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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아래, 큰 것과 작은 것 등의 위계가 허물어지고 해체된 소박한 필치의 마을그림들이 지닌 역설(逆說)은 직설 못지않는 힘을 가진다. - 김소원 성북예술창작터 큐레이터 작품해설 중
▲ '블랙리스트 작가' 이선일 그림전시회 <마을을 살다> 포스터. 위와 아래, 큰 것과 작은 것 등의 위계가 허물어지고 해체된 소박한 필치의 마을그림들이 지닌 역설(逆說)은 직설 못지않는 힘을 가진다. - 김소원 성북예술창작터 큐레이터 작품해설 중
ⓒ 이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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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리스트 작가' 이선일의 그림전 <마을을 살다>에 다녀왔다. 전시장은 북악산 기슭 성북구가 사서 꾸민 공간이었다. '마을을 사는 작가'답게 작가는 자기 동네에 판을 펼쳤다. 낙산 장수마을 작업실을 나와, 북악산 북정마을 등성이로 작품 마실을 떠난 것. 일산서 작품전을 보러 온 동료작가 서수경씨는 "길을 잃고 주변을 헤매 다니고 싶은 곳"이라고 말했다. 하늘을 인 숲 아래 지붕 낮은 집들이 펼쳐져 있었다. 인터뷰는 지난 4일 이곳 성북도원에서 이루어졌다.

- 전시장의 그림을 본 내 어린 아이가 그러더라. "그림마다 공통점이 있어요. 모두 나무가 있네요."  
"나뭇가지는 기운이 끝에까지 뻗쳐있다. 그림을 배우고 그리면서 찾았던 선이었다. 장수마을에 작업실을 열고, 지역 일을 하면서 마을 지도를 그렸다. 거기 골목길이 이어진 모습에서도 나무가 보이더라. (그는 강정 바닷가로 흐르는 내에서도 나무를 보았다) 내게 나무는 마을의 상징화된 형태이기도 하다."

- 그림 안에는 내가 아는 마을도 여럿이었다. 구럼비가 지평선 너머 섬을 바라보는 강정마을도 보이고, 여기 서울성곽 아래 성북동 마을도 보이고…. 마을을 토양으로 해 자라는 듯한 큰 나무도 인상적이었다.   
"거긴 월곡마을도 있다. 학교 다닐 때 버스에서 올려다본 산동네. 재개발되면서 사라졌다. 당시 철거현장에 가보니까, 지붕 없는 집들이 많았다. 집을 지을 때는 지붕을 제일 나중에 올리는데, 집을 부술 때는 그 반대였다. 어느 경우엔 산 하나가 몽땅 사라진 적도 있다. 기억조차 사라지게 된 그때 얼마나 황망했는지…."

이선일 작가는 자신이 사는 마을을 그렸다. 동시에 강정 용산 밀양 같은 깨진 마을들, 월곡처럼 사라진 마을, 그리고 자신이 꿈꾸는 마을을 그린다.
▲ 장수마을을 산다 이선일 작가는 자신이 사는 마을을 그렸다. 동시에 강정 용산 밀양 같은 깨진 마을들, 월곡처럼 사라진 마을, 그리고 자신이 꿈꾸는 마을을 그린다.
ⓒ 이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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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곡 밀양 용산 강정, 마을에서 마을을 그리다

현실이 지나고 나면 기억이 남는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글로 남기고, 어떤 이들은 그림을 그린다. 여기엔 형태와 색채가 남는다. 사라진 것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은 무엇으로 남는가? 거기엔 열기와 정서가 남는다. 그것은 오롯하게 예술가의 흔적이다. 그는 어떤 세상을 살아왔을까?

- 당신은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운동 현장에 있었다. 용산에도 갔고 밀양의 송전탑 건설 반대운동에도 참여했다. 물론 김진숙의 한진중공업 고공농성장으로 희망버스도 탔고…. 그곳들은 모두 우리 시대의 모순들을 담고 있는 투쟁현장들이다. 화가로서 박근혜 대통령을 독재자로 풍자하는 전시도 열었었다. 이런 행동과 이념들은 마을과 어떤 관계인가? 

"강정이나, 밀양이나, 결국은 마을이 깨지는 일이다. 이전에 나는 국가적 아젠더를 깨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봤다. 거대 시스템을 고치는 일. 그런데 장수마을에 들어가면서, 거기서 사람들과 함께, 골목 나 우리 마을로부터 시작해 바꾸면서 세상을 넓혀가는 방식도 있다는 걸 알았다."

- 현재는 장수마을에 작업실을 갖고 있다. 성북도원은 성북문화재단 성북예술창작터가 협력해 마련한 공간이고. 당신이 성북과 인연을 맺게된 계기는? 
"결혼을 하면서, 나를 알던 내 동료들이 각시가 될 주연에게 부탁을 했었단다. '(당시엔 그림을 좀 놓고 있어서) 선일이 그림이 좋다. 꼭 다시 그릴 수 있도록 도와주라!'고. 작업은 성북쪽에서 하고 싶었다. 인권운동을 하는 후배 민선에게 작업실을 얻어 달라 했는데, 그곳이 여기 장수마을이었다. '작업실을 얻어주면 사람들에게 '미술강의'도 해줄게!' 하고 약속했는데, 거기서부터 시작해 여기까지 왔다."

돈이 되진 않지만, 열기와 정서를 주는 그림들 

인권의 가치를 지키는 일과 마을을 지키는 일이 다르지 않다. 만난후 두 사람은  서로 같은 장소에서 같은 것을 바라본다는 것을 알았다.
▲ 인권활동을 하는 각시 주연과 함께. 인권의 가치를 지키는 일과 마을을 지키는 일이 다르지 않다. 만난후 두 사람은 서로 같은 장소에서 같은 것을 바라본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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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여기는 인권, 마을, 그리고 그림이다. 본디 그는 떠도는 사람이었다. 조직 안에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산에서 혼자 천막을 치고 1년쯤이나 버틴 젊은 시기도 있다. 높은 산속이, 지리산이, 바다 물밑이 훨씬 편했다. 민족미술협의회 사람들과 함께 세월호 1주기 <망각에의 저항>전도 했다. 준비에 온몸을 던져 일했지만(수경씨 증언으로는), 그곳 '회원'은 여전히 아니다. 

그가 정착하고 싶었던 곳은 지리산이었다. 산에 안겨, 굽이굽이 흐르는 섬진강을 보며 살고 싶었다. 후배와 직접 '쪼그만 지붕 있는 거처'도 탐색했다. 드디어는 집을 마련해 들어가려는 찰라, 인권활동가 정주연과의 만났다. 이선일이 갔던 그 장소(용산, 밀양, 부산 영도 등)마다 정주연도 발자국을 찍고 있었다. 인권센터 건립을 위한 박래군의 천리길에는 함께 걸었다. 이후 그들은 부부가 되었다.    

- 얼마전 <한겨레신문>이 보도한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랐다. 
"그게…, 명단에 들어가지 못했으면 큰일날 뻔했다. '도대체 뭐 했냐?' 이런 힐난을 들을 거 아니냐. 동료 작가들 중엔, 도대체 왜 내가 명단에 들지 못했나 하고…, 억울해 하는 사람도 많다. 내가 보기에도 훨씬 더 '열심히' 한 이들도 빠져있다. 도대체 기준이 뭔가?"

- 지난해 5월 세월호 정부시행령 폐기를 촉구하는 문화예술인 594인 성명에 참여, 같은해 4월달엔 세월호 1주기 추모전에 '애도의 권리' 출품, 박근혜 대통령을 북쪽 독재자에 비유, 박정희 육영수의 탈을 번갈아 쓰는 박근혜 그림…(8월 역사의 망각전). 세월호 희생자 인양을 하는 잠수사들의 (방송자료) 삽화…. 노원 416지킴이 연대 활동…. 그들에게 '불온한 행위'야 어디 한두 개였겠는가?     
"이명박 정부시절부터 이런 블랙리스트가 존재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지원도 막고, 자리도 뺏고, 고소고발하고, 뒤로 비열하게…. 좀 당당하게 하든가. 육하원칙 밝혀서 어떤 이유로, 어떤 것 때문에 괴롭힌다, 이렇게…. 3관왕은 상도 좀 주고….작가에겐 100%의 자유가 필수적이다. 99%의 자유란 없다. '다른 것은 해도 되고, 이것만은 하지 마!' 이렇게 이야기하면 안 된다."

- '블랙리스트'가 어떻게 그림에 스며있을까 궁금했다. 그림에선 까마귀, 검은 강아지가 보이더라. 그런데 까마귀는 담배를 맛있게 피우고 있고, 검은 강아지는 귀엽기만 하다. 
"내가 중2때 쓴 글이 있다. 제목이 '검은색 나무가 되고 싶다'였다. 선생님이 세 번이나 거듭 물었다. '이것이 네가 쓴 것이 맞느냐고?' 그게 뭐가 중요한가? 아버지가 전쟁 당시 휴전선을 넘어오셨다. 주변에도 월남한 분들이 많았고. 해서 '빨갱이'에 대한 세상의 편견같은 걸, 일찌감치 알았다. 거기 내성도 생겼고…."

이선일 작가는 이야기를 나누다 무심하게 손님도 맞으러 갔고, 잊었던 커피도 끓여 내놓았다. 전시회 관람을 왔던 컬렉터 한 분이 그의 작품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사갔다. 전시회 동안 그가 판 유일한 그림이다.

그에게 그림은 돈벌이가 되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사는 마을과 세상에는 열기와 정서가 전달된다. 동시에 그림은 그의 존재 증명이기도 한 것처럼 보였다. 열다섯 살 소년이 꾸었던 꿈 '검은 나무'가 오십 지천명에 현실이 되었다. 전시는 오는 12월 9일까지. 성북문화재단 성북도원 02)2038-9989

그는 시처럼 제목을 썼다. 긴 제목이 제법 많다.
▲ 새는 저를 잡지 않는 사람의 손 위에 내려앉는다 그는 시처럼 제목을 썼다. 긴 제목이 제법 많다.
ⓒ 이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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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선일은 누구?

이선일은 국민대학교 회화과와 동 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현재는 장수마을(서울 성북구 삼선동)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그가 발딛고 머물고 있는 곳의 사람살이를 그림으로 풀어내고 있다. 그의 개인전 '오름짓', '길들여지지 않는 마음', 그리고 '덜 미학적인 더 인간적인-스스로 풍경이 된 마을' 제목에서 드러나듯, 그는 '가만히 있으라' 요구하는 세상을 향해 자생적이고 꿈틀거리는 저항적 사람살이에 대한 이야기를 그림에 담고자 하고 있다.


태그:#이선일, #블랙리스트, #성북도원, #강정밀양용산,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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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읽고 글 쓰고, 그림 그리고 사진 찍고, 흙길을 걷는다. 글자 없는 책을 읽고, 모양 없는 형상을 보는 꿈을 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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