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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요광장 혹은 인권의 광장이라고 불리우는 중앙 광장에선 에펠탑이 한눈에 보인다.
▲ 샤요광장 샤요광장 혹은 인권의 광장이라고 불리우는 중앙 광장에선 에펠탑이 한눈에 보인다.
ⓒ 정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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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하면 떠오르는 것은 에펠탑이고, 트로카데로는 파리에서 에펠탑이 가장 잘 보이는 장소다. 트로카데로라는 이름은 1823년 스페인의 트로카데로 요새에서의 승전을 기리며 붙여졌다. 그 전에는 이 지역을 샤요라고 불렀는데, 샤요라는 지명은 잠시 잊혔다가 광장을 둘러싸고 새로 지어지는 건물에 다시 붙었다. 그렇게 광장, 정원, 건축물, 지하철역에 과거와 현재 그리고 역사 속 지명이 모두 공존하는 장소가 되었다

트로카데로로 가는 건 간단하다. 동명의 지하철역인 트로카데로역에서 내려 지층으로 걸어 올라오면, 넓게 펼쳐진 광장을 쉬이 찾을 수 있다. 광장은 쌍둥이처럼 닮은 사요궁의 양 날개 사이에 있는데, 그래서 중앙에 서면 에펠탑이 정면으로 마주보인다. 중앙의 첨탑을 두고 그 옆으로 펼쳐진 탁 트인 전망은 도심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명관이다. 광장 위에 발을 옮기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과 카메라 렌즈가 정면으로만 향하는 이유다.

그래서인지 광장 초입부에 멈춰서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있다면, 그것은 일행의 기념사진을 찍는 사진사 일테다.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서 살아간다고 적힌 문구 아래, 광장을 명명한 프랑스의 전 대통령 프랑수와 미테랑의 이름이 적혀있다.
▲ 인권광장, 표지석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서 살아간다고 적힌 문구 아래, 광장을 명명한 프랑스의 전 대통령 프랑수와 미테랑의 이름이 적혀있다.
ⓒ 정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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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펠탑으로 향하는 집중력을 조금 흩트려 보자. 가위에서 깨어나는 느낌으로 고개를 살짝 움직이면, 발 아래 적힌 문구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고 살아간다." - 1789년 헌법 1조

이 문구를 보러 나는 여기에 왔다. 이 문구로 여기가 파리의 인권광장임을 알 수 있고, 이곳이 인권의 광장이기 때문에 이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인권의 광장이라 하니, 거창해 보인다. 뭔가 대단한 의식을 얘기해야 한다는 그런 부담감이 느껴진다. 난민을 돕고, 약자를 위해야 인권을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거리감도 든다. 그러나 인간의 권리라는 것이 그런 대단한 선의를 논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곳의 인권은 평등을 말한다. 너와 내가 같은 권리를 나누고, 자유의지를 가진 동등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존중해 주는 것. 우리 시대엔 이미 상식이 되어버린 그런 기본예의를 말한다. 또, 이런 지명은 비단 수도 파리 뿐 아니라 프랑스 대도시에 하나쯤은 있는 흔한 명칭이다. 그러니까, 우리 동네 개똥이처럼 흔하고 평범한 그런 장소인 셈이다. 다만, 에펠탑이 보이는 것만 다르다. 개똥이를 부르짖을 만큼 쉽게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을 수 있는 광장이다.

지난 한 달여간, 파리의 한국민들은 이 광장에서 총 두 번의 집회를 했다. 그러나 이번이 첫 집회는 아니다. 이번 정부 들어서만 벌써 여러 번, 한국민들은 자유와 평등을 외치기 위해 광장으로 나왔다.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지역에서 지난 2012년 가수 싸이가 노래를 불렀다. 한국 언론들은 저마다 싸이와 국격의 상관관계에 대해 대서특필했다. 그 여세를 몰아, 2015년 에펠탑은 싸이 노래에 맞춰 레이저쇼도 벌였다. 역시 언론에는 에펠탑이 보이는 광장에 한국이 등장하는 게 엄청난 국위선양처럼 포장됐다.

같은 장소에 다시 한국이 등장했다. 세월호의 재조사를 요구하고, 대통령의 처사에 항변하는 한국인들이 나섰다. 한 번은 그런 교민들이 부끄럽다는 글을 읽었다. 그리고 나는 그 부끄러움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녹색당(환경운동가)들의 통조림을 사용하지 말자는 주장이 적혀있다
▲ 대학가 벽보 녹색당(환경운동가)들의 통조림을 사용하지 말자는 주장이 적혀있다
ⓒ 정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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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가 있어, 전쟁이 있었지"라고 적힌 프랑스 좌파들의 벽보
▲ 파리의 벽보 "자본주의가 있어, 전쟁이 있었지"라고 적힌 프랑스 좌파들의 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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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를 걸으면 선동 벽보 한두 개쯤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또 각종 시민운동에 참여를 요구하는 서명운동도 일상적으로 마주한다. 그보다 직접적인 의견표명인 집회도 거의 매주말 공공장소를 점령한다. 이 도시에선 아무리 이상한 의견이라도 그걸 주장하는 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느껴야 하는 부끄러움은 다른 종류다. 이 도시의 시위는 집회의 성격이나 주최 단체에 따라 모임 장소가 달라지곤 한다. 매 테러 추모를 혁명의 공동체 정신을 상징하는 공화국 광장(place derepublique)에서 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인권의 광장이라는 속칭을 가지고 있는 트로카데로는, 주로 반인륜적 행위에 대한 의사표명이 등장하곤 한다. 중국의 파륜궁이나 이집트의 독재정권, 아프리카나 중동의 내전국에서 벌어지는 반인륜적 사건들에 대한 시민들의 의견이 자주 눈에 보이는 장소다. 그 사이에 등장한 한국의 사정이 전혀 특별하지 않은 게 부끄럽다.

"흔들릴지언정, 가라앉지 않는다"라고 적혀있는 파리시의 문구와 파리는 잊지 않는다라는 광고판이 테러 1주년 파리 전역에 부착됐다.
▲ 테러 1주년을 기념해서 도시에 부착한 간판 "흔들릴지언정, 가라앉지 않는다"라고 적혀있는 파리시의 문구와 파리는 잊지 않는다라는 광고판이 테러 1주년 파리 전역에 부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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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자전거를 배우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보조 바퀴를 떼어내고, 한동안 자전거가 무서웠다. 함께 배운 오빠는 저 앞에서 쌩쌩 달려가는데, 두 발을 페달 위에 얹는 게 어려웠다.

"왜 자꾸 한 발만 구르고, 발을 다시 땅에 대는 거야?"
"넘어지면 어떡해? 아프고 창피하단 말이야."
"두 발 다 구르지 않으면, 자전거는 나아갈 수 없어."

용기를 내고 힘껏 페달을 굴러도 나는 꽤 여러 번 넘어졌고, 초등학생씩이나 되는 씩씩한 어린인데도 여러 번 큰 소리로 울었다. 양 무릎에 피를 철철 흘리며 체인 빠진 자전거를 끌고 돌아오는 내게, 우리 가족 누구도 이제 됐으니까 그만하라고 하진 않았다. 그저 체인을 다시 감아주고 무릎을 치료해줬고... 그렇게 나는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됐다.


태그:#파리, #트로카데로, #집회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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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대학에서 프랑스를 공부하는 학생입니다. 도시와 사람들의 삶에 관심이 있고, 일상에 질문을 던져 보는 걸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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