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체리향기> 포스터.

영화 <체리향기> 포스터. ⓒ 키아로스타미


'오랫동안 고민했었고 어렵게 결정한 일이다. 더 이상 버틸 힘도 없고 사는 것이 더 무서울 뿐이다.'

모든 걸 체념한 바디의 눈빛과 표정은 공허하다. 그는 오늘 밤 생을 마감하려고 한다. 선택한 방법은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잠에 취해 죽지 않을 경우가 걸린다. 이러한 연유로 도움을 줄 사람을 애타게 찾아 나서지만, 쉽지 않다. 많은 대가를 주겠다고 해도 선 듯 나설 사람이 없다.

영화는 죽기로 작정한 바디가 도움을 줄 사람을 찾아나서는 과정을 그린다. 많은 시도를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그의 자동차에 세 사람이 차례대로 타고 내린다. 순진한 군인청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유학 온 신학생, 그리고 박물관에서 일하는 박제사 노인이다. 세 사람과 이야기하며 죽을 장소까지 오고 가는 내용이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세 사람의 설정을 치밀하게 계획했다. 그의 대부분 작품들이 그렇듯 이번 캐릭터들 역시 비전문 연기인들로 구성됐다. 감독은 캐릭터에 맞는 배우를 찾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다고 한다. 다른 배역들도 어렵게 찾았지만, 세 번째 노인은 거의 지칠 무렵 만나게 됐다고 한다. 그런데 노인은 촬영 후 이름도 밝히지 않고 사라졌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에서 숙연해지는 것은 그의 초연함 때문이다. 더불어 그를 찾아 낸 감독의 혜안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찾은 배우들의 연기는 전체적인 흐름을 생생하게 살리기에 충분했다.


영화를 보고 있자면 먼저 질문이 생긴다. 죽으려는 사람이 수면제를 먹으면 될 일이지 왜 확인할 사람을 구하러 애타게 다니는가? 꼭 죽음의 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있는 건가? 그렇다면 그가 원하는 것은 죽어야 할 확신이며, 반대로 살아야 할 확신이다.

주인공 바디가 만난 세 사람은 바디가 살아 왔던 일생과 중요하게 맞물린다. 이들을 연결하면 한편의 파노라마가 된다. 바디도 군인청년처럼 군대에 있었던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말한다. 그 시절 많은 친구를 만났으며 기쁘게 살았다고 한다. 바디는 군인 청년에게 요즘 구보를 할 때 어떻게 하느냐고 묻는다. 굳었던 바디의 표정이 잠깐 풀리는 순간이다.

그와 많은 이야기를 하며 자신을 도와 달라고 하지만 끝내 겁먹은 청년은 달아나고 만다. 청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구령에 맞춰 구보를 하는 군인들이 보인다. 행복했던 시간이어서일까? 이는 엔딩에 다시 한 번 나온다. 두 번째로 만난 신학생과의 대화는 지금까지 힘들었던 바디의 고통·번뇌의 시간과 대비된다. 신학생도 바디의 제안을 거절한다.

세 번째로 만난 노인은 지금 현재 바디의 심정을 십분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자살 직전까지 갔던 경험이 있다. 밧줄을 걸기 위해 올라간 체리 나무에서 맛 본 체리가 그에게 삶의 강한 의지로 작용했다. 그는 이후 세상의 모든 것이 달리 보였고 지금까지 잘 살아가고 있다고 고백한다.

영화는 세 사람을 통해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 사람의 지나온 시간과 현재를 돌아보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던 것이다.

당신의 체리향기는?


노인을 만난 이후 카메라의 시선은 이전과 사뭇 다르다. 지루할 정도로 황폐한 산비탈을 오르내리는 바디의 시선은 사람 찾는 것에 급급하다. 배경으로 보이는 도시의 풍경, 일하는 사람들, 기계, 자동차 등은 황토 먼지에 가려져 있다. 이것은 일상의 참된 의미가 뿌연 먼지 속에 가려져 있다는 것을 표현한 게 아닐까.

이제 바디의 시선은 주변에서 뛰노는 아이들과 하늘을 주시한다. 처음 본 듯 석양의 노을은 강렬하게 타오른다. 노인의 말을 시종일관 무심히 듣고만 있었던 바디에게 그의 이야기가 깊이 박혀버린 것일까?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자실을 시도한다. 결국 바디는 '체리 향기'를 못 만난 것일까?

노인에게 체리의 달콤한 맛은 삶의 의미를 가져다 줄만큼 강렬한 도구였다. 체리의 달콤함을 어떤 이는 버스에서 나오는 유행가 가사에서, 또 다른 이는 누군가의 한 마디에서 찾기도 한다. 삶에 전율을 느낄 정도의 만남은 모든 것을 상실한 순간에 만난다고 한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바디가 부디 자신의 체리 향기를 만났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바디가 자살을 시도하고 영화가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반전이 있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독특함이다. 이런 독특함은 그간 그의 작품에서 많이 시도됐다. 어디까지 영화이고 현실인지 모호한 부분. 감독인 키아로스타미 자신이 등장해 촬영이 끝났다고 지시를 내린다. 이를 '메이킹필름'이라고 한다. 낮은 채도의 화면이 밝은 톤으로 바뀐다. 현실로 돌아온 영화는 관객이 넘겨받아 풀어야 할 과제로 전환된다.

순간,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체리 향기>는 삶을 담아내는 작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간결하고 반복적인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는 지루할 수도 있지만, 곱씹을수록 강렬해진다. 그의 향기가 오래토록 은은하게 남는 이유다. 영화 <체리 향기>는 97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다. 올 7월 세상을 떠난 그에게 감사하며, 또 못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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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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