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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을 가르치다

1972학년도 오산중학교에 부임해 그해 1학년 12반 담임을 맡았고, 이듬해는 2학년 11반을 맡았다. 3년 차가 된 1974학년도에는 3학년 11반을 맡자 학생들의 진급에 따라 3개년을 가르쳤다. 그러다 보니 늘 새로운 단원이기에 교재준비로 바빴다.

한편으로는 학생들을 3개년 맡으니까 거의 대부분 학생들을 다 아는 이로움은 있었다. 당시 중학교는 평준화였는데 고교도 1974학년도부터 고교평준화정책이 시행돼 이전과 같은 입시준비는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름 있는 상고나 공고와 같은 실업학교에 가자면 연합고사 성적이 우수해야 했고 일반 인문계 고교도 일정 수준의 연합고사 점수를 따야 했다.

연합고사 성적에 밀린 학생은 인문계 야간고교나  실업계 미달학교에 진학하거니 재수를 해야 했다. 그래서 중학생 학생들에게도 '지진아 지도'라는 명목으로 보충수업이 실시됐다. 그러다 보니 정규 수업시간 24시간에 보충수업 6시간으로 하루 수업시간이 5~6시간으로 빡빡했다.

첫해 1학년 12반 학급담임 때는 학년말에 세 명이 등록금 미납으로 등교정지를 당했지만 다행히 새 학기 전에 등록을 마쳐 모두 2학년으로 진급시켰다.

이듬해 2학년 11반을 맡은 뒤 무결석반을 만들고자 노력했건만 일주일도 안 돼 정아무개 군이 제일 먼저 결석을 했다. 그 뒤로도 결석이 다반사였다. 눈동자가 흐리고 핏기 잃은 그가 다시 자리를 메워줄 때는 약속을 저버린 미움보다 연민의 정이 앞서 다시는 결석치 말라고 타일러 보내지만 이튿날 다시 자리를 비워 나뿐 아니라 학급학생들의 안타까움을 더해줬다.

학교에서는 전교생의 출석율을 높이는 방안으로 한 달간 무결석반을 다음 달 전교운동장조회 때 표창과 아울러 약간의 상금을 지급했다. 그래서 담임보다 학생들이 출결에 더 민감했다. 1학기는 출석 반 결석 반으로 지내던 녀석이 2학기에 들어서자 숫제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오산중 졸업생과 북한산에 오르다(왼쪽부터 안성근, 강상욱, 기자, 최만욱. 이 가운데 안성근 군은 3년간 담임을 햇다.)
 오산중 졸업생과 북한산에 오르다(왼쪽부터 안성근, 강상욱, 기자, 최만욱. 이 가운데 안성근 군은 3년간 담임을 햇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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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자퇴생

어느 하루 2교시 수업을 끝내고 내 자리로 돌아오자 얼굴이 파리한 부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집안 형편상 도저히 중학교를 보낼 형편이 안 됩니다. 형편대로 살아야지요. 애 아버지 도장을 가지고 왔으니 퇴학처리해 주세요."
"…."

나는 할 말을 잃고 묵묵 듣기만 하다가 도장을 건네받았다.

"내년에라도 형편이 나아지면 학교로 찾아오세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자퇴원서를 쓰는 동안 창 너머 한강만 바라보았다. 내가 도장을 찍은 뒤 돌려주자 어머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교무실을 떠났다. 나는 몹쓸 짓을 한 것 같아 그날 내도록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

1974학년도 고교연합고사가 끝나자 학교생활에 다소 여유가 생겼다. 우선 보충수업도 없어지고 원서를 쓴다는 핑계로 정규수업도 단축됐다. 어느 하루 퇴근길에 수송동에 있는 모교 중동고등학교로 갔다. 나를 국문학과로 인도해 주시고 사학회관을 일러주신 박철규 선생님을 찾아뵈려고 갔다.

박철규 선생님

중동고 은사 박철규 선생님의 만년 모습
 중동고 은사 박철규 선생님의 만년 모습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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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규 선생님은 그새 교장으로 승진해 있었다. 박 선생님은 그간의 내 행적을 물은 뒤 제의했다.

"박군, 아니 박 선생. 모교로 올 생각은 없는가?"
"네에?!"

"신학기를 앞두고 교사를 초빙하고 있는 중이야. 이력서를 한 번 내 보시게."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뛸 듯이 기뻤다.

박철규 선생님, 내가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된 것은 1961년 고교 입학시험장에서다. 첫째 시간 국어 시험이었다. 시험 답안지의 빈칸을 어느 정도 메운 후 나는 감독 교사를 바라보았다.

바로 박 선생님이었다. 훤칠한 체구, 남색 싱글 양복차림으로 약간 곱슬머리에 얼굴의 윤곽이 굵은 멋쟁이 선생님이었다. 마치 <우정 있는 설복>의 케리쿠퍼 인상으로 내 머릿속에 확 빨려들었다. 물론 그때는 그분의 성함도 전공과목도 몰랐다.

입학 후, 국어 시간에 선생님을 만났다. 그것도 첫 시간이었다. 나는 몹시 반가웠다. 그 무렵 고1 국어 교과서 첫 단원은 이하윤 씨의<메모광>이라는 글이었다. 선생님은 그 글을 학생들에게 읽히고는 독후감을 발표케 했다.

첫 번째로 내가 지명됐다. 나의 심한 경상도 사투리가 교실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여러 명의 발표자 중 선생님은 유독 나를 칭찬했고, 마치 노래자랑대회에서 최우수로 뽑힌 가수처럼 다시 발표를 시키며 경청해주시고, 내 이름을 제일 먼저 기억해주셨다.

나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한테 한문을 약간 배운 탓으로 한자 실력은 동급생보다 조금 자신 있었다. 국어에 한자의 비중은 반 이상을 차지하기에 그래서 수업시간 선생님에게 돋보일 수 있었다. 1학년 가을 교내 백일장에서 입상하자, 그 일로 나는 선생님이 맡은 신문과 교지에 편집기자로 뽑혔다. 자연스럽게 교실 밖에서도 선생님과 접촉이 잦았다.

해마다 '학생의 날'이면 당신이 체험한 광주 학생사건 이야기를 생생히 들려 주셔서 우리들 가슴에 잦아진 민족혼을 일깨워주셨다. 2학년 때 교내 문예 현상모집에<국화꽃 필 때면>이란 내 작품이 소설 부문 당선작으로 뽑히자 선생님은 더욱 나를 아껴주셨다.

"박군은 국문과로 가야 해."

선생님은 나와 마주칠 때마다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몇몇 분이 국문과는 춥고 배고프다고 법대나 상대를 권했지만 나는 굳이 국문과를 택했다. 졸업식장에서 나는 뜻밖에도 공로 표창장을 받았다. 뒷날 담임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졸업사정회 때 박 선생님이 극구 천거했다고 했다.

모교로 가다

그 무렵 꿈이었던 모교의 교단에서 후배들을 가르치게 되다니. 1975년 2월 하순. 교사 부임에 필요한 구비서류를 제출하고 학교를 나오다 숙명여고 교문 앞에서 선생님과 마주쳤다.

"수속 다 끝났어?"
"네, 방금 제출했습니다."

"박 선생!"
"네, 선생님?"

"나, 새 학기부터 그만두게 됐네."
"네?!"

나는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넋을 잃었다.

"아무쪼록 열심히 근무해."
"선생님! 이럴 수가…."

선생님은 더 이상 말씀을 않으시고 '허허' 너털웃음을 지으셨다. 내가 부임 수속이 끝나는 날에야 선생님의 이임 소식을 듣다니. 나의 모교 부임이 선생님의 마지막 선물일 줄이야. 선생님은 당신 앞일을 한 치도 내다보지 못하시고 나를 채용하신 것 같다. 왠지 모교에서 지낼 앞날이 불길할 듯한 예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오산중학교에서는 이미 사의를 표명한 바가 아닌가. 그래, 부딪혀 보는 거다. 그래서 1975학년도 새 학기부터 모교인 중동고등학교 교단에 서게 되었다.

스승과 제자간 이승에서 마지막 작별 인사(2006. 9. 당시 은사님은 93세였다.)
 스승과 제자간 이승에서 마지막 작별 인사(2006. 9. 당시 은사님은 93세였다.)
ⓒ 권태균(당시 월간중앙사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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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박도 지음 실록소설 만주 제일의 항일 파르티잔 <허형식 장군>이 시중 서점에서 절찬리 판매되고 있습니다(눈빛출판사 / 1만3000원).



태그:#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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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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