군 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허형식의 권총
ⓒ 정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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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식은 한동안 가명 때문에 중국인으로 알려져 왔다. 허형식이 국내에 처음 알려진 것은 장세윤 동북아역사재단 교수실장이 1993년에 쓴 '허형식 연구'가 처음이다. 이어 1999년에 조선족 역사연구가 유순호 씨가 관련 연구 성과를 낸 바 있다. 당시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기자로 근무하고 있던 필자는 국내 일간지 사상 처음으로 허형식을 국내 언론에 보도하였는데 귀공자 티가 나는 앳된 모습의 그의 사진도 이때 처음 공개됐다.

책 말미에 '부치는 글'을 쓴 장세윤 실장은 "이 작품은 '소설'을 표방하지만 일반소설이라기보다 실록, 아니 전기에 가깝다고 본다"며 "일부 픽션 부분은 사실 전개에 무리가 없는 내용으로 최소화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평했다. 장 실장의 말대로 이 작품은 소설 형식을 빌리긴 했지만 줄거리는 전부 사실을 기반으로 한 실록소설이다. 흔히 말하는 '팩션(faction)'이라고 할 수 있겠다.        

중국공산당은 1998년 10월 허형식 장군이 전사한 청봉령 들머리에 '허형식 희생지' 기념비를 세웠다. 한국인으로서 기념비를 찾은 사람은 박 선생이 처음이었다. 빈손으로 기념비를 찾은 게 겸연쩍었던 박 선생은 기념비 주변 들판에서 들꽃을 꺾어 즉석에서 꽃다발을 만들어 바쳤다. 경안현 중심지에는 그를 기리는 '형식 공원'이 건립되었다. 그러나 구미에 있는 그의 생가는 폐허가 되어 쓰레기가 쌓여 있다고 한다. 반면 구미시는 수백억을 박정희 생가 주변에 동상과 기념공원을 건립했다.

 2000년 여름 허형식 장군 희생지 기념비를 찾아 들꽃을 바친 후 기념 촬영한 박도 선생
 2000년 여름 허형식 장군 희생지 기념비를 찾아 들꽃을 바친 후 기념 촬영한 박도 선생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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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식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쓰려고 그간 대여섯 차례나 시도를 했던 박 선생은 지난해 연말부터 오대산 월정사에 머물면서 마침내 이를 탈고했다. 역사에 파묻힌 한 항일 파르티잔은 비로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됐는데 이는 순전히 작가의 소명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대붕(大鵬)을 그리려다 연작(燕雀)을 그린 꼴"이라며 겸손해했다. 머리글에서 그는 이 작품을 쓰게 된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해방 후 우리 백성들은 줄곧 오만 잡스러움과 가짜들의 추악한 행태로 매우 지치고 정의와 양심에 허기져 있다. 나는 이번 작품에서 조선의 무명옷처럼 순결한 한 항일 파르티잔의 올곧은 생애를 오롯이 그려 보았다. 이 작품이 지치고 허기진 백성들에게 한 줄기 빛으로, 한 모금 생명수로 앞날에 대한 '희망'을 주고 삶의 활력소가 되었으면 좋겠다."   

 서울 서대문구 독립문 네거리에 있는 독립문을 배경으로 선 박도 선생 (2013년, 필자 촬영)
 서울 서대문구 독립문 네거리에 있는 독립문을 배경으로 선 박도 선생 (2013년, 필자 촬영)
ⓒ 정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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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탈고한 후 그는 조부의 산소를 찾아 고했다.

"할아버지, 제가 금오산 기슭에서 태어난 충절의 인물을 찾아 한 편의 소설을 썼습니다."
"아무튼 애썼다. 언젠가 조선 땅에 거짓의 안개가 걷히면 그 어른 행적도 바르게 드러날 것이다."

그날 밤 박 선생은 잠자리에서 금오산 기슭 채미정(採薇亭) 앞에 '항일명장 허형식 장군'의 동상이 우뚝 세워지는 꿈을 꾸었다. 경향 각지의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제막식이 거행되는 동안 "대한독립만세!"를 계속 연호했다. 금오산은 그 모든 걸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구미에 허형식 장군의 동상이 세워질 날은 그 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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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언론사에서 근무했고, 친일청산 등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평소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갈망해 왔습니다.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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