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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문열이 지난 2일 조선일보에 게재한 칼럼.
 소설가 이문열이 지난 2일 조선일보에 게재한 칼럼.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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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문열은 지난 2일 한 신문에 "보수여 죽어라, 죽기 전에… 새롭게 태어나 힘들여 자라길"이라는 제목의 도발적인 칼럼을 썼다. 위기에 빠진 보수가 가야 할 길을 찾는 시리즈의 칼럼에서 이문열은 엉뚱하게도 백만의 촛불에 칼을 겨눴다.

헌법을 유린한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농단에 대해 보도한 언론을 '삼류 도색 잡지'에 비했고, 광화문에 모인 백 만의 촛불을 국민의 "3%가 한군데 모여... 추운 겨울밤에 밤새 몰려다녔다"고 폄하하는가 하면, 촛불 시위를 북한의 아리랑 축전에 빗대며 정상적인 국가를 원하는 민의에 색깔론을 들이대고 있다.

이문열 작가의 아버지 이원철씨는 서울대 농대 교수이자 남로당계 간부이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군이 후퇴할 때 가족을 남겨둔 채 월북을 했다. 이문열씨가 세 살이었던 때였다. 어머니의 손에 자란 그는 어린 시절 매우 불우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월북한 아버지로 인한 '연좌제' 때문이었다. 2007년 EBS의 한 프로그램에서 그는 "어머니에게 연좌제는 더 혹독했고 겪으면 겪을수록 공포는 더 과장돼 갔다"라고 말한 바 있다. 아버지 이원철씨는 이문열의 소설 <영웅시대>와 <변경>에 등장한다.

이문열은 밀양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한때는 고아원에서 생활을 했다고 전한다. 그가 서울에서 '종암국민학교'를 다니다가 '밀양국민학교'로 전학하고 여기서 졸업을 하는데, 이 이야기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배경이 된다. 소설은 "자유당 정권이 아직은 그 마지막 기승을 부리고 있던 그해 삼 월중순, 나는 그때껏 자랑스레 다니던 서울의 명문 국민학교를 떠나 한 작은 읍의 별로 볼 것 없는 국민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는 대목으로 시작한다.

작가 이문열이 겪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비슷하게 겪은 이가 한 사람 더 있다. 영화 <암살>과 <밀정>으로 대중들에게 알려진 약산 김원봉 선생의 외조카 김태영씨이다. 김태영씨는 약산의 막내 여동생 김학봉씨의 자제로, '의열단 약산 김원봉 장학회' 회장이며 '임시정부 건립위원회' 이사이다.

약산 김원봉 선생은 일제시대 의열단과 조선의용대를 이끌던 독립투사였으나, 해방 후 친일세력이 판치는 남한에서 좌절감을 맛보며 1947년 월북했다. 약산의 가족에게도 시련이 닥쳤다. 한국 전쟁이 일어난 후 약산의 형제 (김태영씨의 외삼촌) 4명이 보도연맹 사건으로 총살을 당했고 약산의 사촌 (김태영씨의 외당숙) 5명도 이때 총살당했다.

김태영씨의 외할아버지는 연금 당한 채 돌아가셨으며 큰아버지가 아버지로 오인받아 처형당했고, 아버지는 우익들에 의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병을 얻어 그가 어릴 때 돌아가셨다. 어머니 (약산의 막내 여동생 김학봉 여사)도 약산의 월북으로 인해 종로경찰서로 연행되어 모진 심문을 받았다.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고 김태영씨 가족에게도 연좌제의 족쇄가 씌워졌다.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남자 3형제는 모두 고아원으로 갔다. 김원봉 선생의 고향이었던 밀양에 있던 고아원이었다. 당시 밀양에는 세 개의 고아원이 있었는데, 이문열이 지냈던 고아원은 김태영씨의 고아원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 당시 고아원은 대부분 이승만이 교회 목사나 장로들에게 일제가 남기고 간 땅과 재산을 주어서 설립 운영하게 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이비 종교인인 일부 원장들이 고아원 자산을 탈취하고 원생들을 중노동으로 착취했으며, 그리고 심한 매질로 학대하였고 또한 성적 노리개로 삼는 일도 있었다. 김태영씨도 이런 고아원에서 '지옥같은 6년을 보냈다"고 증언한다. 이문열 작가의 고아원 시절도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문열씨는 이 혹독한 시절 때문에 "20대 후반 아버지를 관념적으로 살해"하고 보수주의자의 길을 선택했다.

김태영씨와 이문열씨는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낸 사이는 아니나, 이문열씨가 무명 작가 시절 밀양을 내려올 때면 가끔 어울리던 사이였다. 윗세대가 가졌던 사상 때문에 남쪽에 남겨진 그들은, 군사정권의 극악한 탄압 때문에 밀양의 고아원에서, 그리고 같은 초등학교에서 시기를 달리하여 불우한 시절을 보낸 인연이 있다.

김태영씨가 촛불시위를 폄하한 이문열 작가에게 공개 편지를 썼다.

약산 김원봉 선생의 조카 김태영씨
 약산 김원봉 선생의 조카 김태영씨
ⓒ 이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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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은 시민들의 독배를 받을 것인가?

나는 이문열씨와 인연이 있습니다. 고향 밀양의 고아원에서 자란 인연이 있고, 내가 이십 대 초반에 잠시 연극인으로 있을 때 어울려 밥도 먹고 술도 마신 인연입니다. 그러나 가장 동병상련적인 연은 당신 집안의 역사와 나의 집안의 역사가 이데올로기에 의한 비극의 역사로 이어져있다는 점입니다.

나의 큰아버님은 내 아버님과 닮아 아버님으로 착각해 학살당했고, 우익들에 의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김원봉의 동생이란 죄로 여고생 때 치욕적인 고문을 당한 어머니를 둔 나는 외할머님의 등에서 자랐습니다. 이승만에 의해 학살당한 외삼촌들이 박정희 군부에게 부관참시 된 이후, 나는 형제들과 고아원에서 자랐습니다. 여기까지는 이문열씨의 비극적 가족사와 유사할 것입니다.

이문열씨는 성공한 작가이고 공인입니다. 나도 한때는 당신의 탁월한 능력을 사랑했지만, 지금은 당신의 반시민적이고 반민족적인, 사회적 철학이 결여된 인간성과 무지에 환멸을 느낍니다.

당신이 무명을 갓 벗어나 생활의 여유를 찾았을 때, 굶주림의 트라우마로 인해 늘 안방에다 쌀가마니를 두고 있었다는 일화도 생각나고, 고아원 시절에 초등학생이었던 당신이 강제로 밭일에 동원돼 노동을 했던 날들이 너무도 싫었다는 말도 기억납니다.

그런 학대의 시간들을 견뎌낸 사람이 어찌 비정상적인 사회가 왜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굶주림이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한 역사의 깊은 통찰이 없는지 의문입니다.

아무리 자유민주주의 제도라 해도, 가진 자가 더 많이 갖게 되는 시스템을 가진 국가는 시민을 위한 국가가 아니며 시민들은 그런 정부를 부정하는 게 당연합니다. 국가의 존재 이유 중 하나는, 부의 균형을 이루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여, 국민들의 생활을 안정되게 만듦으로써 가능한 행복을 누리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회라는 공동체 속에 살고 있습니다. 베스트셀러 작가도 결코 외계인이 아닙니다. 읽어주는 독자가 있으니 밥을 먹는 것 아닙니까? 그걸 잊어버리면 이미 공동체를 떠난 무인도의 한그루 야자수와 같은 식물작가일 뿐입니다.

당신은 한국의 이데올로기를 볼셰비키나 김일성 일가의 것들과 비교하기를 좋아하고 인간의 자유를 가장 소중히 말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경계선이 존재하는 이데올로기를 말한다는 것 자체가 속박의 사상입니다. 좌우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는 굉장히 위험한 반인류적이며 당신이 가장 중시하는 자유에 반합니다.

당신은 역사에 대한 통찰이 결여되어 있거나, 왕조와 귀족에 대한 자긍심과 잃어버린 봉건 세월에 대한 연민이 당신의 역사관을 지배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당신과 나의 비극은, 한때 히틀러와도 결탁한 스탈린의 독재에 이어지는 김일성의 독재, 그리고 이승만의 반민족적 독재, 이런 자들이 만든 비극일 뿐입니다.

당신은 가족사에 대한 분노로 시민의 자유를 짓밟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 한겨레신문에도 송고하였습니다.



태그:#김원봉, #이문열, #김태영, #의열단, #연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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