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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광화문 촛불집회에 참여한 국민들. 세종문화회관 계단에 앉아 있는 국민들.
 서울 광화문 촛불집회에 참여한 국민들. 세종문화회관 계단에 앉아 있는 국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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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토요일 제6차 촛불집회에는 전국에서 232만 이상의 국민이 참여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촛불집회 참가자 수가 줄지 않겠느냐는 일각의 예측은 무색해졌다. 해외와 본국에 있는 우리 국민들은 집밖으로 몰려나가 거리를 광장으로 만들고, 그 광장에서 "박근혜 체포!", "박근혜 하야!"를 소리 높여 외쳤다. 서울 광화문광장에선 일부 외국인들도 "하야~하야~하야!"란 노랫가락을 따라 불렀다.

이런 가운데서도 여야 정치권은 국민의 요구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여당은, 한쪽에서는 충성스럽게 대통령을 옹호하고, 한쪽에서는 대통령을 탄핵할 듯하면서도 이참에 개헌을 성사시켜 정권을 연장하려는 모습마저 보이고 있다. 

야당도 별반 다르지 않다. 제1야당과 제2야당은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면서도, 또 탄핵을 추진하면서도, 야권 내부의 주도권 다툼을 벌이는 듯한 인상, 대선 승리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듯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여당 내 비박 세력을 압박해 탄핵소추 대열에 동참시켜야 하는 이 중차대한 상황에서도, 두 야당은 이따금 딴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국민의 명령을 제대로 따르지 않는 정당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1968년 68혁명 때의 프랑스 제1야당, 공산당의 사례가 바로 그렇다. 그때 프랑스 공산당은 여당도 아닌 야당이면서, 프랑스판 '촛불'을 끄려 했다. 그래서 국민의 엄중한 심판을 피할 수 없었다.

샤를 드골 대통령의 여당인 공화국민주연합은 당연히 촛불을 끄려 했다. 이런 상황에서 제1야당인 공산당마저 '촛불' 앞에서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여야를 포함한 정치권 전체의 변혁을 요구하는 국민의 외침 앞에서, 제1야당은 국민이나 나라의 이익이 아닌 정치권과 자기 당의 이익을 먼저 고려했다. 그래서 '촛불'을 끄려 했다가 국민의 심판을 받은 것이다. 

경복궁 서쪽 담장을 지나 청와대로 몰려가는 국민들.
 경복궁 서쪽 담장을 지나 청와대로 몰려가는 국민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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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프랑스, 그리고 지금의 한국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과 소련이 자신들의 지배체제를 공고히 한 지 10년이 좀 지난 1960년대 중후반. 1945년 이래로 미·소 양국이 냉전 대결을 주도하고 이를 중심으로 세계질서가 재편되다 보니, 10여 년쯤 흐른 1960년대 중후반에는 이에 기초한 지배구조가 세계적 차원에서 확립되었다.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진영에서는 정치권력과 손잡은 자본가계급의 지배력이 강화되고, 소련이 주도하는 사회주의 진영에서는 정치권력을 떠받치는 공산당의 지배력이 강화되었다. 이 시기에 한국에서도 박정희 군사정권과의 제휴 속에 재벌의 지배체제가 한층 더 견고해졌다.

이런 속에서 전 세계 시민대중의 자유와 경제적 권리는 한층 더 억압되었다. 당시의 우리 할머니·할아버지, 어머니·아버지 세대는 무언가에 쫓겨 정신없이 일하면서도, 경제적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항상 착취에 시달렸다.

또 자본주의 진영에서는 공산당을 없애야 한다는 명목으로 통제가 강화되면서 국민들의 자유가 더욱 더 억압되었고, 공산주의 진영에서도 자본가들을 없애야 한다는 명분으로 통제가 거세지면서 국민들의 자유가 한층 더 억압되었다. 1960년대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겪은 경험을 세계의 다른 나라 사람들도 똑같이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흐름에 맞서 시민대중의 이익을 지키고자 일어난 게 바로 68혁명이다.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간 68혁명은 그 같은 부조리에 대항한 운동이었다. 이것은 시민대중이 정당히 가져야 할 경제적 권리와 자유를 시민대중의 품으로 되돌리기 위한 것이었다.

68혁명은 처음엔 교육환경 개선을 촉구하는 프랑스 낭테르대학 학생들의 시위로 촉발됐다. 이때가 1968년 3월 중순이다. 시위의 열기는 이 대학에만 머물지 않고, 소르본대학을 비롯한 프랑스 전역의 대학들로 확산되고, 얼마 안 있어 공장들로까지 번져갔다. 노동자들이 학생들과 손을 잡은 것이다. 이렇게 판이 금세 커진 것은 노동자와 학생들 사이에 정치·경제적 부조리에 대한 공감대가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규모가 늘어나면서 시위는 대학의 변화가 아니라 정치체제의 변화를 요구하는 쪽으로 발전했다. 자유와 경제적 권리의 보장을 요구하는 쪽으로 발전한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 박근혜·최순실 비리에 대한 분노가 정치권 변혁의 요구로 바뀌고 있는 것처럼 1968년 프랑스에서도 그랬다.

68혁명 당시의 포스터. 공장 건물이 혁명세력에 의해 장악된 상태를 상징한다. “68년 5월은 기나긴 혁명의 서막이다”라고 적혀 있다.
 68혁명 당시의 포스터. 공장 건물이 혁명세력에 의해 장악된 상태를 상징한다. “68년 5월은 기나긴 혁명의 서막이다”라고 적혀 있다.
ⓒ 위키백과 영문판(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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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집단이 있었다. 바로 정치권이었다. 여당은 당연히 그랬고, 심지어는 야당도 그랬다. 국민들의 요구를 반영해 정부와 여당을 압박해야 할 야당마저 분위기에 역행했던 것이다. 야당은 여당에 비해서는 진보적이지만 여당과 더불어 정치권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정치권 전체의 변혁을 요구하는 움직임 앞에서는 국민의 편이 아니라 여당과 같은 편일 수밖에 없었다. 제1야당은 국민보다는 '동업자 사회'의 이익을 먼저 고려했다. 

대학생 시위가 확산되어 정치권까지 위협하는 단계가 되자, 다른 당도 아니고 제1야당인 공산당이 발끈 하고 나섰다. 당시 프랑스 공산당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공산당이 아니라 중도 성향의 정당이었다. 1년 전인 1967년 국회의원 총선 당시의 공산당은 중도에서 왼쪽으로 약간 기운 정당이었다. 중도좌파였던 것이다.

학생 시위가 내심 불만스러웠던 공산당 지도부는 5월 3일 기관지 <뤼마니테>를 통해 학생 시위대를 비판하고 나섰다. 학생운동 지도자 중 하나인 콩방디의 정체성을 문제 삼은 것이다. <뤼마니테>는 그가 독일계라는 점과 무정부주의자라는 점을 부각시키면서 학생들을 가짜 혁명가로 몰아세웠다. 여당인 공화국민주연합도 아니고 제1야당인 공산당이 '촛불'을 끄려 했던 것이다. 

군인 시절의 샤를 드골.
 군인 시절의 샤를 드골.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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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야당의 훼방에도 불구하고 학생 시위는 계속 확산됐다. 급기야 1천만 노동자들까지 이 대열에 가담했다. 노동자들도 시위대에 가세하고 연대 파업을 벌였다. 그제야 공산당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촛불'이 '횃불'로 번진 다음에야 '이게 보통 일이 아니구나' 하고 느낀 것이다. 그러자 제1야당은 비판 대상을 드골 정부로 바꾸었다. 이때가 5월 하순이다. 5월 24일이 돼서야 제1야당이 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1967년 국회의원(하원) 총선거 당시, 집권당인 공화국민주연합은 1962년 총선 때의 233석(총 의석 482석의 48%)에 못 미치는 199석(총 의석 487석의 41%)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제1야당인 공산당과 제2야당인 민주사회주의좌파연맹의 의석은 합해서 194석이었다. 기타 정파가 보유한 의석은 94석이었다. 이랬기 때문에 194석을 가진 두 야당이 94석을 가진 기타 세력을 끌어들여 국민들의 움직임에 신속히 가세했다면, 자유와 경제적 권리를 늘리고자 했던 68혁명의 정신이 훨씬 더 차원 높게 실현됐을 수도 있다. 

하지만, 프랑스 야당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프랑스판 촛불 앞에서 시대와 국민의 이익을 먼저 고려하지 않고 자기 당의 이익을 먼저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5월 3일의 기관지 보도를 통해 '촛불'을 끄려고까지 했던 것이다.

노회하고 권력욕이 강한 드골 대통령은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시위대와 야권이 분열한 틈을 타서 그는 반격을 개시했다. 군대를 동원해 시위대를 진압하고, 국회마저 해산해버렸다. 그러고는 곧바로 총선 실시를 발표했다. 분위기 반전을 위해 총선이란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이때가 5월 말에서 6월 초였다.

이 과정에서 드골은 시위대를 사회혼란을 부추기는 불순세력으로 몰아세웠다. 그리고 안정을 희구하는 보수세력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국민과 야권의 협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야당의 비협조로 68혁명의 요구가 일반 유권자들에게 충분히 전달되지 않은 탓에, 정치 안정을 외치는 드골의 전략은 6월 23일 총선에서 먹혀들었다. 여당은 종전보다 93석 많은 293석을 얻음으로써 전체 의석의 60%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자신들의 이익 고려, 역풍 맞은 야당

한편, 제1야당은 60석 감소한 61석을 얻고, 제2야당은 16석 감소한 57석을 얻는 데 그쳤다. 68혁명의 요구를 제대로 수용하기는커녕 자신들의 이익을 먼저 고려한 야당들이 가장 큰 대가를 받았던 것이다. 68혁명에 참가했던 시민대중이 야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게 야당 참패의 결정적 요인이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드골과 여당도 패배한 셈이었다. 이듬해인 1969년, 드골은 지방제도 및 국회 개혁에 대한 국민투표를 제안했다가 역풍을 맞고 패배해 결국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그리고 1970년에 숨을 거두었다.

1970년대 들어 프랑스 야당들은 68년의 교훈을 발판으로 스스로를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야권 연대에 공을 들였다. 그래서 68의 정신이 뒤늦게나마 제도권 정치에 반영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이 1968년 시점에서 자신들의 사익을 내버리고 시대와 국민의 요구에 전적으로 부응했다면, 그들 자신도 훨씬 더 잘됐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사회도 훨씬 더 나은 사회가 되었을 것이다.

오는 9일에 우리 국회가 탄핵소추안을 통과시키지 못한다면, 여당은 물론이고 야당도 상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국민들은 청와대와 여당은 물론이고 야당까지 촛불로 불태우려 할 것이다. 68년의 프랑스 야당들이 받은 뼈저린 대가 이상으로 한국의 여야 정당들도 엄혹한 국민적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경복궁 서쪽 담장 옆의 청와대 입구에서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 국민들.
 경복궁 서쪽 담장 옆의 청와대 입구에서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 국민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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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촛불집회, #68혁명, #탄핵소추, #대통령, #탄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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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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